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한때는 희망을 얻었다는 사실 하나로 기뻐하던 날도 있었다.
그때 이 이벤트를 알았다면 나는 흥분해서 소원을 적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지쳐 있었다.
아직 희망을 놓지 못해 이곳에 온 주제에,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하더라도, 희망에 속지 않았다고 변명하고 싶은 옹졸한 마음이었다.
나는 붓을 들어 짧은 소원을 적었다.
‘어머니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소원은 하늘에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난간 아래를 멍하니 바라봤다.
누군가 내게 부딪힌 탓에 풍등을 난간 밖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풍등은 검은 강물 아래로 가라앉았고, 나는 뒤집어쓴 먹물에 젖어 우스운 꼴이 되었다.
“아이고, 이거 참 미안합니다.”
내게 부딪힌 남자는 미안하다고 사과 몇 마디를 남기고 슬금슬금 인파 속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부딪힌 이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은 저 물로 뛰어들면 AI의 방해 없이 로그아웃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시끄럽게 귓가를 간질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외려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 이질감 속에서 생각은 점차 선명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끝내 희망을 놓지 못해 여기까지 꾸역꾸역 온 내가 끔찍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으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거친 손에 어울리지 않는 비단 귀주머니가 들려 있다.
나는 그것을 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큰 키와 몸을 보면 어른 같지만, 남루한 옷차림은 그가 아직 소년임을 말해 주었다.
성장 속도를 감당하기 힘든 모양인지, 소매와 바짓부리 아래로 팔과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아가씨 물건이 아닙니까?”
소년은 눈앞에서 주머니를 흔들었다.
나를 밀친 사내가 훔쳐 간 주머니였다.
되찾으려 했다면 벌써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소년은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다시 물가로 시선을 틀었다.
“필요 없으니 가지거라.”
소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필요 없으십니까?”
조용히 있으니 소년은 손을 거두고 주머니를 챙겨 돌아갔다.
아니, 돌아간 줄 알았다.
나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풍등에 다시 그 아이를 쳐다봤다.
소년은 내 반대 손에 붓을 쥐여 주며 억지로 풍등에 글을 쓰게 만들었다.
“가진 것도 많으신 분이, 고작 소매치기 한 번 당했다고 세상 다 잃은 얼굴로 앉아 계십니까?”
신분제 사회에서 남루한 행색인 소년의 신분을 추측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이 소년이 평민 혹은 그 이하, 가을국 혼혈일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런데도 겁 없이 내게 손을 대는 게 기가 막혔다.
흘긋 눈동자를 든 소년이 내게 눈을 맞추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한 걸 아시면 부모님께서 서운해하실 겁니다.”
심지어 내가 쓴 소원을 훔쳐본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숨기지 않을 정도로 소년은 예의가 없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훔쳐보든, 멋대로 호의를 베풀든, 주제에 나를 동정하든.
오해를 푸는 것도 귀찮아 말없이 다시 소원을 적었다.
소년은 난간에 있던 초를 가져와 풍등 안에 불을 붙이더니 내게 다시 풍등을 쥐여 주었다.
나는 멋대로 희망을 불어넣는 캐릭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난간 밖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 힘을 풀자, 풍등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벤트 참가가 완료됐습니다! 추첨 결과는 개인 알람으로 공지드릴 예정입니다.]
내 풍등은 먼저 올라간 풍등과 열을 나란히 하며 별처럼 반짝였다.
그 불빛 사이로 또다시 비단천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소년이 다시 내게 귀주머니를 건넨 것이다.
“풍등값으로 치거라.”
“……풍등값이라기엔 너무 많습니다.”
“네 운이 좋은가 보지.”
소년은 침묵하다 주머니를 제 품에 넣었다.
그러면서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안 갈 거면 너도 풍등 하나 사 와서 날리거라.”
“필요 없습니다. 제 소원은 이루어졌거든요.”
그 아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웃으며 내 옆에 섰다.
“잘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는데 아가씨 덕분에 오늘은 좋은 곳에서 자게 생겼습니다.”
“왜 잘 곳이 없어?”
“지난달에 환원으로 상경했거든요. 운 좋게 숙식을 제공해 주는 곳에서 일했는데, 오늘 쫓겨났습니다.”
“왜?”
“왜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소년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난간에 기댔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탓에 나는 소년은 올려다봐야 했다. 그 아이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내가 이유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한참 마주 보고 있으니 그제야 소년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듬지 않아 머리가 부스스하고 안색이 거칠긴 하나, 이목구비의 선이 날카롭고 무엇보다 눈 색깔이 오묘한 미소년이었다.
금빛 같기도 하고 갈색 같기도 한 눈동자가 연등 빛에 물들어 오묘하게 반짝였다.
“혼혈민이라서?”
묻자 소년이 미소를 지은 채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상중이십니까?”
이번엔 소년이 내 옷을 보며 물었다.
나는 아직도 상복을 입고 있었다.
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
축제 거리 특유의 북적거리는 소음이 공허함을 메꾸었다.
한참 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돈이면 며칠이나 잘 수 있나.”
“근처 주막이면 아마 열흘은 잘 수 있을 겁니다. 운 좋으면 눌러앉아서 잡일이라도 도울 수 있을 거고요.”
“혼혈민을 고용하는 건 불법으로 알고 있는데.”
