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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68화 (69/208)

68화.

여름국 대신들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대부 특유의 정갈한 미모를 잊게 만드는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입구 쪽에 앉은 나는 맞은편 대각선에 자리한 알렉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안 바빠요, 황태자님? 가을국 태평성대야 뭐야.

입을 벌린 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알렉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알렉스는 제게 말을 거는 이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는 내일 방문한다 들었는데, 이리 갑자기 방문하니 놀랐습니다.”

국서가 은근히 알렉스의 무례를 지적하며 미소를 지었다.

국빈 방문이 애들 장난인가요, 라는 속뜻이 들리는 듯하다.

“다행히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습니다. 폐하 홀로 토벌 업무를 짊어지실까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죠.”

“다망하신 걸 알면서 폐하께 삼고초려하신 분이 말하시기엔, 조금.”

술잔을 들며 국서가 피식 웃었다.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요.”

세뇌 버프를 지금 썼다면 재미있는 구경을 했을 것 같다.

예의 차려 가면서 말하는데도 가시가 가득하다.

그만큼 국서는 가을국 황태자에게 적대적이었다.

가을국 혼혈족을 차별하는 문화가 있다더니, 가을국 순수 혈통에 대한 혐오는 더 강한 듯하다.

나는 예상치 못한 알렉스의 등장에 속으로 혀를 차며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플랜은 망했다.

지금 아이시스의 버프를 쓰면 칼부림이 날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상을 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아이시스의 옆에 앉아 있던 대신이 입을 열었다.

“여름국에서는 기별 없이 방문하는 것이 예가 아니나, 가을국에서는 다를 수도 있겠죠.”

사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맞은편에 있던 사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대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예란 상대적이니 기준이 낮은 나라도 있는 법이니까요.”

알렉스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여름국 남주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적대감이 가득하다.

외교.

이것만큼 애매한 정치 스킬이 없었다.

타국 귀빈은 무조건 환대하는 것이 옳아 보이나, 사실 환대가 꼭 좋은 외교 자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해야 하거나 나라 간 체급 차이가 커서 숙이고 가는 것이 아닌 이상 굽히고 들어가는 건 마이너스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체급이 비슷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 사이에서는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지고는 했다.

초대해 놓고 회담에 늦게 도착하거나, 초대받은 사람은 늦을 걸 예상해 그보다 30분 더 늦게 들어가기도 했다.

대화 또한 마찬가지. 웃으며 식사를 하지만, 은근슬쩍 공격하며 서열 관계를 정리하곤 했다. 자국에 나라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는 기사가 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장들은 국제사회에서 특별히 협력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타국에 방문하지 않았다.

적대적인 나라는 더더욱.

자국 언론에 애국적인 면모를 보여 주겠다고 상대가 무리수를 둘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두 수장의 기 싸움이 참 살벌했지.

정치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생도 그랬는데, 권력이 세습되는 이 세계의 외교는 더 거칠었다.

여름국 대신들은 노골적으로 알렉스에게 날을 세웠다.

‘아, 불편해.’

나는 괜히 입이 말라 물을 마셨다.

다행이라면 알렉스는 여름국 대신들의 반응이 익숙한지 별말 없이 식사만 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고, 국서가 궁인에게 식후주를 가져오라 명했다.

“황태자도 참석한다기에 그대가 좋아하는 술을 급히 준비했습니다. 가을국 남부의 유명한 와인이죠.”

식후주가 나오자 아이시스가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시스: 이제 자리 마무리하는 거 같은데 어쩌죠. 영애?]

‘일단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다시 AI 동기화를 해제하고 분위기를 살폈다.

차마 지금 성녀 영애의 버프를 받을 수 없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도록 세뇌를 걸면 여름국 귀족들의 입에서 날카로운 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디아나가 아니라 알렉스한테.

일대일 말싸움이면, 그래도 양심을 무시하고 버프를 써 보겠는데…….

