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기가 약한 나는 사패 남주가 내뿜는 무서운 분위기에 한발 물러섰다.
원래 기 싸움은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변명처럼 들리지만, 변명이 아니다. 암튼 아니다.
그리고 내가 흠칫하자, 정말로 얼음장 같던 분위기에 금이 갔다.
묘하게 느슨해진 분위기를 틈타,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바쁘실 텐데 신경 쓰실 필요 없다는 뜻이었어요. 제가 좀 말을 거칠게 했나 봐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알렉스가 답답한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바로 코앞에서 걸음을 멈춘 알렉스가 물었다.
“데이지.”
“예, 전하.”
“내가 무서워?”
“무섭죠.”
알렉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자존심을 잠시 치우고 다시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전하의 인품이 매우 훌륭하시고 인애로우시고 자애로우신 건 알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 마음의 벽이라는 게 있잖아요? 전하와 제 사이의 거리에서 느껴지는 당연한 두려움이죠. 예를 들면 전하의 위엄이랄까.”
알렉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잘 멕이네.”
역시 황궁 권력자는 남다르다. 그는 내 말에 진심이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도 일단 부정해 봤다.
“틀린 말은 아닌걸요. 전하도 저처럼 청렴하고 결백한 사람을 겨울국 재건 협회 일원이라고 의심하시잖아요.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원래 인간관계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 사소한 오해를 품고 사는 거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오늘부터 전하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게요. 그럼 이제 오해 해결된 거죠?”
알렉스가 찜찜하다는 얼굴로 한쪽 눈을 찌푸렸다.
“의심이라니?”
그는 내 긴 말에서 ‘의심’에 꽂힌 것 같았다.
“왜 이러세요. 맨날 저 겨울국 재건 협회 사람이라고 의심하시잖아요. 솔직히 지금 화나신 것도 제가 협회 정보 숨긴다고 생각해서 그러신 거…….”
“아니야.”
알렉스가 말을 잘라 냈다.
“그동안 의심한 걸 부정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래서 화가 난 건 아니야. 이건 정확히 하지.”
“……그럼 왜 화를 내세요?”
뭐야?
그럼 왜 이러는데?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가 화가 난 이유를 고민하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너 설마 노비를 빼앗길 뻔해서 화가 난 거야?
“아, 정말 절 가을국에 데려가실 생각이었어요?”
데려가서 필사도 시키고 해석도 시키고 부려먹으려 했는데, 유능한(?) 노예를 뺏긴 분노였던 거야?
이번엔 내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자 알렉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가 웃거나 말거나 진지하게 내 생각을 전했다.
“전하, 저는 노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전하가 보신 귀족 영애들에 비하면 귀족적인 면모가 부족할지 모르지만, 저도 귀족 영애예요.”
물론 내가 빙의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귀족적인 애티튜드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역할은 #귀족여주란 말이야!
나는 노동하는 캐릭터가 아니라고!
엄연히 #돈지랄 키워드가 있는 여주인데, 자꾸 노동 착취하지 마!
나는 심호흡을 한 번 길게 하고 그에게 하반기 인력 채용을 제안했다.
“마족 덕질하는 사람은 분명 어딘가 또 있을 거예요. 어딜 가나 마이너 취향의 덕후는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사람을 찾아서 일 시키세요.”
“덕질? 마이너 취향? 그게 무슨 말이야.”
흥분하는 바람에 현생어를 남용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는 척 대충 말을 돌렸다.
“솔직히 저 정말 섭섭해요. 제가 전하를 얼마나 열심히 도왔는데 맨날 의심하시고.”
나는 울적한 척 목소리를 깔고 감정에 호소했다.
그런데 그때 팔목의 워치에 불이 들어왔다.
키스카의 메시지였다.
나는 얼른 팔목을 문질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키스카: 영애! 찾았어요! 가을국과 여름국 경계에 기지가 있었어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역시 여주 버프 앞에 장사 없다.
손쉽게 흑막의 근거지를 찾은 키스카는 신나서 계속 메시지를 쏟아 냈다.
[키스카: 협회 인장 찍힌 자료랑 국서가 건넨 패물도 있었대요! 증거까지 확보! >_<]
그녀는 이 사실을 디아나에게도 알리겠다며 좋아했다.
“흐흐.”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머리 위로 알렉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울어?”
검은 워치 화면에 당황한 알렉스의 얼굴이 비쳤다.
내가 고개를 떨구고 있어서 운다고 오해한 건가?
답지 않게 당황한 걸 보니 오해를 풀어 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재밌었다.
놀랍게도 이놈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한 모양이다.
나는 입 안쪽을 혀끝으로 한 번 쓸고는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좀 놀려 봤다.
“……저는 전하를 도와 최선을 다하는데…… 제 노력은 하나도 몰라주시니까…….”
한숨도 흘려주고.
“……가끔은 허무해요.”
알렉스는 망설이듯 머뭇거리다 단어를 하나씩 뱉었다.
“진짜 울어?”
“안, 울어요.”
라며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미치겠군.”
우는 사람을 달래 본 경험이 없는지 알렉스가 당황했다.
안 그러게 생긴 놈이 죄책감을 느끼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범인은 일검이에요. 그런데…… 하필 일검이 필요한 이 상황에 일검이 절 죽이려 한 게 이상하지 않으세요? ……갑자기 일검의 발이 묶였잖아요.”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심 있는 주제라 집중하는 건지, 충격을 받은 건지 모르겠다.