소년이 코웃음을 쳤다.
“세상 물정을 모르시네요. 그 법을 다 지키면, 여름국 용병 시장은 일찍이 망했고 농촌과 어촌도 일손이 부족해 여름국 물가가 배로 뛰었을 겁니다.”
“그렇게 일할 곳이 많은데 왜 쫓겨났을까.”
허세를 부리던 소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감히 나를 동정하고 심지어 씩씩한 척하던 소년이 침묵을 지켰다.
나는 검은 물을 응시하던 시선을 틀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직 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서툰 모양인지, 소년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왜인지 그 모습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억지로 희망이 있다 믿는 모습이 묘하게 동정심을 자극했다.
남루한 행색이나, 노동 착취를 당하는 현실이나, 잘 곳이 없어 길거리를 떠도는 모습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왜 이 아이가 희망을 놓을까 걱정이 되었을까.
언젠가 희망을 놓게 될 걸 확신했기 때문일까.
나와 비슷한 점이 하나 없는 소년에게 겹쳐지는 내 모습이 신경을 긁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소년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소년이 빠르게 몸을 틀었으나, 내가 조금 더 빨랐다. 주머니를 잡아챈 나는 그 안에서 주황색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따라 오거라. 머물 곳과 일감을 줄 테니.”
소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저한테 장난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입니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는 소년에게 들고 있던 스크롤을 건넸다.
“잡거라.”
“이게 뭡니까?”
소년의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소년의 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스크롤을 쥐게 만들고 종이를 찢었다.
***
“우욱.”
이동 스크롤을 쓴 게 처음인지 소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헛구역질을 했다.
“눈을 감으라 미리 알려줄걸. 미안하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안타깝게 보는데,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환관과 쌍둥이 둘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내가 몰래 나갔다 여겨 은밀히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환관은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렸다.
“어찌 말도 없이 나가신 겁니까! 소인이 죽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폐하, 어찌 상중에 잠행을 나가시는 겁니까.”
“저희에게 말이라도 해 주셔야죠!”
쌍둥이들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소년에게 머물렀다.
소년은 빠르게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아이는 쌍둥이들의 장포 가슴께에 매달린 표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검과 삼검을 뵈옵니다. 제 이름은 오리온 시두스입니다. 고향은 없으며, 지난달 환원으로 올라와…….”
환관은 관심 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되었다! 누가 네놈 사정을 듣고 싶다고 했느냐? 아이고 폐하아! 저 비렁뱅이는 또 어디서 주워 오신 겁니까!”
대놓고 환관이 면박을 주었으나, 소년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상기된 얼굴로 쌍둥이들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들의 가슴에 달린 나무 표식에 시선을 두었다.
여름국에는 특이한 서열 문화가 하나 있었다.
검술을 중하게 여기는 이곳은 다섯 명의 검사에게 제1의 검, 제2의 검, 제3의 검, 제4의 검, 제5의 검으로 이름 붙여 명예를 주었다.
신분과 직급을 초월하는 호칭으로, 다섯 명의 검사는 일검, 이검 등 검호로 불렸다.
아이스타스 왕조부터 내려오는 문화로 황제의 칭호를 제외하면 모두가 검호를 우선으로 불렸다.
검호를 나타내는 표식은 색채로 서열을 나누었다.
오방색의 서열로 일검은 황색, 이검은 청색, 삼검은 백색, 사검은 적색, 오검은 흑색이었다.
검사들은 그 표식을 옷에 달기도 하고, 팔찌로 끼우기도 하고, 검에 매달기로 하였다.
오검의 서열을 나누는 검술 대회는 황제가 승하하고 100일 뒤에 열렸다.
오검은 기본적으로 황제를 모시는 이들이기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오검도 바뀌어야 했기 때문이다. 간혹 즉위한 황제가 직접 참여해 검호를 따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검 서열 대회가 열린 모양이다.
나는 씁쓸한 눈으로 동생들의 가슴에 달린 청색 표식과 백색 표식을 바라보았다.
타임워프를 해도 정해진 미래는 이뤄진다 들었는데, 저것을 보니 실감이 났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뜯어진 장지문 옆에 세워진 검을 보았다.
검 손잡이에 박힌 황색 나무 표식도.
돌아보니 따라온 소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다, 쌍둥이들을 보다, 환관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검에 욕심이 있는 아이인 듯했다.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도 오검의 표식을 알고, 저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정작 나는 내가 일검이 된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쌍둥이와 대련을 할 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이 시원하게 사라진 탓에, 나는 문틀에 기대 쌍둥이를 노려봤다.
“문을 닫았으면 좋겠는데 너희들이 부숴 놓았으니, 여기서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황제의 방문을 뜯어 낼 만큼 용기 있는 자는 이 두 놈밖에 없다.
이검과 삼검은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차라리 잘됐다. 부탁할 게 있었는데 죄책감 느껴 주면 감사하지.
“이 아이가 일할 자리를 만들 거라.”
“예?”
“누님, 아니 폐하 어찌 그런 명령을 내리십니까.”
이검과 삼검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부산하게 눈을 굴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나왔다.
“내 은인이야.”
웃음 때문인지, 은인이라는 말 때문인지 소년의 갈색 눈동자가 내 쪽으로 획 굴러왔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궁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