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잔잔한 연못 위로 별처럼 가득한 풍등이 보였다. 나는 그 불빛들에 잠시 시선을 주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 외면해 왔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럼 이제 다시 못 보는 거야?”
그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난 계속 네 옆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리고 씁쓸한 듯 덧붙였다.
[이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날 수는 없겠지만.]
“앞에 나타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널 만나?”
[계속 옆에 있을 거라니까?]
“보이지 않는데 네가 내 옆에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AI와 인간의 개념은 다른 걸까.
‘만난다’의 뜻이 달라 서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 수 있어.]
분명 내 생각을 읽고 있을 텐데도 그녀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건 여전히 내게는 다시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기껏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쉬이.]
어린 시절 나를 달래듯 나긋한 바람 소리를 내며 그녀가 어깨를 토닥였다.
[울지 마, 디아나. 보이지 않아도 너는 나를 느낄 수 있어.]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너도 나를 느끼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말을 마치기 전에 그녀가 완전히 사라졌다.
검은 물 위로 내 모습만 비쳤다.
사라진 허공으로 작은 상태창이 떠올랐다.
[버그가 복구되었습니다.]
혼란스러운 대화가 사라지고, 침묵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허탈함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다 뺨을 간질이는 이질적인 감각에 바로 두 손을 떼어 냈다.
물에 젖은 끈이 손목에 감겨 있었다.
그 붉은 끈은 방금 있던 일이 꿈이 아니라 알려 주듯 거친 촉감을 자랑했다.
멍하게 그것을 보고 있는데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고함이 들렸다.
“디아나!”
다리 위에 오르자마자 쌍둥이가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빠르게 헤엄쳐 다가오더니 나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양팔을 붙잡힌 채 끌려가면서도 수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거센 파동에 일그러진 수면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풀밭 위로 내동댕이쳐지기 무섭게 이검이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슨 생각이야, 대체!”
이성을 잃은 그는 내게 존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제 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검과 달리 삼검은 차분한 낯으로 내 옷의 물기를 짜 주었다.
침묵 속으로 거친 숨소리가 얽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그들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던 나는 동생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안 이럴게.”
나를 걱정하는 쌍둥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좀 일으켜 줄래?”
따뜻한 바람이 연못에서부터 밀려왔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 그 온기는 손끝에 잠시 고였다가 물러났다.
굳어 있던 이검이 먼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삼검이 그 손을 떼어 냈다.
“저 자식 손 잘 안 씻어. 내 손 잡아.”
“무슨 소리야.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단순한 녀석들은 언제 내게 화를 냈냐는 듯, 먼저 손을 잡으려 몸싸움을 했다.
짧은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에 나온 웃음이었다.
끈적하게 뒤엉켜 있던 오물이 씻겨 내려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희망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아직 불씨가 남은 풍등이 은하수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휘저었다.
소원이 이루어진 날의 밤하늘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
모든 건 원작대로 흘러갔고, 나는 더 이상 흐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황궁 밖으로 쫓겨나 이복 오라버니가 나를 대신해 섭정하는 것도.
그리고 돌아와 다시 황권을 되찾는 것도 모두 원작의 수순이었다.
놀라울 만큼 이야기는 정해진 대로 흘러갔다.
자잘한 설정은 달랐지만, 큼직한 결과는 같았다.
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귀족들을 숙청하고 내 사람들로 궁을 채웠던 원작과 달리,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궁을 내 사람들도 채웠다.
대신들이 쉽게 오라버니를 배신하고 내게 충성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장인이 되었기에.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적응 안 돼. 여자 후궁이라니.’
어쨌든 후궁을 들이던 날 공식적으로 섭정이 끝났고, 내 본편 타임라인이 시작되었다.
설정을 벗어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시간, 내가 간절히 바라던 시간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즈음에는 많은 유저들이 접속해 있었다.
커뮤니티가 북적해서 재미있는 글이 자주 올라왔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접속해 유저들의 사정을 듣곤 했다.
언젠가 나를 도와주었던 유저처럼 나도 유저들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나는 세계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캐릭터였고, 많은 유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늘 시간이 부족했다.
황제 캐릭터 자체도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가 황제인 것에 불만은 없었다.
황제는 ‘재앙’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3명의 유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틈틈이 ‘재앙’에 대한 정보를 모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대체 어떻게 느끼라는 건지.’
나는 턱을 괸 채 서탁에 놓인 목화 팔찌를 응시했다.
호언장담했으면서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느낄 수 없었다.
‘곁에 있기는 무슨.’
AI와 인간이 느끼는 ‘곁’의 의미는 다른 듯하다.
그나마 바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섭섭해할 시간도 없어서 나는 그녀를 원망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나는 타임워프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스가 마왕 토벌단을 꾸리며 내게 접촉을 해 왔다.
그즈음 ‘재앙’에 접근할 수 있는 두 번째 유저가 타임라인을 시작했고, ‘재앙’에 몰두하며 나도 차츰 약속을 잊어 갔다.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받아들였다.
이게 나의 곁에 있겠다는 그녀만의 방식이라는 걸.
느끼지 못해도 그녀가 곁에 있다 믿고 있으니, 곁에 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뀐 건 6년 후였다.
평소처럼 아이시스가 쓸데없는 메시지를 잔뜩 보내던 날이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전화처럼 사용했다.
