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미모만큼이나 단아한 목소리가 귓가로 매끄럽게 흘러왔다.
“그대가 폐하께서 초대하셨다는 봄국의 귀인이군.”
내려간 시야에 하얀 비단 자락과 한 번도 검을 쥐어 본 적 없어 보이는 깨끗한 손이 동시에 담겼다.
그때, 그의 손가락이 물을 떠올리듯 위로 굽어졌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수신호에 나는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국서는 눈웃음을 지어 주곤 바로 일검에게 고개를 틀었다.
“일검, 폐하의 손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은 없지만, 주의하라는 뜻이었다.
기회 삼아 연적에게 망신을 줄 법한데, 그는 일검의 체면을 위해 딱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일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했다.
살기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그는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서 마마를 뵙습니다.”
고개만 까닥 숙였다 들어 올렸을 뿐이지 그 어디에도 예는 존재하지 않았다.
‘……막장이네.’
일검의 소문이 왜 좋지 않은지 이해했다.
저렇게 함부로 구는데도 궁에 남아 있는 걸 보니 전장에서 공을 많이 세웠다는 소문도 진짜인 듯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기싸움을 지켜봤다.
그런데 그때, 국서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주변으로 하얀 목련이 만개한 것처럼 빛이 일었다.
착각이겠지?
[착각입니다.]
AI가 끼어들어 내 주접을 잘라 냈다.
“폐하께서 다망하신 걸 알면서도 그대를 챙기지 못했군. 사과의 의미로 다과를 대접하고 싶은데, 내 처소로 가겠나?”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일검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야.
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그는 작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일검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검은 내가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국서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틀었다. 그를 따라가려는데 뒤에서 일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버리거라.”
돌아보니 일검이 손가락으로 음식이 담긴 쟁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서요. 어찌 저런 걸 폐하께 드립니까.”
“레이디 데이지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군, 일검.”
“아, 레이디가 그랬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직접 조리를 한 것도 아닌데, 중간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뭔 소리야? 내가 후궁 처소에서 혼자 기다리다 준비되자마자 딱 가져왔는데? 게다가 기미 상궁도 있다고 들었는데 뭐가 걱정이야 대체.
괜한 시비라 여기는데 국서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는 일검을 무시하고 궁인에게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 전하거라.”
“……예.”
일검과 국서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궁인이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어딜 가나 이렇게 고생하는 말단이 있구나.
나도 봄국 황성에서 저런 걸 겪었지.
남 일 같지 않아 씁쓸했다.
그런데 일검이 손을 들었다.
그가 손으로 쟁반을 밀자, 반상이 뒤집히며 음식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와장창창.
“일검.”
국서의 낮은 목소리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위로 떨어졌다.
하나, 일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가 레이디 데이지를 총애한다고 하니, 혹 의심 없이 음식을 입에 대실까 걱정되어 그랬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곧 피곤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일검은 그 성정을 바꿀 생각이 없나?”
“소인도 마마처럼 예를 갖추려 꽤 노력 중이긴 하나, 폐하를 위해서라면 저는 몇 번이고 무례할 수 있습니다.”
국서가 실소했다.
“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다과회 때도 그리 말씀하셨지요.”
일검이 날 선 대답을 했다.
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칼날이 오가는 기분이었다.
‘……이 두 남주 정말로 암투물 찍네.’
그래도 먼저 꼬리를 내린 건 일검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장난치듯 허리를 굽혔다.
“귀빈을 걱정하는 제 마음이었다 여겨 주세요.”
천천히 올라간 눈꺼풀 아래로 금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시선이 내게로 떨어졌다.
“폐하의 손님이 저처럼 누명을 쓸까 걱정이 되어 그랬으니.”
일검이 다시 시선을 국서에게 옮기며 말했다.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자는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인이라는 사실을.”
제 흑막 분위기를 국서에게 이관한 일검은 놀리듯 국서에게 허리를 굽혔다가 등을 돌려 사라졌다.
