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디아나가 고갯짓하자 상궁이 내게 다가와 작은 반상을 내밀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그 반상 위에 올렸다. 상궁은 상을 들고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쪽지를 든 디아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엇인가?”
아마 미래를 아는 사람이라면 주식과 로또를 구매해 인생역전을 노릴 거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관이라면 주식과 로또의 뜻이 달라진다.
마석 광산, 드레곤 레어, 금광 등.
재정을 윤택하게 만들거나, 가문의 정치적 입지를 승격시키는 히든 플레이스.
그곳을 발견하는 것은 로또 당첨과 다를 바 없다.
또한 판타지 세계답게 그런 장소가 있었다.
다만, 조금 특이하게도 마석, 성물, 금처럼 귀히 여겨지는 물건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이능의 부산물’이었다.
지금 불의 이능을 사용하는 일족은 전멸했고, 생명의 이능을 사용하는 일족은 극한의 이기주의를 뽐내며 이능을 독차지하고 있고, 얼음의 이능은 저 세상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이능이 얼마나 귀한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능을 타고나지 않아도 그 이능을 소유하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이능의 부산물’을 손에 넣는 거였다.
그나마 생명의 이능 부산물은 유통 시장이 갖춰질 정도로 그 수가 넉넉한 편이었는데, 그마저도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했다.
귀부인들은 정원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심고 싶어 하거나, 옷의 장식으로 사용하고 싶어 했다.
그 꽃은 변치 않는 광물인 다이아몬드보다 가격이 높았다.
나무는 더 값이 비쌌다.
영원히 썩지 않는 책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능 자체도 구미가 당기는데 희소성이 높다 보니 ‘이능의 부산물’은 아주 귀했다.
특히, ‘불의 이능’은 말할 것도 없다.
연료가 없어도 꺼지지 않는 불이라니.
에너지 효율성은 둘째 치고, ‘불의 이능’은 엄청난 무기였다.
‘생명’과 ‘빙결’ 이능을 무력화 할 수 있으니까.
“마족 지대에서 알게 된 정보인데 이것을 전해도 좋을지 고민하다 어제 사고를 당했습니다. 제가 죽게 되면 이 정보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여 폐하께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했다.
“폐하, 겨울국 황실은 재건될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디아나가 다소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국 황실이 재건될 필요가 없다니. 겨울국은 원래 그들의 영토였다. 당연히 그들이 복권하도록 돕는 것이 맞아.”
“외람되오나, 대의를 위해 황녀를 돕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알현실에 자리한 모두가 숨을 죽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수백 년간 겨울국 황족은 불의 이능으로 마족과 맞서 왔습니다. 순망치한이라 하지요. 3국 황실은 마족 지대와 바로 국경을 마주하지 않도록 입술 역할을 해 줄 나라가 필요했던 게 아닙니까.”
디아나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황녀에게 불의 이능이 있을 거라 기대하고 계시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겐 불의 이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왕에게 힘 한 번 못 쓰고 얼음에 봉인되신 거죠. 사실 폐하께서도 눈치채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목소리를 깔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겨울국이 마족을 막을 수 없다면, 왜 굳이 그곳을 겨울국이라 명명해야 합니까?”
“황녀에게는 정당성도 있다. 그대의 말대로 모두가 겨울국 영토를 탐낸다면, 기껏 재앙을 몰아낸 보람도 없이 3국은 다시 전쟁을 시작하겠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름국이 마족을 상대할 수 있게 된다면, 겨울국을 가질 당위를 얻게 되지 않을까요?”
알현실이 고요해졌다.
상궁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디아나가 입매를 기울였다.
“그대의 생각을 말해 보라.”
“한번 발현된 이능은 그 주인이 죽어도 소멸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능의 부산물을 말하는 건가?”
“예. 아이스타스의 마지막 황제가 만든 화월궁이 그 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겨울국의 마지막 황제가 마왕을 공격했던 불씨 또한 아직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염탐하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아시다시피 얼음의 이능과 생명의 이능은 인간이 만든 불에 녹지도 타지도 않지만.”
나는 말꼬리를 늘였다.
“불의 이능 앞에서는 무력하게 타고 녹아 버린다고 하지요.”
그리고 디아나의 손에 들린 쪽지로 시선을 내렸다.
“마왕이 겨울국을 모두 얼렸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얼리지 못한 지역이 있습니다.”
아직 가 보지는 못했지만, 겨울국 경계에는 50년째 불타고 있는 지역이 있었다.
마족 지대 도서관에서 본 내용이지만, 그 책들은 이 세계관의 설정집이니 분명 실존할 거다.
“‘다자르의 설원에 지옥의 문이 있다.’ 이것이 제가 드린 종이의 첫 문장입니다.”
쪽지는 마족어로 적힌 밀지.
