79화.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데, 데이지 영애 정말로 몰입감 항목 10점 줬어요?!”
나는 디아나의 태도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여유 있게.
그러나 겸손하게.
그것이 먼치킨의 자세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와아아!”
몰려 있던 후궁 영애들이 경악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잠시 방을 가득 채웠다.
무력이나 마력이나 매력으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건 아니지만, 분명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사기적 특성을 가졌으니 나는 오늘부터 먼치킨이다.
암튼 그렇다.
먼치킨 특성을 가져 본 적 없는 나는 ‘금색이면 다 금이다’라는 무논리로 내 상황을 합리화했다.
나르시시즘 가득한 셀프 올려치기.
애정 결핍보다 무섭다는 버프 결핍이 초래한 부작용이었다.
“그럼 영애는 오늘 로제 떡볶이 먹는 거예요?”
“네, 오늘 먹어 보려고요!”
나는 웃음을 감출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했다.
“쓰읍. 영애 머리 움직이지 말라니까요?”
머리를 땋아 주던 후궁 영애가 거울 너머로 눈을 흘겼다.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사과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오늘은 여름국 연등축제 날.
여름국 황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웠다.
여름국 근위대는 산속에 있던 기지를 급습해 겨울국 재건 협회 일원을 잡아넣었다.
기지에서 빼도 박도 못 할 증거가 나온 탓에 국서는 바로 의금부로 압송됐고 조만간 처분이 결정될 거라 했다.
동쪽 방 영애들은 국서가 흑막이었다는 소식에 칼같이 탈덕했다.
최애의 병크도 병크 나름이지.
청렴하고 다정한 그의 인성에 반했던 영애들이라 더 충격이 컸다.
영애들은 이렇게 된 거 남주 탐색에 더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심지어 타이밍도 딱이었다.
연등축제는 귀족과 평민이 함께 어울리는 대축제였다.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광장에 나가 여름국의 안녕을 기도하니, 귀족과 평민들이 모두 몰려와 구경한다.
그녀들은 옷을 갈아입고 몰래 축제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썸타기에 최적화된 환경. 흑막 안녕, 해피엔딩 시작이다.
영애들은 슬롯 확보에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도 드디어 현대 한식 먹는다!’
뜻밖의 사건에 엮이는 바람에 여름국 저잣거리 한식을 맛보지 못했다.
나는 지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빽빽한 맛집 탐방 스케줄을 세웠다.
그리고 후궁 영애들이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아이시스와 먼저 저잣거리를 돌아다닐 계획이었다.
오늘은 밤새 위장을 불태워야 한다.
비장하게 눈에 힘을 주는데 불쑥 눈앞으로 화사한 한복이 들어왔다.
하이디가 하얀 저고리와 살구색 치마를 내 몸에 대 보고 있었다.
“영애는 머리가 밝아서 옷도 밝은 색이 어울려요. 이건 하이디가 시집오기 전에 입던 옷인데 한번 입어 봐요.”
“입던 옷이 이렇게 깨끗해요? 관리 잘하셨네요.”
“한 번밖에 안 입었거든요.”
하이디는 제일 아끼던 옷이라며 히죽히죽 웃었다.
영애들은 여름국에 왔으면 한복을 입고 태블릿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게 국룰이라며 한복을 빌려주었다.
나는 이 나라의 유행은 잘 모르니 그들에게 모든 걸 맡겼다.
준비를 끝낸 후, 자개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았다.
“데이지 영애는 봄국 유저라 그런가? 봄웜이네. 코랄이 찰떡이에요.”
“그러니까요. 화사하다, 정말.”
“댕기로 반 묶음을 해서 그런지 이국적인 느낌도 나고.”
그들은 내 머리를 반 묶음으로 윗머리만 땋고 중간에서 금빛 댕기를 달아 주었다.
길게 늘어진 금발이 저고리 장식처럼 어우러진다.
별생각 없이 따라 입었는데, 역시 전문가는 달랐다. 여름국 유행을 선도하는 황실 여인답게 그들의 안목은 대단했다.
