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아샤는 다리를 꼬며 고개를 갸웃했다.
“캐릭터 맞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치만, 사람 같기도 한걸요.
나는 나도 모르게 내뱉으려던 말에 흠칫했다.
그런 내 혼란이 느껴졌는지 아샤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저도 처음엔 남주를 사람처럼 느꼈어요.”
“지금은 아니시고요?”
“네. 남주는 AI예요. 영애도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
“…….”
나는 더 말을 얹을 수 없었다.
뭐랄까.
냉정하지만, 그래서 더 사연이 있어 보이는 말투였다.
나는 볼 안쪽 살을 잘근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애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요?”
“사연이요?”
내가 빤히 쳐다보니 그 시선이 불편했는지 의사 영애가 한숨을 흘렸다.
“영애는 캐릭터가 사람 같나요?”
조용히 있으니 아샤가 피식 웃으며 한발 뒤로 물러나 줬다.
“뭐, 슬롯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 같긴 하죠.”
슬롯.
그 짧은 단어가 숙연한 침묵을 가져왔다.
그 단어를 듣고 나니 대충 그녀의 상처가 예상된 탓이다.
커뮤에서 이따금 끌올되는 유명한 난제.
‘슬롯의 도덕성.’
슬롯에 담기지 않으면, 남주는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남주들은 소꿉친구를 좋아하기도 했고, 아카데미 학우에게 고백하기도 하고, 무도회에서 만난 여인을 찾아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했다.
스스로 호감을 느끼고 상대를 알아가려 노력하는 거다.
마치 썸처럼.
나도 조정 경기 날에 이름 모를 남주에게 배를 타자고 제안을 받았었지. 엘런이 커트해서 못 탔지만.
그러나 그 감정은 다른 여주의 슬롯에 담기는 순간 먼지처럼 사라졌다.
오로지 슬롯 주인만 갈망하며 감정이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경멸하던 악녀의 몸에 빙의 여주의 혼이 담기면, 그녀에게 끌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슬롯의 힘을 인정했다.
엘런은 날 위해서 제 사면권을 포기하려 했고, 요한은 동료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나를 감싸 주었다.
그러나 슬롯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나와 어제까지 썸타던 남주가 다른 여주의 슬롯에 담기는 순간, 남주의 변심을 직관해야 했다.
나는 울적한 눈으로 의사 여주를 다시 바라봤다.
‘아샤 영애, 썸타던 남주를 다른 영애한테 뺏겼구나…….’
두 여주의 슬롯에 동시에 담기면, 남주의 양다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양다리 남주라니.
듣기만 해도 싫어.
그래서 슬롯이 겹치면 여주들은 급하게 남주 선택을 하곤 했다.
남주 선택.
그것은 혼란의 종지부였다.
선택된 남주는 오직 제 여주만 생각하고 사랑하게 된다.
분위기를 보니 확실하다.
아샤는 선택하기 전에 다른 영애의 슬롯에 남주를 뺏긴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샤가 남주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게 이해가 갔다.
그치. 어제까지 날 좋아한다고 말하던 남주가 갑자기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그러면 사람으로 안 보이지. 강아지로 보이지.
나는 생각을 가다듬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영애, 세상엔 남주가 많잖아요? 분명 좋은 남주도 있을 거예요.”
무슨 소리냐는 듯 아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영애,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는데 저는 남주를 슬롯에 뺏긴 적이 없어요.”
“그러면 왜 남주를 사람으로 안 보세요?”
“세상엔 다양한 취향과 생각이 있는 거죠. 제 생각에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그치만…….”
아샤를 설득해 보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디아나를 과몰입이라 말하던 내가 지금의 아샤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었다.
개인의 취향과 생각이 다르다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웃음을 흘리던 아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의 시선이 팔목의 워치를 향해 있었다.
아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수인 영애가 우울증약 좀 처방해 달라고 하네요.”
“우울증 약이요?”
“네, 일검이 옥에 갇혔다고 아침부터 울고 있거든요.”
“아, 수인 영애님도 희빈파셨죠.”
아샤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을 들었다.
“희빈파 정도가 아니죠. 키스카 영애는 희빈파 수장이에요.”
수인 영애의 덕질은 가을국에서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샤가 피식 웃으며 일화 하나를 풀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두 달 전에 황제 영애랑 일검 옷깃 스치게 하려고, 수인 영애가 새 떼를 불러와서 여름국 황성에 난리가 났었어요. 커뮤에서 아주 핫했죠.”
역시 수인여주.
동물을 이용한 자연친화적 이벤트라니.
잠깐만, 옷깃?
“왜 옷깃을 스치게 해요? 디아나 영애 아직 슬롯에 일검 추가 안 하셨어요?”
아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기론 아직이에요. 황제 영애 유명하잖아요. 영애가 슬롯 추가했으면 커뮤 뒤집혔을걸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희빈파니 국서파니 영애들이 더 난리인 거 같아요. 슬롯에 담기기 전인데 두 남주가 황제 영애에게 진심을 쏟고 있으니까.”
의사 영애는 내게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해 주었다.
국서와 일검의 로맨틱한 서사가 시니컬하게 전해졌다.
하나, 그녀의 이야기는 귓가를 스칠 뿐 머리에 들어오지 못했다.
내게 독향을 보낸 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범인은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재우는 약을 먹였다. 마치 어딘가로 빼돌리려는 듯이.
