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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72화 (73/208)

72화.

나는 소년의 순수한 눈망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아이라서 그런지 음흉한 구석이 전혀 안 보였기 때문이다.

책사 남주는 여주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배신을 해 여주를 위기에 빠지게 만드는 옹졸한 놈이었다.

그러나 배꽃처럼 희고 단아한 소년에게선 전혀 흑막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하는 내가 나쁜 사람으로 느껴진다.

됐다. 토론이나 하자.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고 목을 가다듬었다.

적당히 얘기 나누고 일찍 보내 줘야지.

동양 판타지 속 황녀의 일상은 보통 고된 게 아니었다.

황실 시강원(侍講院, 황태자나 황태녀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의 선생과 매일 토론을 해야 했는데, 여름국이 직면한 사회 문제를 매주 주제로 내주었다.

이번 주 주제는 무려 ‘가을국 혼혈민의 차별 법안 폐지’였다.

이 정도면 아동 학대라 할 만하다.

6세에게 대체 무슨 답을 바라는 거냐고.

시강원 과제 난이도가 이따위다 보니 나는 아버지가 붙여 준 배동에게 의지했다.

어른의 사고를 하는 내가 내 답을 그대로 말하면 안 되니, 나는 이 10세 아동에게 내 과제를 공유하고 아이의 답을 고대로 베꼈다.

그랬다.

아포스타시아는 나의 모범 답안지였다.

10세 아이에게도 분명 난도가 높은 질문이지만, 정치인 집안 자제라 그런지 아포스타시아는 사회 문제를 곧잘 이해했다.

소년은 허리를 세운 채 다소곳이 답했다.

“소인은 차별 법안이 폐지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난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잘됐다. 너가 반대하고 나는 찬성하면 되겠네.”

여름국은 가을국과 사이가 안 좋았다. 전대 왕조가 가을국 황실 때문에 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조상인 아르테미스 왕조 2대 황제가 가을국을 몰아낸다고 황궁을 반가을국 인사로 가득 채운 탓에 여름국의 기득권층은 가을국 사람을 벌레처럼 여겼다.

플랫폼이 창조한 세계관이라 그런지 여름국은 한국 문화를 차용하지만, 역사는 한국사와 완전히 달랐다.

이해는 했다. 주변국이 전혀 다르니까. 게다가 신기한 이능과 다양한 인외종족이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관이니 인물 관계를 엮으려면 소설을 쓰듯 과거사를 설계해야 했을 거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역사를 배우는 마음으로 여름국의 역사를 공부했다.

팔자에 없는 여름국사 공부에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었다.

어쨌든 가을국에 대한 적대감이 심한 나라니, 아포스타시아가 차별을 주장하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다 온 나는 가을국 차별 정책이 불편했다.

취업 금지.

사유재산 소유 금지.

무슨 공산주의 사회냐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런 이유로 나는 가을국 혼혈민 차별을 반대했지만, 아포스타시아는 찬성을 선택했으니 오늘은 스승에게 차별을 지지하는 냉정한 황태녀 연기를 해야겠다.

아포스타시아와 나는 토론을 이어 갔다.

근데 얘기를 하다 보니 진심으로 열이 받기 시작했다.

쾅.

나는 서탁을 내리쳤다.

“너는 동정심도 없어? 혼혈민은 섬에서 죽을 때까지 착취만 당해야 한다는 거야? 그 애들도 꿈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모든 백성을 사랑하는 황태녀 전하의 마음은 이해하나, 지도자는 냉정해야 합니다. 무르게 넘어가면 사회 기강이 무너지게 됩니다.”

기가 막혀 헛숨이 나왔다.

“대체 뭐가 무너진다는 건데?”

하지만 소년은 차분했다.

“소인 학식이 짧아 명확한 답을 드릴 수는 없으나, 감히 아뢰옵자면 차별이 사라지면 평민들의 반발이 거세질 겁니다.”

“왜?”

아이는 흥분한 나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그러나 한 자 한 자 명확하게 제 생각을 말했다.

“여름국의 평민은 스스로를 가을국 혼혈민 위에 군림하는 신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군림? 같은 평민끼리 무슨?