나는 ‘지옥의 문’ 위치를 이용해 열심히 낚싯대를 흔들었다.
“나무로 마족 지대 경계에 장벽을 쌓고 지옥의 문과 이어지게 하면 불의 이능을 옮겨 불의 장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무는 불에 타 사라지겠지만, 옮겨 간 불은 설원 위에 남아 계속 타오를 테니까요. 이 이능의 부산물을 이용해 마족과 싸우면 여름국이 충분히 방패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디아나는 쪽지를 응시하다 물었다.
“그 지옥의 문의 위치가 여기 적혀 있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하나, 그 위치는 지금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답했다.
“알려 드리고 난 후에 절 죽이실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그대를 죽일 리가.”
“지금은 그러실지도 모르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합니다. 제가 그 위치를 다른 이에게 발설할까 걱정하시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그대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제가 불안해하지 않을 만한 폐하의 약점을 알려 주세요.”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린 채 디아나를 바라봤다.
겨울국 재건 협회는 ‘지옥의 문’에 대해 알게 되면 분명 눈이 돌아갈 거다.
겨울국 황녀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싶지 않아 저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권력을 돌려주기는커녕 겨울국 영토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이 정보를 가지려 들겠지.
그러니 다자르 설원에 있는 ‘지옥의 문’ 위치를 알려고 할 것이다.
국서가 마족어를 알 가능성은 적지만, 겨울국 재건 협회장은 마족어를 잘 아니 저 쪽지를 협회장에게 보여 줄 것이다.
국서도 잡고 겨울국 재건 협회장도 잡을 기회.
하지만 디아나는 회의적인 듯했다.
그녀에게 메시지가 수신됐다.
[디아나: 영애 말대로 하긴 하는데...... 정말 국서가 겨울국 재건 협회와 내통하고 있을까요?]
[네, 확실해요.]
디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물었다.
[디아나: 여기에 정말 위치를 쓴 건 아니죠?]
[그럼요. 그런 좋은 정보를 알려줄 수는 없죠!]
쪽지에 적은 내용은 위치가 아니라 내 편지였다.
그들을 향한 내 진심을 담은 문장이 적혀 있다.
‘네가 날 데려갈 일은 없으니 나한테 그만 집착해라. 이 미친 스토커 새X야.’
내 눈을 응시하던 디아나는 믿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협탁 아래 서랍을 열어 쪽지를 넣어 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궁에 보초를 서던 호위들이 습격을 받아 크게 다쳤다.
사라진 물건은 하나였다.
황제 집무실의 쪽지가 사라졌다.
***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찻물을 머금었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평온한 화월궁.
박하차 특유의 시원한 향 때문인지, 모니터로 보이는 짜릿한 메시지 때문인지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했다.
[키스카: 어지간히 급했나 봐요. 국서가 쪽지를 받자마자 직접 움직였대요!]
역시나 국서가 세작이었다.
[키스카: 아쉽게도 스크롤을 써서 위치 추적은 못 했지만, 새들 말로는 돌아온 국서한테서 가을국 국경 쪽 숲에 피는 은행나무 향이 났다네요. 거기에 기지가 있는지 확인해 준다고 했는데, 아마 정오에는 돌아올 거예요.]
키스카는 최애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 숲이면 뭐, 우리 영애의 손아귀 안이지.
국서와 겨울국 재건 협회장이 만난 기지를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래서 게임할 때 파티를 이루는 건가?
여주의 단체 버프 앞에서 흑막은 설칠 수 없는 것이었다.
뭐가, 이렇게 쉽담?
“내 버프도 쓸 만했네.”
나는 웃으며 노트북을 껐다.
마침 옷을 갈아입고 온 아이시스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기분 좋은 일 있어요?”
나는 흘긋 뒤돌아 그녀를 보며 웃었다.
“영애, 어쩌면 저 지능캐였던 거 아닐까요?”
그러자 갑자기 침묵이 시작됐다.
망설이던 아이시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그, 영애, 내가 영애를 많이 사랑하지만, 그래도 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이런 단호한 사람 같으니.
뭐, 상관없나?
어차피 복잡한 건 싫단 말이지.
지능캐 에피는 자신 없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아이시스가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토닥토닥.
아이시스는 미안했는지, 조심스럽게 위로를 시도했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좋지만, 인맥과 운만큼 대단한 게 없더라고요. 우리 영애는 인맥이랑 운이 좋잖아요.”
“제가 운이 좋은 편인가요?”
“그럼요! 몰입감 설문 조사에서 10점 준 거 보면 말 다 했죠!”
“근데 그 10점 특권을 못 누리고 있는 걸 보면 엄청 운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나도 야식 먹으러 나가고 싶어요.
착잡한 생각에 목소리가 절로 젖어 들었다. 그러자 아이시스가 눈꼬리를 내리더니, 곧 목소리를 높이며 내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치만 인맥! 영애는 인맥이 좋잖아요! 모두가 우리 데이지 영애를 사랑하는걸요!”
