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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73화 (74/208)

73화.

어느덧 노을 진 궁궐에 붉은빛이 가득 찼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산책을 함께 했다.

황후가 나를 애착인형 대하듯 품에 끼고 어찌할 줄 몰라 할 때면 심장이 간지러웠다.

사실 내게 퍼부어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나는 그들이 언제 죽는지, 어떤 연유로 죽게 되는지 알지 못하니까.

그렇기에 그 미래를 막을 방법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들이 주는 사랑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그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

제목: 죽은 사람 살리는 법 아시는 분 [0]

『어머니랑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두 분을 살릴 방법이 없을까요?

혹시 방법을 아시는 분이 있다면, 제발 알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떨리는 손으로 게시글을 올렸다.

내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가을국 황태자의 즉위를 축하하러 떠나셨던 부모님은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계속 커뮤니티와 설명서를 뒤졌다. 그리고 AI에게 그들을 살릴 방법을 캐물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을 살려 낼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타임라인을 시작한 지 16년. 그동안 몇몇 유저들이 타임라인을 시작한 덕에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글을 올리고 1시간쯤 뒤에 다시 글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댓글을 확인했다.

┗ 저런 영애 ㅠㅠ 어떡해 많이 힘들겠다...... 혹시 30분 회귀권 써봤어? 원하는 시점으로 30분 동안 회귀할 수 있는 건데, 그걸로 과거 바꿀 수 있다더라!

회귀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눈물이 모두 메말랐다.

┗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30분 회귀권이 뭐야? 내가 상점 갔을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 아마 신상이라 그럴 듯. 지금 들어가 봐!

┗ 하, 비싸네....... 심지어 품절... 미래로 타임워프 하듯이 과거도 무료로 이동하면 좋겠다ㅠㅅㅠ

┗ ㄴㄴ 회귀권을 그렇게 막 살 수 있으면, #회귀 키워드 가진 영애들이 억울하지용~

댓글을 보던 나는 대댓글을 달았다.

┗ 글쓴이: 타임워프가 뭐예요?

유저는 계속 글을 보고 있었는지 바로 대댓글이 달렸다.

┗ 원하는 시점으로 건너뛸 수 있는 기능이야! 그냥 건너뛰고 싶은 시점 생각만 하면 시간 이동하더라.

그런 기능이 있다고?

충격이었다.

나는 내가 게임 기능에 대해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 게임에는 시간을 조절하는 방법이 많은가 봐. 되돌릴 수 있겠다!’

나는 바로 상점부터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유저의 말대로 ‘30분 회귀권’은 이미 품절이었다.

입술을 뜯던 나는 다시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제목: 30분 회귀권을 구매하신 영애님을 찾습니다. 제발 한 번만 읽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0]

무슨 내용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간절하고 절박했던 감정만 떠오른다.

두서없는 호소에도 30분 회귀권을 구매한 영애가 나타나 내게 아이템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아이템이 선물 가능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내가 16년 동안 게임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플레이를 잘못 해 왔다는 걸 깨우쳤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바로 ‘30분 회귀권’을 사용했다.

***

“비키라 하였다.”

낮은 목소리가 경고하듯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양팔을 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의 길목을 막은 죄. 마음을 먹는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큰 죄이나, 황제는 내게 죄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노기 가득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내가 단 한 번도 이런 짓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 젖은 얼굴을 살폈다.

“가시면 안 됩니다. 가지 마세요!”

나는 아이처럼 울며 애원했다.

“제국의 위신을 깎으려 작정하였구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하느냐?”

“그리 말씀하셔도 비킬 수 없습니다.”

가을국에 책잡힐 일이라니, 여름국 황제에게는 끔찍하게 두려운 일이다.

하나, 체면이 목숨보다 귀할까?

적어도 내게는 아니었다.

나는 두 사람을 잃을 수 없었다.

한발 물러서듯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누르셨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그 이유라도 말해 보아라.”

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어머니도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서 말해 보라고.

설득을 해 보라고.

아버지는 늘 내게 쉽게 설득됐다.

AI가 알려 주는 정보를 들먹이며 의견을 말하고 반박했으니, 그는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궁 앞에 선 대신들까지 내 대답을 기다렸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늘 내가 자신감 있게 말하도록 도와주던 상태창이 내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직접 발설할 수 없습니다. 천기누설 시, 이용권 사용이 무효가 됩니다.]

30분 회귀권의 페널티였다.

회귀했다는 사실을 말해서는 안 됐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상태창의 경고에 나는 입을 꽉 다물고 그저 길을 막은 채 버텼다.

고요한 침묵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투둑투둑.

심지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상궁들이 눈치를 보며 들고 있던 일산을 더 높이 들어 황제와 황후를 가렸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나는 쏟아지는 비에 금세 젖어 버렸다.

침묵 속으로 요란한 빗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누구도 길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로 화가 난 아버지의 얼굴과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장막이 드리운 것처럼 세상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시끄러운 빗소리는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데, 그럼에도 감정들이 전해져 온다.

마주한 시선이 말하는 건 분노가 아니었다.

혼란과 걱정이 빗물을 따라 차갑게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무언가가 가슴속으로 뜨겁게 퍼지고 허파를 움켜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캐릭터인데, 사람이 아닌데.

미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을 살리고 싶었다.

벌써 5분 남짓한 시간이 지났지만, 어떻게 해야 25분 안에 그들의 출발을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을 적시는 빗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답답함에 터진 눈물이 소리 없이 빗물에 섞여 들었다.

그때였다.

“폐하. 저 머리가…….”

“황후!”

