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삼계탕을 준비하는 동안 후궁 영애들은 신나게 일검 욕을 했다.
여름국에 왜 남자 후궁이 1명뿐인 줄 아냐며.
디아나가 눈길만 주면 일검이 뒤에서 쓱싹해 버렸기 때문이란다.
물론 팩트 체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건이 있었다.
재작년쯤 후궁 영애들이 다과회를 열고 단체로 복통을 앓았는데, 일검이 남부에서 마물을 토벌하고 돌아온 기념으로 가져온 찻잎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디아나가 그때 처음으로 그의 투기를 강하게 다스렸더니, 일검은 자기 탓이 아니라며 단식으로 반항했다.
마음 약한 우리 디아나 영애. 일검 밥 한 술 뜨게 하겠다고 무죄를 믿어 주고 그 사건은 흐지부지 넘어갔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본 적은 없지만) 그런 무서운 짓을 저질러 놓고, 그 고양이상 얼굴로 애교를 부려서(이것도 본 적 없지만) 넘어가다니.
나는 영애들의 말을 들으며 지극히 객관적인 판단을 내렸다.
‘위험한 놈이군.’
“레이디, 이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딴생각을 하던 나는 궁인의 말에 다시 걸음을 틀었다.
나는 지금 디아나에게 백숙 배달을 가는 중이었다.
디아나는 일에 몰두할 때면 집무실에 들어가 며칠 동안 나오지 않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 같다며 밥을 챙겨 주자고 영애들이 입을 모았다.
그리고 그 배달원으로 모두가 나를 지목했다.
총애받는 예비(?) 후궁의 모습을 궁인에게 보여 줘야 한다는 거였다.
예비 신부도 아니고 예비 후궁이라니. 어이없는 호칭이지만 놀랍게도 예비 후궁은 여름국에서 가장 총애받는 후궁으로 통했다.
이건 다 플랫폼 때문이었다.
이 세계에는 플랫폼의 극악무도한 설문 조사 낚시에 당해, #가족후회물 #가족복수극 키워드를 고른 영애들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빙의물은 보는 것과 내가 당하는 것의 괴리가 큰 장르.
영애들은 가족들의 냉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커뮤에 구호 요청을 하고는 했다.
디아나는 제 권력을 이용해 고생하는 영애들을 궁에 데려와 임시로 후궁 자리를 줬는데, 실제로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내명부에 오르지 못한 영애들은 애매한 처지라 간 큰 이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디아나는 서열 정리를 위해 대놓고 영애를 편애해 힘을 실어 줬다.
그렇게 ‘예비 후궁 = 가장 총애받는 후궁’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영애들을 괴롭힌 그 간 큰 사람은 후궁임에도 직함이 아닌, 제 별호로 불리는 이였다.
대륙 제1검.
여름국에는 5검호라는 문화가 있다. 5명의 검사에게 대륙 최고의 검사라는 뜻의 별호를 주는 것이다.
아주 명예로운 호칭이라 검호는 신분과 직위에 앞서, 이름처럼 불렸다.
검호보다 앞서는 호칭은 오직 황제뿐이었다.
그래서 희빈도 일검으로 불렸다.
어쨌든 일검은 질투에 빠지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남자라고 한다.
영애들은 분명 일검이 날 괴롭힐 거라며 미리 궁인에게 총애를 과시해 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의 괴롭힘에 동조하지 못하도록.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옷깃을 한 번 여몄다.
하긴 난 일검을 막을 전투 버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건드리면 폐하에게 혼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좋지.
팔랑귀인 나는 그녀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렇게 백숙 배달 여정을 떠나게 됐다.
끼익.
화월궁의 대문이 열렸다.
나는 한 걸음 내디뎌 문지방을 넘었다.
“이곳이 황제 폐하의 처소입니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궁인이 말했다.
“폐하의 처소랑 후궁 처소가 붙어 있어요?”
“예, 아이스타스 왕조부터 내려오는 구조지요.”
아. 아이스타스.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왜 이 두 처소가 붙어 있는지 생각이 난 탓이다.