그녀는 쉴 새 없이 나를 부둥부둥하기 시작했다.
영애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모두가 영애를 좋아해!
오그라들었지만 아이시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아프다고 옆 나라에서 날아와 주는 의사도 있고, 괴롭힘 당할까 봐 간택 놀이를 하면서 힘 실어 주는 황제도 있고, 흑막을 잡으려는 나를 위해 취조를 대신해 주려는 성녀도 있었다.
세뇌 버프를 쓴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아이시스의 말에 취해 버렸다.
다시 차오른 자존감에 나는 어깨를 활짝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인복이면 뭐든 할 수 있죠!”
“당연하죠! 얼른 조찬 가서 국서를 취조합시다!”
아이시스가 내 엉덩이를 팡팡 쳤다.
뭔가 조련당한 기분이지만 나쁘지 않았으니 넘어갔다.
오늘은 여름국 대신들과 황제의 조찬이 있는 날.
이 조찬의 주인공은 성녀였다.
교황님이 방문하면 나라의 수장이 나와 대접하듯, 이쪽 세계관도 성녀가 방문하면 나라님이 발 벗고 달려와 극진히 모셨다.
성녀, 신의 선택을 받은 여인.
7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는 신의 사자로 여겨졌다.
아이시스는 하얀 사제복을 입고 청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조용히 분위기를 잡고 있으니 그녀의 주변으로 후광이 비친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죄가 씻겨 나가는 기분.
이러니 콧대 높은 양반들이 아침부터 달려오지.
이 조찬은 여름국의 귀족들이 성녀님께 인사를 드리는 자리라 하지만, 내가 볼 때는 팬 미팅이었다.
아이시스는 이 자리에 나를 데려갈 수 있도록 여름국에 허락을 구했다.
성녀의 부탁인 데다, 조찬에 자리 하나를 더 마련하는 건 큰일이 아니라 나는 바로 초대를 받았다.
“근데 영애, 세뇌 버프는 영애 목소리를 들으면 다 적용된다고 했죠?”
“네 맞아요. 그래서 지금 좀 걱정돼요. 다른 귀족들도 솔직하게 얘기할 텐데, 이상한 이야기 들으면서 식사해야 할까 봐 무섭네요.”
아이시스는 국서에게 솔직하게 말하도록 버프를 걸고 어젯밤 행적을 물을 생각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자백할 수밖에 없을 테니 현행범 직행이겠지.
다만, 다른 귀족 남주들도 솔직히 말하게 되니 자칫 잘못하면 황제 영애의 앞날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특히나 디아나 영애는 과몰입 유저인데, 귀족들이 말실수라도 하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젯밤에 아이시스가 충동적으로 이 플랜을 제안했지만, 나는 아직 회의적이었다.
빠르게 흑막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수인 영애가 증거를 잡으면 충분하니까 우리 디아나 영애의 멘탈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국서가 잡혀 들어가도 디아나는 계속 그 대신들과 일을 해야 하는데 얼마나 어색하겠어.
버프를 쓸지 쓰지 않을지 확실히 정한 건 아니지만, 궁중 한식을 먹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라 조찬은 따라갈 생각이다.
다들 묘하게 디아나를 불편해하는 분위기면 쓰지 말아야지.
아무리 성군이라도 안티가 있을지 몰라. 어쨌든 상사(?)니까.
“국서는 보통 식사가 끝날 때쯤 식후주를 권하거든요. 직접 식후주를 설명해 주니까 그때 빨리 끝내 버리죠. 다른 사람들은 대화에 못 끼어들게.”
“네, 술잔 돌릴 때쯤 타이밍을 노려 봐요.”
뭐, 타이밍 못 잡아도 궁중 한식을 조식으로 먹는 거니 나쁘지 않았다.
아이시스와 나는 식후주를 마실 때쯤 메시지를 나누기로 약속하고 처소를 나왔다.
***
연꽃이 만개한 연못에 자리한 누각.
귀빈을 접대할 때만 출입을 허락한다는 황제궁의 누각이다.
그래서인지 조경이 예술이었다.
하늘하늘 꼬리를 늘어뜨린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누각 근처를 헤엄치고, 연못가의 수국이 살랑살랑 바람에 움직인다.
사아아아.
기둥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 바람에 청량한 수국 향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경와 달리 식사 분위기는 평온하지 않았다.
마루에는 긴 상이 펼쳐져 있고, 가장 안쪽 상석에는 황제와 국서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10명의 참석자가 나란히 마주 앉았다.
황제와 국서에게 가까울수록 상석이었는데, 그 두 사람의 곁에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 둘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시스와 알렉스.
나는 흐린 눈으로 그 상석을 응시했다.
아니, 알렉스가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