그리고 보란 듯이 일검에게 누명을 씌웠다. 하필이면 마왕 토벌을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이 시점에 말이다.
나를 필요로 하고, 마왕 토벌을 반대하는 세력.
자연스럽게 범인은 겨울국 재건 협회와 내통하는 자일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내가 이 궁에 오자마자 일을 친 걸 보면 실행력이 매우 빨랐다.
즉, 황궁에 수족이 많은 이라는 뜻이다.
수족이 많은 남주라면 국서가 떠오른다.
하지만 남주는 여주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
겨울국 재건 협회를 위해 디아나를 배신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슬롯에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서가 디아나에게 진심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아이시스와 동쪽 방 후궁 영애들이 외출 허가를 받은 그 저녁에 일이 벌어졌다.
내가 혼자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알고 있는 이는 국서였다. 영애들이 국서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으니까.
‘그래서 바로 황제궁으로 날 데리러 온 거였어.’
뒷목이 뻐근했다.
나는 목을 돌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배꽃처럼 하얗고 순수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날 비웃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우후훗. 봄국 영애, 이제야 눈치채신 건가요?’
이 흰머리 오목눈이 같은 놈.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을 뒤덮듯 짙푸른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오늘도 야식을 먹으러 못 나가겠지. 지금 이 분위기면 내일도 못 나갈 거고.
용서할 수 없었다.
한 달 전의 나였다면 겁먹은 채 넘어갔겠지만, 나는 겁을 버리고 복수 의지를 불태웠다.
여름국 황궁. 버프 충만한 영애들이 모여 사는 곳.
심지어 지금은 정치와 종교 최고 권위자인 먼치킨 여주가 둘이나 거주하고 있다.
흑막 남주 하나 잡는 건 일도 아니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을이 내려앉은 황궁을 노려보았다.
축하한다, 국서야. 역관광 당하기 좋은 TPO를 맞추었구나.
너를 이달의 베스트 흑막으로 선정한다. 특상은 모함이다.
***
“흐으으윽.”
키스카는 눈물 젖은 얼굴을 다시 베개에 파묻었다.
아니야, 우리 희빈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쥐들은 모두 희빈이 범인이라 말했다.
[분명 독향 냄새가 나는 궁녀가 일검 처소로 들어갔구먼유. 지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슈!]
쥐는 눈을 부라리며, 자꾸만 자기가 뭔가를 똑똑히 봤다고 주장했다.
‘아니야! 모함일 거야!’
키스카는 현실을 부정하며 다시 흐느꼈다.
“흐으윽.”
일검이랑 디아나 영애 결혼하고, 애기도 낳고, 잘 사는 거 보고 싶었는데!
일검이 이렇게 죽는다니 말도 안 돼.
내가 새드 엔딩 주식을 샀다니!
이래서 연재작은 손대는 거 아니라고…… 아, 이건 소설 아니지. 정신 차리자.
키스카는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 슬픈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때, 손목에서 반짝 빛이 들어왔다.
키스카는 눈을 찌푸린 채 워치를 두드려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했다.
[데이지: 영애, 안녕하세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ㅠㅠ]
어제 구해 준 봄국 영애였다.
키스카는 훌쩍이며 답장을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런데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에 키스카의 눈물이 뚝 멈췄다.
[데이지: 감사의 뜻으로 일검을 구해드리고 싶은데, 혹시 관심 있으신가요?^^]
***
끼이익.
느릿하게 찍히는 발걸음을 따라 검은 나무 바닥이 스산히 울었다.
한지 대신 얇은 유리를 붙인 장지문.
간격 넓은 나무 살 사이로 무성한 죽림이 비친다.
대나무 그림자 때문에 해가 잘 들지 않아 황제궁 복도는 어두웠다.
쏴아아아.
게다가 바람이 불 때면 날카로운 잎사귀가 부대껴 스산한 소리를 냈다.
아무 생각 없이 왔다면, 기에 눌려 도망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끼익.
생각을 정리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나는 내가 잘하는 걸 고민해 봤다.
첫째, 마족어를 잘함.
둘째, 마족 정보를 잘 앎.
셋째, 버그로 세계관 설정을 몇 가지 봤음.
지략을 세우기에는 부족하지만, 마왕에 집착하는 놈들의 어그로를 끌기엔 충분한 능력이었다.
나는 문 앞에서 대기 중인 궁인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폐하, 봄국의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궁인의 나긋한 목소리가 어두운 분위기를 잠시 잘라 냈다.
“들라 하라.”
진중한 여자 목소리가 공기에 무게를 더하며 다시 침묵을 가져왔다.
드르륵.
곧 양쪽으로 문이 당겨지며 방문자의 출입을 허락했다.
두 장의 휘장을 넘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황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비단 방석 위에 무릎을 꿇자,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괜찮은가?”
동료가 아닌, 한 나라의 황제와 타국의 귀족으로 만나는 자리.
그녀는 내게 하대하며 거리를 두었다.
“폐하께서 살펴 주신 덕분에 빠르게 쾌차했습니다.”
디아나가 손에 들고 있던 다기를 내려 두었다.
달칵.
도자기 표면이 마찰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디아나와 이곳에서 만난 이유는 하나였다.
대어 낚시.
나는 어젯밤 심혈을 기울여 만든 떡밥을 꺼냈다.
“폐하께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