아이스타스 마지막 황제가 제 처소 바로 옆에 후궁 처소를 만든 이유.
정무를 강요하는 후궁 때문에 집무실에 가긴 했지만, 떨어지는 시간이 아쉬워 황제는 후궁을 틈틈이 보기 위해 아예 집무실 옆에 화월궁을 지어 버렸다.
슬픔을 삼키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이 궁에 그때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 황제 영애는 좋은 배필을 만나서 백년해로해야 해.
여주맘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나는 황제 영애의 평온한 전개를 바라며 걸음을 뗐다.
“아야!”
그리고 딴생각하며 걷던 탓에 검은 기둥에 머리를 부딪쳤다.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지.”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사과하고 눈앞의 돌기둥 같은 신체를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들다 그대로 멈춰 버렸다.
물론 그의 미모가 놀랄 만큼 아름답긴 했다.
그러나 그래서 겁먹은 건 아니었다.
짧은 흑발, 날카로운 얼굴선, 금안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 그리고 왼쪽 눈 아래 자리한 눈물점.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외형이었다.
정적 사이로 사막의 바람처럼 건조한 미풍이 불어왔다.
온몸의 수분이 바짝 메마른다. 잔뜩 졸아든 나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대륙의 제1의 검사, 제1검이었다.
일검은 대답 없이 나를 찍어 누르듯 내려 봤다.
‘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일검의 기에 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노을이 꼭 핏물처럼 느껴진다.
몇 초 후 일검의 시선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일검은 궁녀가 든 백숙 뚝배기를 응시했다.
다시 돌아온 시선에 숨길 수 없는 적의가 가득했다.
남편에게 꼬리치는 내연녀를 보는 본처의 눈빛이랄까.
어떻게 봐도 내가 잘못됐고, 저 분노가 응당한 듯한데…… 왜 내가 불쌍한 거 같지?
호랑이 앞에 선 작은 쥐처럼 바들바들 떠는데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폐하가 새로 데려왔다는 후궁인가?”
“아닙니다. 전혀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궁중 어법이고 뭐고, 튀어나온 생존 의지가 빠르게 내 지위를 부정했다.
다행히 일검의 굳은 미간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나 잠시였다.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 예비 후궁이랬나.”
“손님이요. 손님! 저는 그저 봄국에서 온 손님입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궁녀 언니를 쳐다봤다.
“네가 대신 답해 보아라.”
그제야 나는 살려 달라는 눈빛으로 다급히 궁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나보다 궁녀 언니가 더 위태로워 보였다.
지진이라도 난 듯 뚝배기가 자진모리장단으로 춤을 추며 국물을 뿜어 대고 있다.
일검의 평판은 대충 들었는데, 궁인의 반응을 보니 보통 도른자가 아닌 듯하다.
그녀의 태도가 답이 되었다 여긴 건지, 일검이 헛웃음을 흘렸다.
“간혹 이런 이들이 있었지.”
노을빛이 스민 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궁에서 한자리하려 폐하께 어떻게든 얼굴을 비추려는 이들.”
저 따뜻한 눈동자로 무서운 분위기를 내는 것도 능력이었다.
그는 쐐기를 박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얼굴 한번 비추려고 벌써 궁중 나인을 매수한 건가?”
갑자기 #야망여주로 몰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뻐끔거렸다.
#BL소설에 빙의한 여주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여조도 아니고 남조에게 견제받는 기분이 묘했다.
아니야. 이런 남주한테는 견제받는 게 낫지, 도른 집착남한테 구애당하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일검은 내게 로맨스를 품을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지금 나를 노려보는 건가?”
당장 목을 따 버리고 싶어 근질근질한 눈으로 나를 내려 보는 걸 보니.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나는 빠르게 눈을 깔며 부정했다.
그러나 보이지도 않는데,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 목덜미가 따끔했다.
“목이 얇군.”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제가 승모근이 많은 편이라.”
“10초면 끊어 버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일검의 귀하신 10초를 왜 그런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려 하십니까.”
나는 슬쩍 두 손으로 내 목을 가렸다.
“그 손목도 함께 끊으려면 한 15초 정도 걸릴 거 같고.”
