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일검에게 호위가 필요할 리 없는데, 제국 최고의 무관들을 붙여준 이유는 하나지.”
그는 손끝으로 탁상의 끝을 쓸었다.
“지방에 계신 어른들을 뵙는 척, 마물들을 청소하고 돌아오라는 뜻이었다네.”
절로 탄성이 나왔다.
앞마당을 쓸어 주는 게 아니라, 앞동산 마물을 쓸어버리는 사위라니.
“공교롭게도 폐하께서는 출가하신 선황의 후궁들과 공주들에게 마물 증가가 예상되는 곳에 집을 선물해 주셨지. 일검은 폐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지역의 마물을 토벌해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어. 황실 종친들도 점점 일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하긴, 영지 내 백성들이 안전하면 영지 수입도 늘고 입지도 안정될 테니 황실 어른들은 일검을 예뻐할 수밖에 없겠지.
동네 사람들 우리 며늘 아가, 아니 사위 아가 좀 보세요!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도, 내가 마물 때문에 다칠까 봐 굳이~ 구욷이~ 이 산골에 와서 토벌하고 가네요. 이번 설에는 안 와도 되는데 또 온다네요. 이거 참~.
이런 느낌인 건가.
“일검이 쌓아 둔 공이 크니, 조만간 대신들도 결국 일검에게 벼슬을 내리는 데 동의할 걸세.”
오, 일검 이제 관직을 받는구나.
“제국법상 국서와 후궁은 관직에 오를 수 없으니 곧 폐하께서 일검과 이혼하시고 그를 화월궁 밖으로 출궁시킬 걸세.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흠칫했다.
……뭘 걱정하지 마요?
걱정해야 할 부분이 있었어요?
절대 정치는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지금 이 긴 이야기는 나를 위한 조언이었던 모양인데, 나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깜빡이는 나를 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검은 폐하의 총애를 받고 싶어서 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필사적이라는 뜻일세.”
그는 친히 주전자를 들어 내 잔을 채워 주었다.
“하니, 편하게 지내게. 폐하께서 일검에게 벼슬을 내리시면 그도 더는 총애에 목메지 않을 거야.”
“아…….”
이 사람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일검에게 겁먹고 후궁 자리를 포기할까 봐, 궁중 정치사를 꺼낸 거였다.
황궁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오해를 묵인한 건데, 국서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졌다.
이렇게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는데.
나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진실을 털어놨다.
“따뜻한 말씀에 감사드리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곧 봄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어째서?”
나는 순간 흠칫했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가 미간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제가 후궁이 되고 싶어 한다고 환관이 오해한 듯합니다만, 저는 봄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프리마돈나 영애 콘서트에 가야 해요.
“잠시 머무는 거라 환관의 오해를 풀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그것이 마마를 혼란스럽게 한 모양입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국서는 당황한 듯 잠시 표정을 굳혔으나, 금세 차분해졌다.
그는 제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다 시선을 정자 밖으로 틀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종을 보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봄국으로는 언제 떠날 예정인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나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에는 돌아갈 것 같습니다.”
국서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그저 조용히 차를 비울 뿐.
몇 분 뒤, 그는 할 일이 생각났다며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
차 한 잔 마시고 돌아왔는데, 벌써 밤이었다.
“피곤해.”
국서와 차를 마시기 전에 숨긴 무기가 있는지 몸 검사를 받았고, 간단한 예의 교육까지 받고 난 후에야 대화를 시작한 터라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황궁 생활 만만치 않네.
“으으.”
나는 역사 속 궁중 여인들을 존경하며 기지개를 켰다.
둥근 창문 밖으로 시선이 닿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과 하얀 달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저 깨끗한 하늘 아래서 구워 먹는 고기는 얼마나 맛있을까?
“나도 먹고 싶었는데.”
그러나 이미 영애들은 식사를 끝낸 뒤였다.
2차로 주막에 갔다며 오라고 했는데 나는 피곤하다고 둘러대며 거절했다.
[아이시스: 여애~~~, ㅇ ㅙ 안 와여? 언능와앙 보고시포옹.]
생각으로 보내는 메시지인데 저렇게 오타가 많이 난 걸 보면 고주망태가 된 거겠지.
다들 거하니 취한 듯한데 뒤치다꺼리하러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나도 너무 피곤했다.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노트북을 켰다.
“용서하시오. 영애. 나의 의리는 여기까지인가 보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숙취 해소 방법을 커뮤니티에 검색했다.
“대신 영애의 숙취 해소제를 준비해 보리다.”
여름국은 한약으로 유명한 나라답게 숙취 해소 환약도 있었다.
황궁이니까 약 정도는 쉽게 구하겠지?
나는 어떤 영애가 알려 준 환 이름을 중얼거리며, 궁인을 부르는 작은 종을 울렸다.
치잉.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장지문이 열렸다.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요.”
궁인이 허리를 숙인 채 물었다.
“혹시 불취단(不醉丹)을 몇 알 구할 수 있을까요?”
여름국에 여행 온 영애들의 필수 구매 리스트에 드는 유명한 관광 상품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고, 취한 술도 깨도록 해 주는 기적의 환약.