[아이시스: 하여튼 알렉스 그 미친놈이 나보고 신탁은 받는 것만 가능한 거냐고, 그건 너무 무능하지 않냐고 비꼬는 거야. 그러더니 나보고 신한테 먼저 질문을 해보라고 하더라. 알려주시는 김에 동면지가 어디 있는지도 알려달라고. 내가 타임라인 6년 차인데 그런 또라이 남주는 처음 봤다니까?]
대충 흘려들으며 올라온 상소에 집중하는데, 아이시스가 생각났다는 듯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아이시스: 아, 맞다! 내가 말했나? ‘재앙’에 접근 가능한 세 번째 영애 들어왔다고.]
[어, 얘기했어.]
[아이시스: 아니, 그 뉴비 영애가 오늘 뜬금없이 나한테 이벤트 상품에 대해 묻는 거야.]
[이벤트?]
[아이시스: 봄국은 무도회 때 경품으로 레어 아이템 주잖아. 근데 영애가 상점에 없는 아이템을 받을 수 있냐고 묻더라고.]
[받을 수 있어?]
[아이시스: 나야 모르지. 그래서 오늘 커뮤에 봄국 이벤트 검색해 봤는데, 봄국에서 난리 난 주제였더라고. 지금까지 상점에 있는 아이템만 경품으로 줬었는데, 올해 이벤트는 1등 경품으로 S급 남주 관람권을 줬다는 거야.]
S급 남주라는 말에 붓을 집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S급 남주가 있다고?]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하고 흠칫했다.
다른 유저가 게임의 목적에 대해 알게 되면, 시스템에게 피해를 볼지 모르니 나는 입을 다물고 지내 왔다.
다행히 아이시스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해맑게 말을 이었다.
[아이시스: 없지! S급 남주 관람권 같은 아이템이 있었으면 벌써 누가 구매하고, 실물 영접 후기 올렸겠지!]
갑자기 메시지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아이시스가 조심스러운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아이시스: 근데 봄국 좀 이상해진 거 같지 않아? 아니, 상점에 없는 아이템이 경품으로 나온 것도 그렇고 뉴비 영애한테 봄국 황제가 캐붕해서 급발진했었잖아.]
[이상하긴 했지.]
[아이시스: 혹시 버그라도 발생한 거 아닐까?]
버그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파고들자 순식간에 온몸이 젖어 드는 기분을 느꼈다. 연못에서 들었던 말들이 생각난 탓이다.
[아이시스: 아니다. 이 완벽한 세상에 버그는 무슨. 어쨌든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기니까 뉴비 영애가 고생하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큼큼 목을 가다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시스: 삼검이나 사검 씨 안 바쁘시면 뉴비 영애 호위로 붙여주면 어떨까? 타임라인 시작하자마자 겨울국에 끌려오니까 많이 불안해하는 거 같.......]
[내가 할게.]
[아이시스: 그래 잘 생각했...... 응? 네가? 네가 호위를 한다고?]
[내가 삼검이랑 사검보다 나아. 메시지로 대화도 할 수 있으니까 그 영애도 더 편할 거고.]
[아이시스: 뉴비 영애 완전 운 좋다. 로열가드도 아니고 로열이 하는 가드라니.]
아이시스가 뭐라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버그라는 단어에 잊고 지냈던 그리움이 밀려와 모든 감각이 짓눌렸다.
나는 탐색대 일정을 맞추기 위해 며칠간 무리해서 일을 끝냈다.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겨울국으로 이동했다.
이미 가을국과 봄국 일행은 도착해 있었다.
아직 삼검과 사검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달리다시피 회의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문을 열자 바람이 크게 일었다.
햇볕에 달궈진 공기가 나를 따라온 한기에 밀려나며 바람이 내부로 파고든 탓이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사락사락, 쉴 새 없이 울었다.
그 시끄러운 방 안을 걸어가며 나는 원탁에 떨어져 앉아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나는 그녀가 ‘재앙’의 정보에 접근 가능한 세 번째 유저라는 걸 알았다.
긴장한 듯 맞붙은 구두와 얇은 원피스.
누군가 빌려준 듯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코트.
이제 막 타임라인을 시작한 뉴비의 어설픈 모습이었다.
천천히 올라간 시선이 그녀의 머리끝에서 멈추었다.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 위로 포근한 목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알렉스가 장난을 친 모양인지 꽃을 피워 내 만든 가짜 모자였다.
나는 그녀가 시나리오가 수정된 유저라는 것을 알았다.
오래전, 버그가 내게 하려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마침내 이해했다.
[너도 나를 느끼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시나리오 수정이 끝났다는 걸.’
내가 그랬듯 그녀 또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준비해 온 듯했다. 그 시간에는 분명 없던 것들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하던 시간에 늘 그녀가 곁에 있었다.
갑자기 알렉스가 토벌 전에 탐색을 해야 한다며 날 찾아온 것도, 엘런이 5검에게 시비를 걸며 검호를 빼앗아 가면서까지 내 참석을 종용하던 것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 와야만 했던 걸까?’
나는 눈을 깜빡이는 새로운 유저를 바라봤다.
그녀의 수정된 시나리오에 내가 필요한 모양이다.
나는 동요하는 마음을 누르고 나의 구원자가 보낸 동료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뉴비 영애.’
그리고 그녀가 준비한 모든 것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모두의 안전한 탈출, [결]의 완성을 위해서.
CH6. 과몰입 주의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