울컥했다.
왜 #사패남주들은 나만 보면 목 딸 생각 먼저 하는 걸까?
두려움에 눈앞이 흐려지는 찰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디이이이이이이!”
퍼뜩 고개를 드니 디아나의 집무실에서 나온 환관이 나를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일검이 환관을 쳐다봤으나, 환관을 향하던 시선은 금세 내 쪽으로 돌아왔다.
눈치 빠른 환관이 나를 지키듯 내 앞에 선 탓이다.
“일검!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분은 폐하께서 직접 모셔 온 예비 후궁이시란 말입니다!”
눈치 빠르다는 거 취소다.
“예비 후궁이 아니라 손님이라 말하던데.”
“아닙니다. 레이디 데이지는 곧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실 분입니다!”
……환관,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눈새.
“총애라.”
호랑이의 낮은 울음처럼 소름이 쫙 끼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환관은 개의치 않고 더 바락바락 대들었다.
“일검께서도 폐하의 모습을 보셨다면 레이디에게 이리 함부로 대하지 못하실 겁니다. 불면 날아갈까, 떨어뜨리면 깨질까 늘 곁에 붙어서 챙기시고 어찌나 아끼시던지요.”
이제 날 멕이러 온 건지 도와주러 온 건지 헷갈린다.
그런데 환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미소 짓는 걸 보니 도와주려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나는 네 편이라 말하듯 소매 아래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토록 완벽한 팀킬은 처음 보는지라 마음이 심란해졌다.
“오! 삼계탕인가요? 폐하를 위해 준비하신 모양이군요. 저도 폐하께서 끼니를 거르시는 게 걱정이 되어 나왔는데 어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셨습니까! 역시 폐하의 총! 애!를 받으실 만합니다.”
너 이 자식 그만해!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일검은 예비 후궁이 이리 폐하를 살뜰히 챙기시는데 기쁘지 않사옵니까?”
일검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응시했다.
“글쎄, 조금도 기쁘지가 않네.”
“세상에, 어찌 이리 부덕하신…… 으악!”
환관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일검이 가볍게 손으로 환관을 밀어냈다.
정말 살짝 밀었는데 환관은 종이 인형처럼 날아가 돌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전에 디아나가 일검은 검을 휘둘러 산을 벨 수 있는 사내라고 했는데, 그 말이 허풍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그를 쳐다봤다.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레이디는 데이지라고 부르면 되나?”
“편하신 대로 부르시옵소서.”
깍듯하게 말하는데, 그가 또 웃음을 흘렸다.
“레이디 데이지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야.”
“세상에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하셨을까요! 어떤 유형을 싫어하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빠르게 시정하겠습니다.”
나는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덤빌 마음이 없음을 드러냈지만, 그 모습에 일검은 더 화가 난 듯했다.
그가 웃음을 싹 지웠다.
“감히 날 기만하는 인간이 제일 싫은데.”
그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춰 왔다.
“그건 어떻게 시정할 수 있을까?”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드는 순간 속이 답답해졌다.
“저는 일검을 기만한 적이…….”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내 말을 잘라 냈다.
“칠거지악을 아십니까. 일검.”
나긋한 목소리 뒤로 사뿐한 발걸음 소리가 따라붙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향기가 가까워진다.
풀 내음처럼 생명력이 느껴지고, 장미꽃처럼 은은한 달콤함이 섞인 청아한 향이었다.
그때, 알람이 울렸다.
[배꽃 향기입니다.]
아, 배꽃이 이런 향이구나.
AI의 설명을 들으니 예전에 읽었던 동로판 명작이 떠올랐다.
배꽃으로 미인을 표현했는데, 왜 선하고 아름다운 이에게 그런 표현을 쓰는지 한 번에 이해했다.
맑은 꽃향기를 맡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포근한 꽃잎에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
자박.
돌계단을 올라온 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통성명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조선 백자처럼 하얀 얼굴과 짙은 눈썹. 유려한 얼굴선이 부드러운 꽃잎처럼 다정한 분위기를 흘렸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국서 마마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