더 놀리고 싶었지만, 말이 더 떠오르지 않아서 이만 장난을 멈췄다.
나는 손등으로 (흘린 적 없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획 돌렸다.
건조한 눈동자를 보이면 들킬 테니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알렉스는 여전히 말이 없다.
차라리 잘됐다 싶어 그대로 그에게 등을 보인 채 걸음을 뗐다.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내 덕에 일검도 풀려나고 겨울국 재건 협회 놈들도 잡히겠지만, 유어웰컴이다 이 자식아.
나는 쉴 새 없이 수신되는 메시지를 읽기 위해 다시 시선을 손목으로 내린 채 후다닥 황제궁을 벗어났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이 오랫동안 느껴졌다.
외전. 버그의 기원
어둡고 희뿌연 시야.
폭격처럼 고막을 짓누르는 소음.
인상을 찌푸리자 귓가를 간질이던 소리가 차츰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목소리의 주인에게 지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뜻이 통하지 않으니 외려 더 두려워졌다.
그때, 허리 위로 묵직한 온기가 퍼졌다. 조심스레 파고들던 그 온기가 나를 들어 올렸다.
‘윽, 어지러워.’
바이킹을 탄 듯 아찔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진다.
본능적으로 팔을 버둥거리다 이상함을 느꼈다.
‘짧아?’
어깨만 으쓱대는 기분이었다.
내 몸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 무섭게 누군가의 품에 몸이 맞물렸다. 동시에 등 위로 가벼운 압력이 가해졌다. 그 느낌은 꼬리뼈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길 반복했다.
‘이게 대체 뭐야?’
혼란스러운 정신과 반대로 몸은 그 규칙적인 토닥임에 노곤해졌다.
처음엔 악몽을 꾸는 줄 알았다.
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조심하세요. 신생아는 연약해서 작은 사고에도 로그아웃 될 수 있습니다.]
‘신생아?’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이 세상은 내가 아주 옛날에 읽었던 내 인생 소설 『황궁의 달과 꽃』이라는 작품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작품을 참고한 게임이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만든 가상현실 게임이라나 뭐라나.
내가 들어온 캐릭터는 장차 황제가 되어, 나를 배신한 남주를 죽이는 새드 엔딩 소설 속 먼치킨 여주였다.
아, 빙의구나.
상황을 이해하고 나니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무슨 신생아로 빙의를 해?
그때, 누군가 내 옷을 벗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기 시작했다.
밀려온 한기에 다리를 오므렸다.
윽, 수치스러워!
격렬하게 거부했지만, 그저 파닥거리는 움직임일 뿐 저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울적해지는데 귓가로 AI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생겨 유저의 빙의 타임라인을 앞당겼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소한 문제?’
그러자 AI가 변명을 시작했다. 설명을 들은 나는 헛숨을 삼켰다.
이 게임은 그냥 가상현실 게임이 아니었다. 다중접속 게임이었다. 여러 유저가 동시에 플레이 하는 게임 말이다.
나처럼 캐릭터에 접속한 여주가 100명인데, 그중에는 #궁중암투 키워드를 가진 유저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처첩 갈등을 즐기는 남주를 선택해 팔자가 꼬이지 않도록, AI는 나를 그 유저들의 배필로 설정했다.
‘배필이요?’
얼굴도 본 적 없는 스무 명의 유저들이 내 후궁이 될 예정이라니.
‘뭔, 이런 막장이…….’
가뜩이나 흐릿한 시야가 더 흐려졌다.
나는 성인이 되면 지아비(?)로서 그녀들의 서사를 채워 줘야 하므로, 어린 시절 서사를 추가해 보상해 주는 거라 했다.
어린 시절 서사로 최소 10만 자의 글자 수를 확보할 수 있으니, 분량 걱정은 없을 거라나 뭐라나.
AI는 이게 날 위한 특별 선물이라며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원래 유아기 서사는 #육아물 #소꿉친구물에만 주는데 자기가 특별히 챙겨 준 거라고.
어이가 없지만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때는 그랬다. 게임을 완성하면 20억을 준다는 소리에 홀려 뭐든 어떠냐 싶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20억이 입금된다는데 뭐가 불만일까?
게다가 글자 수를 채워 두면 게임 클리어가 더 쉬워질 테니 정말 좋은 일 같았다.
어쨌든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건 모두 가상현실이라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뺨에 닿는 미세한 온기에 나는 눈을 파르르 떨었다.
우리나라 IT 수준이 이 정도라니.
섬세한 감각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때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톤이 한 피치 높아진다. 왜인지 신이 난 듯했다.
나는 안면근육에 힘을 주어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리고 말했다.
“꺄아(왜 이래요?).”
잠시 정적이 일다, 거센 소음이 밀려왔다.
모두 흥분한 듯 빠르게 뭐라 주절거렸다.
팔을 한 번 휘저으면 파도처럼 함성이 밀려왔고, 웃어 주면 귓가에 닿은 소음이 숨을 헐떡이듯 마구 진동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입을 한 번 오물거렸다고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내 양육자들은 좋은 사람 같았다.
아기들이 이런 마음으로 웃어 주는 거였을까?
나를 끌어안은 몸에서 미약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분명, 심장 박동이었다.
이 몸은 그 심박에 익숙한지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축 늘어지고 나는 단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