어색한 단어 선택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아포스타시아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바닥이 사라지면 지하로 떨어지듯, 차별이 사라지면 평민들은 제가 가을국 혼혈민과 같은 신분으로 격하되었다 여길 겁니다.”

아이는 차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귀족들도 같은 감정을 느낄 겁니다. 언젠가 가을국 혼혈민도 관직에 오르고, 심지어 황족의 측근이 되어 제 아이를 배동으로 넣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대는 지금 모두가 혼혈민에게 제 자리를 뺏길까 두려워한다 말하는 건가?”

“예, 그리고 차별은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좋은 통치 도구입니다. 구성원이 제 위치에 만족할 때, 통치자를 향한 반발심은 자연히 약해지니까요. 차별은 약자를 이용해 다수에게 안정감을 주어 제 위치에 만족감을 느끼게 하죠.”

머리가 띵했다.

설정 오류인가?

아니면 요즘 애들, 아니 이 세계관 애들은 다 이렇게 머리가 좋은 거야?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물 흐르듯 나오는 답변에 놀란 나는 입을 달싹이다 물었다.

“……이거 네가 한 생각이야?”

그런데 칭찬이라 여겼는지 아포스타시아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실은 제 스승께서 얼마 전 제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말세다.

아이에게 차별과 혐오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니.

나는 못마땅한 마음을 숨기고 입매를 길게 늘였다.

“좋은 의견이었어. 그래, 그대의 선생은 누구인가?”

그런 인간은 미리 걸러 두어야지. 출셋길을 꽉 막아 둘 거다.

***

여름국을 내 멋대로 휘두르겠다 야무진 마음을 먹었지만, 법을 바꾸기 전에 내가 휘둘리다 못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스승과 토론을 끝낸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잡고 시강원을 빠져나왔다.

아포스타시아에게 들은 답변을 내놓을 수 없어, 혼혈족 차별을 반대한 게 화근이었다.

선생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평소와 달리 질문을 몰아치듯 쏟아부었다.

휘몰아치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폭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스승은 장원 급제한 인재라는데, 재능 낭비를 제대로 하셨다.

상대는 6세라고!

6세의 영혼을 탈탈 턴 스승은 서연 시간이 끝나자 뿌듯한 얼굴로 내게 다시 과제를 내주었다.

나는 피곤한 낯으로 고개를 저으며 터벅터벅 연못가를 걸었다.

대체 여기 사대부들 인성 왜 이 모양이야?

아, 됐어. 게임에 논리가 어디 있어. 황제가 되면 권력으로 다 뜯어고쳐야지.

캐릭터 빨을 세울 생각을 하며 편안한 미래를 그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디아나 황태녀!”

아주 밝고 신난 목소리로.

돌아보니 백옥을 곱게 깎아 만든 듯한 미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양옆으로 쌍둥이 형제가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그들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곧 죽을 사람이니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걸음마를 떼자마자 최선을 다해 그녀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거나, 그녀가 건네준 간식을 우물거리며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저 다정한 낯으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하다는 듯 바라봐 주면 홀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바삐 재촉했다.

정들어서 이야기가 뒤틀리면 안 되잖아. 난 여주 부모님을 구하는 방법도 모른다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심지어 언제 돌아가시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디아나 황태녀!”

내가 자신을 피하는 걸 알 텐데도 그녀는 나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기에 나는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쿵.

“폐하!”

“어머니!”

뒤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몸이 돌아갔다.

잔디 위에 엎어진 황후와 사색이 된 상궁과 쌍둥이가 그녀를 부축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체통을 버리고 내게 가로질러 오던 모양인지, 황후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있었다.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괘, 괜찮으세요?”

평민 출신 황후라 그런가?

그녀는 궁에서 본 다른 귀족 캐릭터들과 달랐다.

아니, 딸이 말을 안 들으면 혼내면 되지 이렇게 뛰어오다 다칠 건 뭐야.

그녀의 바보 같은 모습은 늘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때, 팔목 위로 약력이 가해졌다.

고개를 든 황후가 풀이 잔뜩 묻은 얼굴로 눈웃음을 지었다.

“잡았다.”

그녀는 뿌듯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옷에 붙은 흙을 한 손으로 탁탁 털면서도, 내가 또 도망칠까 봐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손을 빼려 뒤틀었다.

