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나는 E틈에 낀 I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텐션을 따라잡으려 노력했지만 겉도는 티를 감출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아이시스가 슬쩍 끼어들어 주었다.
“영애들은 #궁중암투를 배틀로 하기로 합의 봤거든요. 동쪽 방 영애 8명이랑 서쪽 방 영애 6명이랑 나눠서 한대요.”
내가 아는 배틀은 약자 지목 배틀뿐인데. 댄스 배틀을 하는 건가?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하이디 영애가 상기된 얼굴로 조잘조잘 경연 문화를 설명해 줬다.
“옛날에는 미인을 무예, 춤, 노래, 서예와 시로 평가했대요. 그래서 1차는 궁수 대결, 2차는 가무 대결, 3차는 서예로 삼세판을 해요.”
요약하자면 1차는 활쏘기를 자랑하고, 2차는 춤과 노래로 기예를 뽐내고, 3차는 붓글씨로 제 문학적 소양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영애들은 삼세판 게임에 육예(六藝)가 알차게 담겨 있다며 여름국 경연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호기심이 들었다.
“근데 굳이 경연에 참가해야 하나요?”
사실 키워드가 있어도, 굳이 싸울 필요는 없잖아.
빙의해 보니 이미 후궁이었다든지, 간택이 끝난 상황에 빙의해 어쩔 수 없이 입궁하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후궁 견제는 본인 의지인데 영애들끼리 서로 싸울 필요가 있나?
게다가 암투는 권력 다툼.
후궁의 권력은 황제의 총애로 이뤄지는 게 기본이고.
영애들 황제 영애랑 이어질 생각도 없잖아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시면 좋지 않나요. 이렇게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맛있는 한식도 드시면서…….”
조심스레 평화를 제안하자 그녀들의 낯이 무섭게 굳어졌다.
“저희도 처음에는 다 같이 잘 지내려 했죠.”
노란 당의를 입은 영애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하늘 아래 두 명의 조강지처가 존재할 수는 없는 법.”
“맞아요. 어떻게 주제도 모르고 감히 그 자리를 욕심내는지.”
푸른 당의를 입은 영애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들의 말을 들으며 움찔했다.
“……영애들 황후가 되고 싶어서 싸우시는 거예요?”
내 말에 투덜거리던 영애들이 침묵했다.
누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했네요. 사과합니다.”
“우리 흥분하는 습관 고쳐야 하는데, 이거 다 같이 사과해요.”
여덟 명의 영애들이 갑자기 꾸벅 내게 고개를 숙여 나는 당황했다.
도무지 이들의 대화 스타일을 따라갈 수가 없다.
“로맨스에 미쳐서 평화 질서를 먼저 깨트린 건 저쪽 영애들이거든요.”
고개를 든 하이디 영애가 한숨을 쉬며 충격적인 말을 했다.
“국서 자리를 욕심내는 건 우리가 아니라 희빈이에요.”
희빈?
내가 아는 희빈은 장희빈뿐인데.
“희빈이 누군가요?”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그때 푸른 당의를 입은 후궁 영애가 치마폭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톡톡 화면을 몇 번 건드린 영애가 커뮤니티 화면을 띄우고 내게 건넸다.
“영애가 직접 보고 판단하세요.”
***
제목 : 남주가 둘 다 흑발일 때 찐남주는 누구일까? [49]
『사실 찐남주가 누군지는 확실하거든?
근데 현실 부정하면서 끝까지 서브남주를 찐남주라고 우기는 영애들이 있어서 보여주려고 씀^^
영애들이 보고 판단해줘.
*객관성 잃을까 봐 음슴체로 팩트만 올림. 반말 주의 부탁.
A 아포스타시아 팔루스
품계: 국서
집안: 개국공신 가문이자 유서 깊은 명문가 자제
커리어:
16살 - 장원급제
17살 - 기사관(현생으로 치면 국가기록원 공무원) 정6품
20살 – 도승지(현생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 정3품
23살 - 국서로 정계 은퇴
현재 – 국서 0품 탑티어
평판: 인성이 좋아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 옆에 붙음.