그때, 휘장을 걷으며 나온 아이시스가 뿌듯하게 웃었다.
“저도 착장 끝났어요!”
청보랏빛 머리칼에 어울리는 연보라색 저고리와 푸른 치마, 가슴을 가리는 은빛 허리띠가 뒤에서 리본으로 묶여 길게 내려왔다.
마치 인형 같은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꺄아악!”
아니, 비명이 나왔다.
나만 그런 건 아녔다.
후궁 영애들과 나는 입을 틀어막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흑, 너무 예뻐요!”
“인형이야 뭐야.”
“아이시스 영애 코디 누가 했어요?”
“키스카 소용 영애가 했어요!”
“자! 박수박수박수! 우리 황실의 미감을 뽐낸 소용에게 감사합시다.”
8명의 동쪽 방 영애들이 일어나 다소곳이 키스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키스카와 다른 5명의 후궁 영애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텐션을 거부했다.
역시, 분파의 기준은 개그 코드도 포함된 듯했다.
“근데 영애 둘이서만 돌아다니면 위험할 거 같은데요?”
“맞아요. 저희가 최대한 빨리 끝내고 합류한다 해도 3시간은 걸릴 텐데…….”
“호위라도 붙여 드려야 할 거 같아요. 혹시 사가에 괜찮은 #검사남주 있으신 분?”
붉은 장삼을 입은 후궁 영애가 짝짝 박수를 치며 돌아봤다.
수많은 영애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제 소꿉친구가 이번에 무과 준비 중인데, 검술이 예술이에요!”
“어머, 무과 준비? 혹시 영애 보려고 황궁 들어오려는 거 아니에요?”
“첫사랑 곁에 머물려고 입궁하는 남주라니, 저는 이 주식을 사겠습니다.”
“나 #소꿉친구물 진짜 좋아하는데. 영애, 이 재밌는 서사를 왜 숨겼어요? 얼른 썰 좀 풀어 봐요.”
“아니 영애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열댓 명의 영애들이 모인 탓에 대화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다.
나와 아이시스는 눈을 맞추고 웃음을 삼켰다.
[아이시스: 여름국 재밌죠?]
[네, 너무 재밌어요.]
바로 답하자 아이시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이시스: 먹는 건 더 재밌어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떨려 죽겠는데,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제 위장 설레게 하지 말아주세요.]
아이시스가 키득키득 웃으며 금화를 들어 보였다.
[아이시스: 책임지겠습니다.]
성녀님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법을 아는 여주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황족들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화월궁을 나갔다.
아이시스와 나는 그 틈에 바로 환원 거리로 이동했다.
“영애, 괜찮아요?”
골목 어귀 어둑한 곳.
나는 벽을 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으으, 네 괜찮아졌어요.”
“그냥 걸어서 나올 걸 그랬나 봐요.”
“아니에요. 스크롤을 오랜만에 썼더니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요.”
그동안 이걸 어떻게 매일 썼던 거지.
탐색이 끝난 지 고작 9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새에 몸이 스크롤 관성에서 벗어났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아이시스와 함께 골목을 벗어났다.
골목 끝에 반짝반짝 빛나는 거리가 보였다.
“아, 맞다. 영애, 여름국 축제는 소매치기 남주가 활동하니까 주머니는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소매치기 남주요?”
“네, 서사 쌓기 제일 쉬운 남주라 웬만한 여름국 여주들은 다 그 남주를 슬롯에 하나씩 넣어 뒀어요.”
아이시스가 유서 깊은 소매치기 문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슬롯에 넣은 것도 분노한 영애들이 몸싸움을 하다 옷깃이 스쳐 담긴 거라고 하니, 그 남주를 슬롯에 넣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 만했다.
어쨌든 만나기 쉽다는 건 그만큼 주머니를 털리기 쉽다는 뜻이니 나는 순순히 아이시스에게 주머니를 넘겼다.
뉴비라면 반항하지 말고 고인물 유저의 가이드를 받는 게 현명하다.
여름국 축제가 처음인 나는 금세 주의를 잃었다.