궁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남의 궁에서 숙취 해소제 좀 구해 달라 하니 이 사람은 뭔가 싶었나 보다.
그러나 당황은 찰나였다.
그녀는 사회생활 좀 해 본 사람인지 센스가 좋았다.
“예, 구해 오겠습니다. 술상도 함께 준비해 드릴까요?”
약을 구하는 이유가 내가 애주가라서 그런 거라 여긴 듯 조심스럽게 술상을 제안했다.
나는 뜻밖의 횡재에 손뼉을 쳤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러자 궁인이 짧게 미소를 짓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방을 나가려던 그녀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눈치를 보다 품에서 작은 종이 상자를 꺼냈다.
“숙면을 도와주는 향인데, 몸의 피로도 풀어 준답니다. 미리 피워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불을 붙였다.
궁인이 나가고 난 뒤, 나는 다시 커뮤니티를 관람했다.
내일은 나도 꼭 나가서 한식 먹어야지.
여름국 방문 후기 글을 읽으며 다짐하는데, 풀향이 코끝을 스쳤다.
“오? 향 좋다.”
향기가 난 곳을 찾아보니 연꽃 모양의 향로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궁인이 피운 그 향은 금세 방 안을 가득 메웠다.
***
“하아.”
뿌연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
긴 머리를 쓸어 넘긴 여인이 느긋한 숨을 흘렸다.
그녀는 노곤한 몸을 나무 욕조에 누인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피곤한 하루였다.
며칠 후 열릴 연등 행사를 점검하기 위해 오늘 환원 저잣거리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외적인 이유일 뿐, 사실 그녀가 황도 시찰을 다녀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희빈파의 수장이자 서쪽 방 영애들의 정신적 지주, 정3품 소용 키스카 영애였다.
키스카는 황성 밖에서도 부유한 삶을 누리기 위해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남주 선택을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디아나에게 말하자 그녀도 흔쾌히 이혼에 동의했다.
디아나의 겨울국 탐사 일정 때문에 1달 정도 일정이 미뤄지긴 했지만, 돌아왔으니 아마 이번 주 내로 이혼이 처리될 거다.
커피를 좋아했던 키스카는 카페 사업을 기획했다.
그녀는 숭늉과 쌍화탕의 대체재로 다양한 아메리카노를 개발했는데, 봄국과 가을국에서 들여온 15종류의 원두를 여러 방법으로 블렌딩 해 10개의 아메리카노 메뉴를 만들었다.
가오픈을 해 보니 시장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다.
200년 전통의 순댓국집 옆에 자리를 잡은 게 신의 한 수였다.
“하, 일일 술술 풀리는구나.”
기분 좋게 미소 짓던 그녀는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아, 봄국에서 온 영애도 한 번 보고 출궁해야 하는데.”
국서파 영애들이 벌써 우리 일검 루머 잔뜩 퍼트린 거 아니야?
국서파 영애들에게 선수를 뺏겼다는 생각에 키스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불만은 잠시였다.
일검의 거대한 풍채와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린 그녀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을 거야. 우리 일검 매력 어마무시하니까. 내일 다과 먹자고 하면서 직접 영업해 봐야지.”
키스카는 눈을 감고 여유를 더 즐겼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녀의 창가로 들어왔다.
“찍찍.”
쥐였다.
앙증맞은 볼을 씰룩거리며 쥐가 쉴 새 없이 소리를 냈다.
“찍찍찍찍!”
게슴츠레 눈을 뜬 키스카가 창틀에 자리한 쥐를 바라봤다.
흥분한 모양인지 쥐가 상모 돌리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계속 찍찍댔다.
곧 그녀의 특성 버프가 켜졌다.
[특성 버프 ‘동물 통역사’ ON]
버프가 켜지자 찍찍거리던 목소리에 의미가 담기기 시작했다.
“[큰일났슈! 큰일났슈!]”
키스카가 창가에 몸을 바짝 기댔다.
“무슨 일 있어?”
찍찍, 쥐의 말을 듣던 키스카의 눈이 커졌다.
“뭐? 누가 쓰러졌다고?!”
***
비단 가운을 걸친 키스카가 어딘가로 뛰어갔다.
복도 끝에 다다른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윽!”
방 안 가득한 달큼한 향기에 키스카는 얼른 소매로 코를 막았다.
정말 독향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키스카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금발 영애가 들어왔다.
“영애! 영애!! 정신 차려요!”
키스카는 그녀를 품에 안고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축 늘어진 채 몸을 가누지 못했다.
키스카는 제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코끝에 대 봤다.
다행히 봄국 영애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키스카는 침착하려 노력하며 방을 둘러봤다.
어디 있지, 분명 방에 있을 텐데.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빙의 난이도 최상 플레이 존 황궁.
아무리 황궁의 최고 권력자가 같은 유저라고 해도 영애들에게 황궁은 위험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후궁 영애들은 그 누구 하나 다친 적이 없었다.
그녀들에게 버프가 있어서?
전개 통찰력이 있어서?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들에게는 더 큰 치트키가 있었다.
“찾았다!”
분주하게 눈을 돌리던 키스카가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발견했다.
책상으로 달려간 키스카가 다급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제목: ♨긴급♨ 여름국 황성에서 #명의여주를 찾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