여러 명이 한 사람을 무안 주는 걸 보고 방치하는 게 영 찜찜했다.

알렉스도 상처받을 수 있잖아.

‘?’

나 지금 알렉스를 걱정하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알렉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다시 맞추었다.

강철 멘탈 알렉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와인병 라벨을 향했다.

이내 그의 금빛 눈동자가 국서의 얼굴을 향해 올라갔다.

국서는 알렉스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두 남자 사이로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몇 초 후, 제 페이스를 되찾은 알렉스가 비스듬히 입매를 기울였다.

가끔 내게 보여 주는 사람을 업신여길 때 짓는 미소였다.

……그 생각 하니까 열 받네? 그냥 아이시스한테 버프 써 달라고 할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상처받은 나는 조용히 궁인이 병을 따는 모습을 지켜봤다.

곧 유리잔에 붉은 액체가 채워졌다.

“전 괜찮습니다.”

알렉스는 제 앞에 놓이는 잔에 시선을 주지 않고 국서를 보며 말했다.

기 싸움은 끝나지 않았나 보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대놓고 국서가 주는 술을 거절하다니.

유치한 행동에 속으로 혀를 차는데 알렉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죄송하지만, 얼마 전 음독 시도가 일어난 곳에서 검증되지 않은 술을 먹기는 조금 두렵네요.”

듣고 보니 또 이해 못 할 변명은 아니었다.

차려진 음식은 모두 기미 상궁의 확인을 거쳤지만, 저 술은 갑자기 들어왔으니 사이 안 좋은 이웃 나라 황족이 선뜻 먹기는 좀 그럴 것이다.

국서 또한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술잔을 들었다.

“그럼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그는 한 번에 잔을 비웠다.

“가을국에서 유명한 술이라 하여 급히 준비했는데, 왜 가을국 사람들이 이 술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군요.”

그는 상 위에 놓인 병을 들어 라벨을 살폈다.

“성녀님은 가을국에서 오셨으니 이 술을 아실 테고, 레이디 데이지는 어떤가? 그대도 이 포도주를 먹어 본 적이 있나?”

갑자기 국서의 시선이 내게로 흘러왔다.

나는 눈치를 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은 잘 몰라서요.”

비싼 술인 거 같은데 아는 척하기엔 아직 문화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모른다고 답했는데도, 국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해하네. 나도 어렵사리 구했으니 봄국에서도 보기 힘들겠지. 재료가 워낙 귀해 몇 병 생산되지 않는 술일세.”

그는 병을 내려 두며 내게 물었다.

“데드암이라는 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데드암?

나는 그 말에 흠칫했다.

왜냐하면 라벨에 떡하니 데드암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국서가 그걸 병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상품에 질병 이름을 붙이는 게 뭔가 이상했다. 심지어 음식인데.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국서가 설명을 시작했다.

“식물들이 걸리는 병이라네. 데드암에 걸린 식물은 뿌리와 줄기가 말라비틀어지며 죽게 되지.”

아, 데드암에 걸린 포도로 만든 와인인가?

병해를 입은 과실로 술을 만든다니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먹기 찜찜하지 않나?

내 거부감을 눈치챈 듯 그가 다시 설명했다.

“간혹 데드암에 걸려도 살아남는 가지가 있는데, 살아남은 가지에서 열린 포도의 맛이 아주 좋다고 하지. 그 이유를 아는가?”

분명 내게 한 질문이지만, 국서의 시선은 알렉스를 향해 있었다.

“죽은 줄기로 가야 할 양분이 살아남은 줄기로 모여 포도의 당도와 향이 깊어지기 때문이라네.”

국서는 다시 제 잔을 들어 한 모금 와인을 마셨다.

“이 와인은 데드암에서 살아남은 포도만 모아 만든 술일세. 맛과 향이 아주 깊지.”

대신들 또한 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맛있다고 탄성을 내뱉는 소리, 향이 깊다며 그의 찬사에 동의하는 소리가 누각을 메웠다.