“놔주세요.”

“싫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며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공부도 좋지만, 제 생각도 좀 해 줘요. 황태녀 되고부터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잖아요. 제가 말라 죽는 걸 보고 싶어요?”

나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내가 10살짜리 배동의 답변을 베끼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 플레이를 할 때, 아동의 사고를 모르다 보니 나는 말투만 어눌하게 쓰며 내 생각을 말하고는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림자로 건축물 높이를 구하는 방법을 설명했더니 황제가 찻잔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럴 만했다.

그때 내 나이가 3살이었으니까.

황제는 나를 천재로 여겼다.

그저 빙의한 것뿐인데.

대한민국의 기초 교육 덕분에 답할 수 있던 것뿐인데.

인생 2회차일 뿐인데.

황제는 모든 형제를 뒤로하고, 나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그리고 5살이 되었을 때, 나는 황태녀로 책봉됐다.

그렇게 나의 지옥 같은 수험 일정, 아니 황태녀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시강원 학자들도 내 지적 수준을 높게 여겨 6세 아이에게 버거운 주제로 토론을 하게 했다.

‘가을국 혼혈족의 차별 법안 폐지 찬반’이 과제라니 답 나오지 않나?

아기한테 저런 걸 묻는 게 말이 되냐고.

어쨌든 얼결에 갖게 된 천재 이미지 때문에 고생하는 중이었다.

그 고생에도 장점이 있었으니, 황후와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거였다.

황후는 궁 생활이 힘든 모양인지, 제 일과가 끝날 때면 체통을 버리고 나와 쌍둥이들을 찾아와 품에 안고 놀기 바빴다.

그러나 황태녀가 된 이후 황제는 은근히 나를 황후와 떨어뜨리려 노력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황제가 될 딸이 그녀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를 배우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소설 속 여주의 유일한 약점은 어머니의 신분이었다.

상처받을 만한데, 황실의 처세에도 황후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내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황자들과 연못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나를 납치하곤 했다.

지금처럼.

대체 왜 이렇게 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수업은 잘 들었어요?”

“네…….”

시선을 피하자 그녀가 키득키득 웃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걸 보니 오늘 서연도 고되셨나 봅니다.”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그녀가 체통도 잊고 나를 번쩍 안아 들었기 때문이다.

“어, 어머니 이러시면 안 돼요! 내려 주세요!”

나는 당황했다.

이 나이에 덥석덥석 안기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황후는 늘 그랬듯 뺨을 비비며 가볍게 내 반항을 무시했다.

“또 자란 거 봐. 인제 그만 커요. 저는 아직 시집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거예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누가 봐도 꼬마인데, 그녀는 곧 출가를 앞둔 딸을 대하듯 거짓으로 흐느꼈다.

황후의 주접은 대단했다.

그녀는 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말하고, 사랑스럽다 속삭이고, 좋은 패물을 받으면 내게 선물하셨다.

‘……애가 패물을 어디다 쓴다고.’

“어머니, 저도 안아 주세요.”

“누님만 안아 주시고. 너무해요!”

아래에서 꼬꼬마 형제들이 손을 파닥이며 불같이 질투했다.

순간 현타가 왔다.

저런 아기들이랑 똑같이 취급당하다니.

“저 걸을 수 있어요.”

“알아요.”

“……차라리 쌍둥이를 안아 주세요.”

황후가 간지러운 웃음을 흘리셨다.

“디아나는 좋은 누나네요.”

사락, 황후의 소매가 내 어깨에 맞닿았다.

그녀가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준 탓이다.

그녀는 나를 고쳐 안으며 조금 더 높이 들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입술이 내 귀에 바짝 붙었다.

씁쓸함 가득한 목소리가 무겁게 고막을 짓눌렀다.

“우리 황태녀도 조금 더 어리광을 피우면 좋을 텐데.”

황후는 나를 안은 채 사뿐히 연못가를 걸었다.

어떻게 빙의 여주가 가짜 부모를 내 부모로 여기는 걸까 의아했는데, 그녀와 지내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세상 그 누가 나를 저렇게 바라봐 줄까?

나는 저 눈에 홀리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장에 온수를 들이부은 것처럼 퍼지는 온기를 걷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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