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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69화 (70/208)

69화.

“레이디 데이지, 왜 그러지?”

국서가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저 그게.”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때, 연못가에 만개한 푸른 수국이 보였다. 나는 눈을 반짝였다.

“수국이 너무 예뻐서 넋 놓고 보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나는 얼결에 머릿속 꽃밭 캐릭터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우스꽝스러운 답을 했다.

그러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흐름 끊겼네.

나는 이렇게 된 거 분위기를 바꾸려 디아나에게 물었다.

“폐하 혹, 붉은 수국은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눈치 빠른 디아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디서 보셨는지도 기억나십니까? 토양의 차이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거라고 합니다.”

좋게 말하면 긍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생각 없어 보이는 낭랑한 목소리가 긴장의 끈을 싹둑싹둑 잘라 냈다.

덕분에 국서와 알렉스 사이에 존재하던 팽팽한 기류가 사라졌다.

디아나가 알렉스에게 시선을 두며 물었다.

“글쎄, 가장 최근에는 가을국 황성에서 본 듯한데. 알렉스 황태자, 그대의 궁에 붉은 수국이 있지 않나?”

알렉스는 어느새 제 장기인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입매를 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꽃이라 정원에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맞아. 정말 장관이었지.”

두 사람은 웃으며 서로 추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알렉스의 금안은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린 듯하다.

‘야, 너 왜 이렇게 사연이 많아. 이거 뭐 무서워서 말 꺼내겠냐고.’

그때, 국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레이디 데이지. 왜 그대가 갑자기 수국 얘기를 꺼낸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대신들 또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을국 황족을 깔 판을 열었는데, 감히 하급 귀족인 내가 대화를 주도해 분위기를 바꾸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대신들은 대놓고 뭐라 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힐긋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역시, 예비 후궁의 권력이 최고인가.

나는 인맥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수국은 토양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같은 수국이어도 여름국 황궁에서는 푸른 꽃으로, 다른 곳에서는 붉은색으로 피어나지요. 가을국 황궁에 만개한 붉은 수국처럼요.”

웃으며 덧붙였다.

“자란 환경이 다르단 이유로 색이 다른 게 신기하지 않나요?”

그러자 대신 하나가 큼, 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환경이 다르면 꽃의 색이 달라지는군요. 허허, 가을국 황성에서 붉은 수국이 피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모진 환경에 꽃들이 피눈물을 흘렸나 봅니다.”

농담이랍시고 가을국 대신 하나가 또 선을 넘었다.

“저런, 뿌리를 그곳에 둔 죄밖에 없는데 참 가혹하네요.”

다른 대신들도 동의하듯 허허 웃어 주었다.

정작 알렉스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는 술에 입도 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아니꼬웠는지 빤히 알렉스를 쳐다보던 대신 하나가 웃으며 말을 얹었다.

“안타깝습니다. 붉은 수국도 여름국에서 태어나길 바랐을 텐데 말이죠.”

그들은 내가 바꾼 대화 소재를 이용해 다시 알렉스를 까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진짜 정신 못 차리네? 집단 괴롭힘이 별거냐고. 이런 게 집단 괴롭힘이지.

아니, 알렉스 얘는 왜 쓸데없이 혼자 와서 이런 수모를 당해?

주둥이 전사 체이스 경이라도 데려왔으면 내가 사이다 파티를 구경했을 텐데, 이게 웬 고구마 파티야.

깊은 한숨이 나왔다.

사실 알렉스의 태도가 맞긴 했다.

황위에 오를 사람이라면 가볍게 입을 놀리는 게 아니라, 무시할 줄 알아야지.

그래, 그렇긴 한데.

머리로는 아는데, 지켜보는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건 2N년간 나를 세뇌해 온 우리 어머니의 가정교육 탓이다.

내가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유치원 입학식 날, 그녀는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고,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보면 동조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 세뇌는 먹이사슬의 최하단 말단 사원으로 근무하던 빙의 전날까지도 이어졌다. 내가 괴롭힘을 당하면 당하지 누굴 괴롭히겠냐고.

어쨌든 가정교육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을 방치하는 것에 불편함을, 음습한 따돌림에 분노를 느꼈다.

목 끝까지 무언가 울컥울컥 차올랐는데, 결국 그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글쎄요. 파란 수국이 붉은 수국을 불쌍하다 여기는 건 우습네요.”

냉소적인 내 목소리에 나조차도 움찔했다.

대신들은 자기가 잘못 들었냐는 듯이 눈동자를 굴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렇게 된 거 막 나갔다.

“파란 수국이나 붉은 수국이나 같은 꽃이잖아요. 푸른 수국이 붉은 수국을 비웃는 건 의미 없는 일이죠.”