“아이시스 영애, 저것 좀 봐요. 식혜를 대나무 잎에 말아서 파네요?”
“저기서 음료 테이크 아웃하면 상태창 안내 뜨는데 진짜 웃겨요. 환경 보호를 위해 자기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자랑한다니까요?”
“AI들 은근히 게임에 자부심 강하지 않아요? TMI도 엄청나고.”
“영애도 느꼈구나. 저는 세계관 설명 나오려 하면 딱 말 끊어 버려요.”
“저도 그러는데! 와, 저것 좀 봐요! 연등이 만국기처럼 달려 있네요. 너무 예쁘다.”
나는 AI의 TMI를 욕하다 순식간에 하늘로 시선을 빼앗겼다.
거리에 가로등처럼 심어진 높은 솟대에 끈이 연결되어 있고, 그 끈에 다양한 색깔의 연등이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온도 높은 불빛이 저잣거리를 비추어 거리 정경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활력 넘치는 축제 거리를 보다 웃으며 아이시스에게 물었다.
“여름국은 익숙해서 그런지 더 현실처럼 느껴지네요.”
아이시스는 그 말을 곱씹듯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서 디아나가 과몰입이 심한가?”
“그럴 수도 있겠어요. 솔직히 여름국 사람들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나는 거리의 동양 남주들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구요?”
아이시스의 물음에 나는 광장 한복판에서 춤을 추는 광대를 가리켰다.
“저기 저 하얀색 머리띠 두른 남자 있잖아요. 아이돌 B군 닮지 않았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아이돌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러자 아이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그 광대의 얼굴을 살피다 고개를 저었다.
“에이, 전혀 다른데요? 근데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알 거 같아요. 그 아이돌이랑 스타일이 비슷하네요. 웃는 것도 그렇고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그런가요?”
고개를 갸웃하는데 갑자기 북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몰려 있던 인파가 갈라지더니 사람들이 분주히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아이시스가 내 소매를 당기며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데이지, 우리도 엎드려야 해요.”
그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황족의 행차를 알리는 고함이 들려왔다.
벌써 환원을 한 바퀴 돌았는지, 황족의 행렬이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 설치된 북고 앞에서 한 남자가 북채를 크게 휘둘렀다.
둥둥.
공기를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퍼졌다.
나는 아이시스를 따라 바닥에 엎드렸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대연(大輦, 통치자가 타는 가마 중 하나)을 짊어진 사내들이 보였다.
욕심을 내 시선을 조금 더 높이 드니 그 위에 앉은 디아나가 보였다. 그녀가 탄 가마 지붕에도 장식처럼 작은 연등이 매달려 있었다.
연등 장식 아래로 디아나의 용안이 훤히 보였다.
어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밀린 업무로 지친 건지 디아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낯으로 그녀는 그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대표적인 과몰입 유저였다.
주변 사람이 사라지는 걸 견디지 못했고, 오죽하면 10년이 넘도록 그녀에게 은퇴를 반려당하는 불쌍한 노인도 있었다.
그녀는 주변 인물뿐 아니라 나무 한 그루, 잉어 한 마리, 심지어 날아다니는 잠자리도 소중히 여겼다.
그들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름국의 수많은 사람, 백성들에게도 진심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 수많은 백성 앞에서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뭐야, 무슨 일 있나?’
행렬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지금 저녁 먹으러 가요. 다들 행사 보러 가서 이 시간에는 주막이 덜 붐비거든요.”
나는 아이시스를 따라 걸었다.
아이시스의 말대로 광장의 반대편 골목이 한산했다.
“저, 아이시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요?”
“혹시 디아나 영애한테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왜요?”
“아뇨, 아까 행차할 때 보니까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
생각나는 이유가 있는지 아이시스가 작게 탄식했다.
“원래도 연등축제를 안 좋아하더라고요. 그리고 국서한테 배신당해서 좀 우울해하는 거 같아요.”
“디아나가 국서를 좋아했나요?”
“좋아했겠죠. 제가 알기로 엄청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친구가 배신을 때렸으니 우울할 만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