일검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국서가 내게 시선을 틀었다.
나는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팔랑귀에게 일검이 남긴 대화의 여파는 컸다.
갑자기 국서도 무섭게 느껴진다.
차에 독을 타며 싸우는 두 남주의 처첩 갈등이라니.
‘디아나 영애, 대체 어떤 플레이를 하고 계신 겁니까…….’
국서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추한 꼴을 보였군.”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잠시 나를 내려보던 국서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내게 다시 제안했다.
“불편하게 한 점도 사과하고 싶은데 이만 가서 이야기하지.”
나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
국서가 머무는 궁은 매우 조용했다.
숲을 품은 화월궁과 달리 이곳은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넓은 돌바닥과 기와를 얹은 담벼락만 보일 뿐이다.
이곳은 궁궐이라기보다는 사찰 같았다.
찰랑.
처마 끝에 달린 작은 종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은은한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 내음도 국서궁의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
역시 배꽃 같은 남주.
단아하고 청렴하시군요.
왜 동쪽 방 후궁 영애들이 국서 주식에 올인하는지 이해했다.
상견례 프리패스상 그 자체.
국서를 보고 있으니 꼭 장모가 된 기분이 든다. 있지도 않은 딸의 사위로 삼고 싶어지네.
‘역시 난 여주맘 타입이었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려 해서, 손끝으로 입꼬리를 꾹 눌렀다.
“일검의 무례는 내 대신 사과하지.”
“무례라니요. 궁인도 아닌데 폐하의 식사를 챙기려 든 제가 주제넘은 일을 한 것이지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사과를 거부했다.
겸사겸사 국서가 질투하지 않도록 디아나와 선도 그었다.
그러자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일검의 말은 괘념치 말게나. 그대는 주제를 넘지 않았네.”
여름국 최고 미남의 자애로운 모습에 심장이 말랑말랑해졌다.
후궁 여주가 되면 재미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매일 이런 선인 같은 미남과 거친 무사 미남이 황제 영애를 두고 싸우는 걸 본다는 거잖아.
재밌겠다. 직업 만족도 최상이겠어.
부러움에 눈썹이 절로 휘어졌다.
그런 내 표정을 오해했는지 국서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일검이 폐하께 과한 충성심을 보이는 건 여름국의 정치 사정 때문이지 그대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니 겁먹을 것 없네.”
정치 사정?
이해가 가지 않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름국은 한때 가을국의 농간으로 왕조가 한 번 끊긴 적이 있네.”
아, 그 얘기 알지요.
마지막 아이스타스 황제 설정 읽고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데.
“아르테미스 왕조가 시작된 후, 친가을국 인사들의 입김이 거세졌지. 아르테미스 2대 황제께서는 그 영향을 잘라 내기 위해 생애를 바치셨다네.”
이것도 기억난다.
혼인 동맹을 맺느라 많은 후궁을 거느렸던 여름국 황제님.
“2대 황제께서는 지방 귀족들뿐만 아니라 수도의 신진 세력들과 혼인을 맺어 반가을국 인사들을 궁으로 들이셨지. 그 덕에 가을국 세작들을 모두 몰아내고 자주적인 황제가 되실 수 있었고.”
2대 황제는 후손들에게 영웅으로 인정받는 듯하다. 국서의 표정에 뿌듯함이 깃드는 걸 보면.
“간신히 화를 피했던 가을국 주둔군은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고국으로 도망쳤는데 나라에 남긴 씨앗은 치우지 못했지.”
아, 이 이야기도 기억난다.
“당시 가을국에 대한 민중의 거부감이 컸던 터라, 황제께서는 가을국 혼혈들을 섬으로 추방하셨고, 신분 또한 천민으로 강등했다네.”
국서는 그 얘기를 하다 잠시 차로 목을 축였다.
“겉으로는 가을국에 대한 괘씸함 때문에 내린 벌인 듯하나, 사실은 가을국 세작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재산을 동맹 가문에게 나눠 주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였지.”