눈을 접어 웃으며 덧붙였다.

“붉은 수국이 많은 곳에서는 푸른 수국이 비웃음당할 테니까요.”

너희도 혼자 가을국에 파견 가서 가을국 대신들한테 집단 조롱당한다고 생각해 봐.

기분 좋겠냐고.

역지사지로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인데 분위기가 싸해졌다.

말을 뱉고 나니 살짝 후회됐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알렉스를 향하던 적대감이 내게 달라붙었다는 걸.

여태 가만히 있던 알렉스가 갑자기 실소를 흘렸다.

물잔을 내려 둔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욕인지, 고맙다는 뜻인지 헷갈…… 리지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제스처였다.

눈이 가늘어지는 찰나 아이시스가 메시지를 보냈다.

수신하자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시스: 영애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아이시스: 식사 끝난 거 같은데, 만찬도 끝난 거 같아서.]

[미안해요. 영애. 제가 분위기를 끝장냈죠.]

조찬의 주인공 아이시스조차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맛있는 식사를 한 것에 만족하며 깔끔하게 취조 플랜을 포기했다.

***

나는 터벅터벅 누각 연못가를 벗어났다.

대신들은 말씀을 듣고 싶다며 아이시스에게 티타임을 제안했다.

너는 빠지라는 무언의 압박에 나는 홀로 누각을 빠져나왔다.

아이시스가 대신 세뇌를 걸어 계획을 진행해 줄지 물었지만 거절했다.

세뇌 버프를 쓰면 자백을 받아서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자백이 없어도 해결할 수 없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대신들 인성 보니까 취조도 글렀어.

대신들이 진실을 알면 알아서 국서를 처리할 줄 알았는데,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사이는 아주 돈독해 보였다.

국서가 솔직히 죄를 자백하면, 그의 죄를 덮어 줄 것 같다.

게다가 가을국에 저렇게 적대적인 걸 보니, 최악의 경우 가을국 혼혈족인 일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증거를 조작할지도 몰랐다.

나는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가득하던 황궁, 그러나 오늘은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키스카 영애의 부탁을 위해 황궁의 동물들이 모두 산으로 파견 나갔기 때문이다.

정오 안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몇 시쯤 메시지를 주려나.

나는 키스카의 지난 메시지를 보다 워치를 찬 팔을 내렸다.

“곧 오겠지 뭐.”

“뭐가 곧 와?”

“으악!”

갑자기 뒤에서 불쑥 들어온 붉은 머리통에 깜짝 놀랐다.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그를 노려봤다.

“전하! 제발 인기척 좀 내 주세요!”

“미안.”

알렉스는 순순히 사과하며 웃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이제 안 바쁘세요?”

“바빠.”

“근데 왜 벌써 오셨어요.”

알렉스가 섭섭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가 쓰러졌다는데, 어떻게 안 올 수 있어.”

왜 이러냐는 표정을 짓자 알렉스가 피식 웃었다.

“아샤 양보다 내가 더 실력이 좋잖아. 바로 오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 여름국 황실에 오려면 적어도 24시간 전에 방문 허가를 받아야 하거든.”

“그런 법이 있어요?”

난 그런 허가 없이 바로 왔는데?

“가을국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법이야.”

“가을국과 여름국은 사이가 정말 안 좋은가 봐요.”

“부정하지 않아.”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허가가 나오자마자 온 거니까 늦게 왔다고 섭섭해하지 마. 연합군 조직을 앞두고 있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잖아.”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가 왜 섭섭해해요?”

질색하자 알렉스가 또 눈꼬리를 내렸다.

“난 언제 허락이 날까 이틀 동안 전전긍긍 애를 태웠는데 서운하네.”

“……전전긍긍이 무슨 뜻인 줄은 아시죠?”

“절박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 아닌가.”

사실 정확한 뜻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여름의 오후. 주변을 가득 메운 소리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잉어가 헤엄치는 소리와 풀잎이 부대끼는 소리가 잔잔히 흘러왔다.

그러나 평화 알레르기라도 있는 모양인지, 알렉스는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그래서 누구였어?”

“뭐가요?”

“그대를 해하려 한 사람.”

대외적으로 나를 해하려 한 이는 일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진짜 범인을 아는 나는 일검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얘한테까지 내 계획을 말해 줄 필요는 없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걸음을 뗐다.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러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잔디 위로 내 허리 높이의 나무가 돋아났다.

나는 불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뒤돌아 알렉스를 노려봤다. 나무를 치우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입을 열 수 없었다.

알렉스는 웃을 때도 무섭고 표정이 없을 때는 더 무서운 얼굴이라 늘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얼굴을 보고 나니 그때 본 표정들이 무감하게 느껴진다.

알렉스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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