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71화 (72/208)

71화.

시간이 흐르자 나는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긋한 목소리, 어쩔 줄 몰라 하는 불안한 목소리, 가끔 들리는 낮은 동굴 목소리.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소리와 온기를 느끼며 열심히 성장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잊지 못할 일이 생겼다.

‘와…….’

나는 눈앞에서 움직이는 매화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붉은 꽃잎과 노란 꽃술이 모두 선명히 보인 탓이다.

시각이 발달해 이제 색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거다.

몇 달 만에 제대로 본 사물에 마음이 벅찼다.

‘예뻐. 진짜 예쁘다!’

왜 옛 어른들이 몸이 백 냥이면 눈이 구십 냥이라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각이 이렇게 소중한 감각이구나.

꽃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며 손을 뻗자 나긋한 목소리의 주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이것 좀 보세요. 폐하! 디아나 황녀가 꽃이 마음에 드나 봐요.”

나긋한 목소리의 주인.

그녀는 오늘도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여자 목소리 위로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아주 가끔 들리는 동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너도 좋아하는 게 있구나.”

당연한 소리를 하네?

아기도 사람인데.

진지하게 내 욕망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방금 일어난 탓인지 몸이 나른했다.

‘아직은 말을 못 하기도 하고.’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혀는 정확한 발음을 하기엔 작고 연약했다.

낯선 환경에서 아기의 몸으로 사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나는 손가락을 꽉 쥐었다가 폈다.

몸이 죽순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

“손가락을 달라는 건가?”

내 손짓을 오해한 남자가 제 손가락을 뻗었다.

나는 눈앞에서 움직이는 커다란 손가락을 신기해하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와, 단단해!’

손가락이 돌덩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 피부는 얇고 예민했다.

아기는 정말 조심히 다뤄야겠네. 자극을 크게 느끼는구나.

신기해하며 그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데 남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가지 말라는 건가.”

“그러게요. 디아나가 폐하를 참 좋아하네요.”

동의하듯 말했지만, 나긋한 목소리에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묻어났다.

그때 또 다른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이제 경연(經筵, 통치자가 신하와 국정을 협의하던 자리)에 가셔야 하옵니다.”

황제는 아쉬운 듯 몇 번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는 눈치 빠르게 그를 바로 놓아주었다.

일 안 하는 황제는 K-로판에서 있을 수 없어. 얼른 일하러 가라, 동로판 황제.

그런 마음으로 손을 내저었는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특하구나.”

뭐가?

일하라는 게?

그는 손가락으로 내 뺨을 톡톡 건드리다 아쉽다는 듯 느리게 손을 거두었다.

그가 방을 나갔는데도 소음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가 없으니 나긋한 목소리의 주인은 본격적으로 나를 만지작거리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녀가 내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어미 손가락도 잡아 주세요.”

그녀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게 재촉했다.

잡아 주고 싶어도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히유.”

몸이 작아서 그런가.

숨을 크게 쉬는 것도 힘들다.

걸음마 떼기 전까지는 한숨을 자제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 방금 들었는가?”

“예! 들었습니다.”

“내 딸이라 그렇게 들리는 건가? 아니면 원래 아기 한숨 소리는 이렇게 귀여운 건가?”

여자는 목소리를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흐린 시야에 익숙해지니 대충 윤곽으로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여자가 긴 소매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가 빙의한 여주는 황제의 적녀였다.

그러니 저 여자분은 아마도 황후.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인인 황후가 딸아이의 한숨 소리에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라니.

‘……여주 양반, 팔불출 어머니 손에 자랐구나.’

뭐, 다행이다 싶었다.

사랑받는 금수저 인생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보장된 미래를 확인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순간 몸이 훅 떠올랐다.

‘아, 또다…….’

황후가 나를 안고는 둥가둥가를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났어요?”

몸이 느릿하게 떠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나이에 아기 취급이라니.

높게 떠올랐다 가라앉을 때마다 몸 전체로 간질간질하게 전기가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게임은 아기가 느끼는 감각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내 몸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와 맞닿은 여자의 품에서 전해 오는 온기도 딱 상상하던 아기의 체취와 체온이었다.

그때, 여자가 내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자 그녀가 뺨을 마구 부비었다.

“흐윽, 너무 귀여워.”

나는 원래도 말을 하지 못했지만,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처음 본 그녀의 얼굴이 너무 강렬해서.

다시 얼굴을 떼어 낸 그녀가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알 수 없다.

이 세계에서 처음 인지한 사람이, 하필 그 사람이 짓고 있는 표정이 저런 미소여서 충격은 배가됐다.

“어라? 진짜 놀랐나 보네?”