다시 들어도 너무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애들인데, 살던 집까지 뺏고 섬으로 강제 이주시킨 거잖아.
“게다가 혼혈들이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도록 여러 법을 만들었다네. 가장 대표적인 건 혼혈민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법과 제 소유의 재산을 가질 수 없다는 법이었지.”
벼슬길에 들 수 없고, 돈을 모으는 것도 불가하다니.
평생 천민으로 섬에 처박혀 살라는 거 아닌가.
내 표정에 불만이 드러난 모양인지 국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무하지. 정작 나쁜 짓을 한 놈들은 고국으로 도망가 잘살고 있는데, 버려진 아이들은 미래를 짓밟혔으니.”
“네…… 불쌍합니다.”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었다.
국서의 입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빙긋 웃고는 내게 말했다.
“폐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셨다네.”
분명 같은 미소인데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느릿하게 올라간 눈썹이 잠시 그의 이마에 주름을 그리다 내려왔다.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성급하게 내 의견을 말했다는 생각.
그가 내 정치 성향을 떠보려 해본 말 일지도 모르는데.
“폐하께서는 가을국 혼혈족들을 불쌍히 여기셨지. 일검 또한 마찬가지였어. 그분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그에게 무관 벼슬을 하사하려 하셨지.”
역시 우리 디아나.
누가 뭐라 하건 차별 없는 인재 등용을 하신 모양이다.
국서가 일검이 받을 뻔한 무관 품계를 알려 주었는데, 뭔 말인지 몰라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여름국은 산지가 많아 주기적으로 산속 마물 개체 수를 관리한다네. 조금만 개체 수가 늘어도 마을로 내려오거든. 폐하께서는 분기별로 마물 토벌을 나가는 무관 기구를 만드셨는데, 그 장(將)으로 일검을 추천하셨지.”
우리 황제 영애 플레이 난이도 무슨 일이야?
입법에 국가 기구까지 만들고.
나는 정2품, 종3품 품계만 들어도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타임라인 짬이 달라서 그런지 황제 영애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단하네.
그런데 아주 솔직히 말하면, 조금 졸리기 시작했다.
전문직 에피소드, 정치 서사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머리 쓰는 일에 약한지라, 벌써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
스킵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르는데, 국서 남주는 배려심 없게도 상대가 관심 없어 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나는 졸음이 오는 걸 꾹 참고 눈을 부릅떴다.
“대신들이 일검에게 위임할 수 없다 반대하니 폐하가 어찌하셨는지 아는가?”
물어보지 마세요. 내가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앞구르기를 하며 봐도 지능캐가 아닌데 이 국서는 자꾸만 내게 정치 서사를 입력했다.
“후궁으로 삼으셨다네. 그것도 희빈으로 바로 품계를 올리라 명하셨지. 하여 내명부 정1품이 되어 원래 받으려던 품계보다 높아졌지.”
“오오, 그렇군요.”
나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명부 정1품은 종친 일가와 태후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지. 그래서 희빈은 매달 지방에 내려가 출가한 황가 어른들을 살피고 있다네.”
#시집살이물이 여기 있네.
희빈도 극한직업이었어.
지방으로 내려가서 반려자 일가친척의 생일, 조카의 대입 등등 이벤트를 챙겨야 한다니.
속으로 동정하는데 내 표정이 다 읽혔는지 국서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희빈은 집안일을 한 게 아니라네.”
음. 그럼 바깥일인가?
밖에서 가족을 챙기니까 바깥일이라 해야 하나?
“폐하께서는 마물 토벌단을 희빈의 호위 기사단으로 명칭을 바꾸시고, 일검의 출장길을 호위하라 명하셨지.”
국서는 마치 질문을 하듯 말했다.
마물 토벌단이 희빈의 호위 기사단이 된 이유를 추측하시오.
……불경기라 새로운 인력을 뽑을 돈이 없어서, 남는 인력을 부서 이동시켰다?
절대 답이 아닐 거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문 채 국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