그리고 은근한 조롱의 눈빛이 이따금 알렉스를 향했다.

내 자리는 긴 탁상의 대각선 끝자리.

모든 이의 표정이 보이는 자리라 불편했다.

왜 국서가 ‘데드암’을 준비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알렉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국서를 보고 있었다.

국서는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건 채 대신들과 와인에 대한 대화를 이어 갔다.

“데드암 와인은 희소한 만큼 가격이 비싸지. 그래서 일부 농부들은 데드암 균을 일부러 퍼트리기도 한다더군. 수많은 포도를 희생해, 깊은 맛을 지닌 포도 한 송이를 얻기 위해서.”

국서는 살포시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데드암에서 살아남은 포도들이 참 불쌍하지 않은가?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는 모두 죽었는데 홀로 살아남아 가장 맛있는 포도가 된다 한들.”

그는 잔을 휘저으며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저 누군가의 주흥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선택받은 포도의 운명이니.”

이건 가을국 황실을 비꼬는 거였다.

나는 마족 지대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아는 이들의 설정을 읽었었다.

‘알렉스 로이드 필리스’

가을국 황족의 성인 ‘필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을국이 아이스타스 왕조를 몰살한 이유는 하나였다.

여름국에서 ‘생명의 이능’을 없애기 위해서.

생명의 이능은 그 이능을 가진 이가 세상에 많으면 힘이 줄어들고, 이능을 가진 이가 적으면 힘이 커졌다.

그 사실은 오직 가이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크리반은 가이아에게 들은 그 사실을 문서에 적었고, 가을국 황제는 에크리반의 문서를 열람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가을국 황실은 거대한 계획을 세운다.

일명 ‘가지치기’.

생명의 이능을 가진 이들을 모두 없애, 가을국 황족에게만 그 힘이 응축되도록 만드는 끔찍한 계획이었다.

그는 여름국의 아이스타스 왕조를 무너뜨리는 동안 여름국 황족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이를 찾아 모두 죽였고, 봄국에서도 이 일을 반복했다.

생명의 이능을 타고난 이들은 제 힘이 커졌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가을국의 계획에 희생됐다.

강력한 ‘생명의 이능’을 독점하게 된 가을국 황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을국에 퍼진 ‘생명의 이능’도 회수하게 된다.

사생아는 물론이고 방계 황족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 그 대부터는 황족 수까지 통제하기에 이른다.

가을국은 황제가 황위를 계승을 할 때 단 한 명의 자식만 남아 정치적 견제 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수많은 황실의 자녀들이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들 그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황실의 자녀 중 가장 뛰어난 이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마치 선택을 받은 최상급 품종처럼.

책을 볼 때도 그 잔인한 설정에 치를 떨었는데, 다시 떠올려도 역겹기 그지없었다.

알렉스는 가을국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 말은 그도 가지치기를 겪었다는 뜻이다.

나만 그 설정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듣자 하니 다 아는 설정인 듯했다. 적어도 여기 있는 이들은 다 아는 설정이었다.

디아나와 아이시스는 이 대화가 불편한지 표정이 좋지 않았고, 가을국 대신들과 국서의 안면에는 비소가 어려 있었다.

황궁이 괜히 플레이 존 난이도 최상이 아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칼날이 숨어 있으니, 지능캐가 아니면 반격하기 쉽지 않았다.

어떤 대신은 모른 척 허허 웃으며 한 잔 더 달라고 국서에게 조르기도 했다.

못됐다, 진짜.

여럿이서 한 사람을 망신 주고, 남의 상처를 공개적으로 헤집고.

여름국 국서와 대신들의 놀라운 인성에 나는 볼 안쪽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알렉스가 상처를 받는 거지 내가 받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신경이 쓰였다.

알렉스는 제 장기인 표정 관리도 포기한 채 차가운 얼굴로 국서를 쳐다봤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나는 불안함에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이 엇갈리며 챙, 소리를 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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