갑자기 어머니가 머리를 잡고는 몸을 휘청이셨다.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활처럼 뒤로 축 늘어진 어머니를 받아 내셨다.

“황후! 정신 차리시오! 황후!”

사색이 된 아버지가 당장 궁의를 불러오라며 소리치셨다.

“폐하, 우선 마마를 처소로 눕히시는 게…….”

환관이 조심스레 권하자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 든 채 달려갔다.

다행이었다.

나는 곧장 아버지를 따라 뛰어갔다.

황후궁 처소에 도착해 어머니를 침상에 눕히자마자 궁의가 도착했다.

“그래. 왜 이러는 것이냐?”

병명을 묻는 황제의 말투는 담담했다.

궁의는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나와 황후를 번갈아 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궁으로 오며 대강 사정을 들은 듯하다.

이 방 안에 있는 사람 중 황후가 아파서 쓰러졌다 여기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최선을 다해 그녀의 연기를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망설이는 궁의를 나는 간절한 눈으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궁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고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저, 폐하…… 외람되오나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말씀을 드려도 될는지요.”

황후의 꾀병을 고자질하는 것이 불편한 건지, 혹은 황후의 체면을 걱정한 건지, 나를 도와주려는 건지 그 의도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는 궁의의 태도를 나무라지 않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던 그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그는 궁의와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어머니가 빼꼼히 눈을 떴다.

그녀는 나를 보고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제 이불자락을 들었다.

침대로 올라오라는 듯.

어머니는 여전하셨다. 나를 애 취급하시는 것도, 내가 질색하는 걸 알면서도 포기 못 하시는 것도.

긴장이 풀리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알까?

오늘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래서 내가 당신을 구하러 여기에 왔다는 걸.

사고 소식을 듣던 순간이 떠올라 울컥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움켜쥔 채 고개를 떨궜다.

“디아나.”

그녀는 재촉하듯 침상을 손으로 두드렸다.

“저 다 젖었었잖아요. 침상이 더러워질 거예요.”

“괜찮아.”

어머니는 황태녀가 된 이후 늘 내게 존대를 하셨다. 그래서 하대가 어색했다.

본인도 어색한 듯싶었다.

나는 멋쩍게 웃는 그녀를 보다 입술을 꼭 깨물고 침대로 올라갔다.

그녀는 올라온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두려움을 어떻게 알았는지 등을 느릿하게 쓸어 주며 나를 달랬다.

온몸을 뒤덮는 익숙한 온기에 힘이 풀렸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살갗으로 촘촘히 와닿았다.

몇 분 후, 진정된 내가 그녀를 밀어내고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그녀는 손으로 꼼꼼하게 눈물을 닦아 주며 입매를 길게 늘였다.

“내 딸이 이유 없이 그럴 리 없으니까.”

악몽을 꾼 아이를 달래듯,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말하며 밝은 표정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했다.

“가을국에 가시면 안 돼요. 절대로요.”

“음…….”

그녀는 흘깃 눈동자를 움직여 문가를 봤다.

“그러고 싶은데 폐하가 따라 주실지 모르겠네.”

“안 돼요. 폐하가 뭐라 하시든 간에 절대 가시면 안 돼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애원하자, 그녀가 쉬이 소리를 내며 내 팔을 쓰다듬었다.

“알겠어요. 노력해 볼게요.”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아버지의 고집에 못 이겨 가을국으로 떠날까 봐.

그러다 또 사고를 당해 죽게 될까 봐.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5분.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침상의 비단 포를 긁어 댔다.

그 초조한 손짓을 말리듯 어머니가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녀는 내 손목에 제 팔찌를 끼워 주었다.

포근한 목화에 붉은 끈을 매단 매듭 팔찌였다.

며칠 전 경연장으로 찾아와 나를 억지로 황후궁으로 데려가 함께 만든 장신구였다.

내가 만든 팔찌를 계속 차고 다니신 모양이다.

나는 그 팔찌를 어떻게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안함에 눈꼬리가 내려가는데, 그녀는 말없이 내 손목에 붉은 끈을 감아 주었다.

“이건 내게 아주 소중한 물건이에요. 만약에 내가 오늘 가을국에 가면, 이건 영원히 황태녀 거예요.”

어머니 나름대로 내게 주신 증표였다.

“절대 가을국에 안 갈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어떻게 이렇게 쉽게 내 감정을 눈치채는 걸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매듭을 다 묶자 기다렸다는 듯 알람이 들렸다.

[30분 회귀권 사용이 종료됩니다.]

나는 제발 그녀가 떠나지 않았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이었다.

그러나 문고리에 걸어 둔 검도 보이지 않았고, 상궁과 환관의 걱정 어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주 고요했다.

늘어진 오후 햇살만이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적막을 메꾸었다.

미래가 바뀐 모양이다.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낯선 감촉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팍.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궁인들이 모두 상복을 입고 있었다.

과거가 바뀌지 않은 것이다.

황제와 황후는 병을 핑계로 가을국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녁 수라상에 나온 복요리에 독이 제대로 제거되지 못해 돌아가셨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영애에게 ‘30분 회귀권’을 받아 다시 과거로 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의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부모님은 탈출한 관상 마물에 공격당해 돌아가셨다.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했다.

그 수만큼 부모님의 죽음도 반복되었다.

역심을 품고 있었던 1황자가 보낸 살수에 돌아가시기도 했고, 갑작스레 내리친 벼락에 돌아가시기도 했고, 연못에 빠진 나를 구하려다 돌아가시기도 했다.

부모님은 늘 그날에 돌아가셨다.

나는 AI에게 물었다.

회귀해도 이미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거냐고.

AI는 아니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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