외모: 흑발 장발, 청순미남, 지적인 온미남, 명문가 자제 특유의 고급미, 미소에서 묻어나오는 햇살미,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B 오리온 시두스
품계: 희빈
집안: 가을국 혼혈민 보호구역 *평민*
커리어:
15세 - 신분 속이고 궁에 위장 취업했다가 가을국 혼혈인 거 밝혀지고 사형 선고받음, 황제 영애 덕에 도망쳐서 목숨 건짐 (어휴... 민폐 절레절레)
19세 - 남부 마물 토벌하면서 조금, 아주 조오오오금 유명해짐
20세 – 황실에서 토벌 성과 치하하려 불렀는데, 눈치 없이 황제랑 대련하고 싶다고 소원 빔. 아픈 황제 영애 누르고 1등 먹어서 일검 됨(황제 영애 일검 칭호 스틸 실화임;; ㄷㄷ)
22세 - 솔직히 무술 실력은 여름국 최고임. 그래서 황제 영애가 일 시키려는데, 대신들이 가을국 혼혈은 벼슬 품계 가지는 거 불가능하다고 반대해서 황제 영애가 화나서 대뜸 희빈으로 삼아버리고 품계 주심(미친 운빨 ㄷㄷ)
현재 – 희빈 정1품
평판 : 구림. 인성파탄. 남자 후궁 한 명밖에 없는 이유가 얘가 뒤에서 다 쓱싹해서 그렇다는 소문 있음(솔직히 소문이 그렇게 날 정도면 뭐 말 다 했지 ㅉㅉ), 눈치는 밥 말아 먹어서 울 폐하 영애 1검 칭호 뺏어 먹음, 그런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국서 자리까지 노리고 있음.
외모 : 흑발, 머리 짧음, 걍 봐줄 만하게 생김, 혼혈이라 눈동자 색이 옅은 금갈색임. 눈물점이랑 눈동자만 좀 갠춘. 희빈파 영애들이 섹시한 허스키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들으면 그냥 쇳소리에 가까운 거친 목소리임.』
┗ 대체 어딜 봐서 객관적이야; 누가 봐도 국서파가 쓴 글이잖아!
┗ 이런 영애들 때문에 국서마마도 꺼려짐;; 어딜 가나 악개들이 진입장벽이라니까;;
┗ 희빈 후려치기 미쳤네 ㄷㄷ 봐줄 만하게 생김???? 돌았네????? 나 태어나서 그렇게 완벽한 고양이상 미남 처음 봤는데??
┗ 와, 희빈파 영애들 선댓 점령한 거 보게. 그래, 발이라도 빨라야 여론 조작 들어가지~ 수고요^^
┗ 희빈파가 아무리 날뛰어 봐야 어차피 남주는 국서마마♥
┗ ㅇㅇ 국서-희빈 롤에서 이미 게임 끝났음. 서브 남주보다 계급장 낮은 찐남주 보신 분? 응. 없죠.
┗ 뭐래? ㅇㅅㅇ;; 요즘 로판 트렌드 남주 신분 하향인 거 모름?
┗ 맞아! 찐남주 조건 1. 여주 만날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으면 안 됨 2. 여주보다 대의 중시하면 안 됨 ㅇㅇ 그러니 뭐다? 직급 낮고 폐하에게 24시간 헌신할 수 있는 울 희빈이 남주시다 ~^^
┗ 뭔 소리야;;; S급 헌터 놔두고 A급 헌터가 남주롤 따는 거 봄?
┗ 2222 이미 폐하 영애가 국서한테 조강지처로 1롤 주심. 여주 선택 = 게임 끝. 희빈파 망상 금지!
┗ 아 몰라!!! 어차피 남주는 희빈이야!! 어남희다!!
┗ 어남희 발음도 구려 ㅜㅜ 어남국은 발음도 이쁜데!
┗ 희빈파 영애들 너무해. 딱 봐도 희빈은 위험하잖아? 영애들 심박 좀 아찔하게 타고 싶다고 황제 영애를 팔아먹어?ㅜ-ㅜ
┗ 그니까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더니 희빈파가 딱 그짝이야. 황제 영애가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 저기요... 영애도 머리 검어요;
┗ 국서파들 맛알못이네 위험한 남주가 얼마나 재밌는데
┗ 222 #또라이남주의 맛을 모르는 국서파가 불쌍해요 ㅜ-ㅜ
┗ 원래 위험한 남주가 내 여주에게만 다정할 때 책갈피 들어가는 거거든요~.~
┗ 희빈파들 정신차려 ㅠㅠㅠ 볼 때나 재밌지 완벽한 [결]을 위해서는 국서 남주가 딱이라고ㅠㅠ
┗ 아니거든? 연상다정남 vs 연하집착남, 닥후죠~
┗ ㄴㄴ 닥전. 애새X 남주 극혐 절레절레
┗ 애… 애새X???? 우리 희빈한테 욕했어????? 영애 이름 까! 아니 지금 바로 누각으로 나와!!!!