그녀는 금세 눈썹을 팔자로 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뺨을 간질이는 그녀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제 손가락으로 내려갔던 까만 눈동자가 움찔하더니 그대로 멈췄다.

그녀가 제 붉은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이것 좀 봐.”

“어머어머! 황녀님이 손가락을 잡으셨네요!”

그게 뭐라고 황후가 손을 덜덜 떨었다.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떨림에 나는 더 꽉 그녀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떨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아직 말을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시선으로 내 얼굴을 쓸었다.

까만 눈동자에 내 얼굴이 구석구석 비쳤다.

이마, 눈, 코, 관자놀이, 입술, 턱.

하나하나 망막에 새기듯 천천히 눈에 담던 그녀가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이내 분주히 나를 담던 눈동자가 잠시 눈꺼풀에 뒤덮였다.

다시 눈을 뜬 그녀는 나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내 등을 쓸기 시작했다.

나는 왜인지 심장이 간지러워서 고개를 숙여 작은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그 어떤 대화도 없었지만, 규칙적으로 온기가 밀려왔다.

천천히 토닥이는 다정한 손짓에 몸을 맡긴 채 잠에 빠졌다.

의식이 몽롱해지는 찰나, 안타까움을 느꼈다.

내가 빙의한 여주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상처 입은 캐릭터였다.

‘그 말은 곧…….’

지금 이 품의 주인이 곧 죽게 된다는 뜻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니, 사실 느리게 흘렀다.

그래도 보람 있는 유아기였다.

뒤집기만 해도 황후와 유모가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고, 두 발로 일어섰을 때는 황후가 쓰러지는 바람에 황제가 집무를 던지고 혼비백산해 달려오기도 했다.

주변 사람이 전부 저렇다 보니 성인의 지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끔 나는 아이가 되었다.

유치하게도 저런 반응에 자긍심을 느꼈단 소리다.

그럴 때면 진한 현타가 따라왔다.

‘뒤집기 성공에 자긍심이라니…… 진짜 애냐고.’

뒤집기에 뿌듯함을 느끼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고, 네 살부터는 황성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된 해. 황제가 내게 배동(陪童, 어린 황자‧황녀의 또래 친구)을 붙여 주었다.

가슴께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반 묶음으로 단정하게 묶은 소년이었다.

태생부터 귀족이라 주장하듯 소년에게서 기품이 흘러넘쳤다.

귀해 보이는 비단 포도 그렇고,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넘기는 자태도 그렇고.

사극에서 보던 부잣집 도령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걸렸다.

“생명의 늪 팔루스가의 아포스타시아 인사드립니다. 오늘도 평온한 아침을 보내셨는지요.”

아포스타시아 팔루스.

눈이 흐려진다.

동로판 캐릭터가 왜 이름은 다 서양식으로 지은 건지.

[유저 설문 조사 시 담당자의 실수로 1번 문항이 잘못 기재되었습니다. 모든 유저가 영문 이름을 기입한 탓에, 여름국 네이밍 설정을 서양식으로 변경했습니다.]

1번 문항이 뭐였지?

6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기억을 더듬던 나는 기막힌 숨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1번 문항은 이름이었다.

‘Q1. 만약 내가 빙의 여주가 된다면 불리고 싶은 이름은?’

별생각 없이 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름을 적었는데, 그게 내 이름이 될 줄이야.

나는 그제야 시스템의 네이밍 변경을 이해했다.

남궁 디아나.

박 디아나.

이상하다. 아주 이상해.

제작진은 수집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 급하게 캐릭터의 이름만 모두 서양식으로 바꾼 모양이다.

지역이나 자잘한 소품은 한국식 작명인 걸 보면.

나는 AI의 설명을 들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하, 혹 피곤하시면 토론은 내일 할까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탓에 아포스타시아가 눈치를 살폈다.

애 앞에서 미간 관리를 못 했네.

“아니야. 지금 하자.”

나보다 겨우 네 살 많은데, 이 10세 아이는 학구열이 대단했다.

토론을 하자고 하니 아포스타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책을 폈다.

나는 서탁에 턱을 괸 채 아이를 바라봤다.

황제가 아포스타시아를 내 배동으로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여름국 영의정, 이 나라에서 가장 권세 높은 귀족의 장자.

이 아이는 세자빈처럼 황실 어른들의 간택을 받은 배동이었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아무리 중세시대라지만 꼬마 둘을 두고 벌써 결혼을 논하시는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장을 펼쳤다.

원작에서 여주에게는 두 명의 남주가 있었다.

황제가 된 여주를 보필하는 ‘책사 남주’와 함께 정벌을 다니며 영토 확장을 도와주는 ‘무인 남주’.

얘가 책사 남주인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