┗ 어차피 곧 경연할 거잖아. 그때 봐 :P
치열한 남주 주식 견제의 현장.
연예인들의 연예인이 있다고 하던가.
여주들 사이에도 그런 이가 있었다.
여주들의 여주, 디아나 아이스타스 아르테미스.
여름국 황제 영애였다.
후궁 영애들은 디아나의 두 남주, 국서와 희빈을 보며 주식을 손에 쥐고 말았다.
말 그대로 안방 1열에서 직관하는 로맨스에 제대로 과몰입 한 거다.
제 주식이 휴짓조각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지아비의 배필로 주식 싸움이라니.
‘미쳤나 봐.’
이들의 궁중 암투는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심한 나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여름국 후궁 영애들 사이에 분파가 생긴 모양이다.
진심으로 서로를 견제하게 된 후궁 영애들은 매일 커뮤니티에서 익명 아닌 익명으로 싸우다 작년에 타협했다고 한다.
후궁끼리 삼세판 대결을 해서 찐남주를 정하기로.
그리고 다 같이 그 남주를 깔끔하게 밀어 주기로.
이건 황제 영애의 말도 들어 보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근데 참 어이없게도…….
재밌어 보였다.
두 존잘 남주가 펼치는 인현황후전이라.
여름국 영애들 무서운 사람이네.
이 재밌는 걸 자기들끼리만 보고 있었어.
“영애 다 봤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여덟 후궁이 눈을 빛냈다.
“영애가 볼 땐 누가 찐남주 같아요?”
“음, 제 취향은 국서긴 한데…….”
‘위험한 남자도 괜찮을 것 같네요.’라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후궁 영애들이 돌고래 소리를 내며 만세를 했다.
“영애 참 각막이네!”
“사람 볼 줄 아시는구나. 안 되겠다. 우리 뉴비 영애 만난 기념으로 뒤풀이 나갑시다. 제대로 영업, 아니 대접해야겠어요.”
“좋습니다! 다 같이 환원강에 고기 먹으러 갑시다!”
“갑자기 외출이요? 아이시스 영애, 이게 무슨…….”
그러나 아이시스는 내가 본 모습 중 가장 행복한 얼굴로 후궁 영애들과 함께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 밤새 마시는 거예요! 신전에 다 같이 새벽 기도 간다고 연락해 둘게요. 오늘 다들 집에 못 들어갈 줄 알아요!”
“와아! 성녀 여주 찬스다!”
“다 같이 국서 마마 궁으로 허락받으러 갑시다.”
“영애 얼른 가서 버프 써 줘요. 우리 황실 여인들은 조국의 안녕을 위해 새벽 기도 나갈 준비가 됐습니다.”
“좋아요. 바로 갑시다!”
아이시스 영애…… 성녀 버프를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겁니까?
흐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영애들이 분주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갑자기 하이디 영애가 고개를 저었다.
“영애는 먼저 황제 영애한테 다녀와요. 오늘 온종일 식사도 못 했다는데, 백숙 좀 가져다주세요.”
“아, 네네.”
아 맞다, 우리 디아나 영애가 일하는 동안 나만 너무 즐거웠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 답했는데 하이디는 왜인지 미안한 듯 제 고운 눈썹으로 팔자를 그렸다.
“아이시스 영애는 몇 번 궁에 와서 궁인들이 깍듯한데, 영애는 처음이라 그래요. 디아나한테 총애받는 모양 갖추면, 궁에 머무는 동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한 번만 다녀오세요.”
다른 후궁 영애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좀 귀찮아도 하루 고생하면 일주일이 편하답니다.”
“궁인한테 삼계탕 새로 준비해 두라 할 테니까, 황제궁에 가서 궁인들한테 얼굴 비추고 바로 환원강으로 와요.”
푸른 당의를 입은 후궁이 내게 주황색 스크롤을 건넸다.
“고기는 식기 전에 먹어야 하니까요.”
나는 얼결에 스크롤을 받고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