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검은 그릇 바깥으로 빼꼼히 빠져나온 탐스러운 닭다리가 유혹적이었다.
한 달 만에 마주하는 한식에 침샘이 자극됐다.
당장 저 쫀득한 닭 껍질과 통통한 살을 입안 가득 채워 넣고 싶었다.
그때, 하얀 비단에 푸른 물망초가 수놓인 당의를 입은 영애가 우아하게 손을 들었다.
“경은 잠시 나가 있게.”
“하오나!”
누각에 서 있던 호위 무사가 후궁의 눈길에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 노려봤냐는 듯 금세 눈웃음을 지었다.
매화처럼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두 분은 폐하께서 직접 초대한 귀인. 경은 지금 폐하의 손님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건가?”
폐하를 끌어들이며 묻자, 호위 무사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벌은 됐으니 나가 있게.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막아 두고.”
그 말에 침묵이 시작됐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망을 보라는 뜻처럼 들렸다.
그때, 다리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여인이 옥가락지를 낀 하얀 손가락을 들었다.
까닥까닥.
손끝을 몇 번 휘던 그녀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오지 않고 무엇 하십니까?”
나는 엉거주춤 다가가 그녀들의 앞에 놓인 방석 위에 앉았다.
뭐지.
3인칭 메시지를 보내던 모습과 다른 위엄 있는 분위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사실 분위기 탓만은 아니었다.
그녀들의 외형 때문에 허리가 절로 굽혀졌다.
뭐랄까…….
조상님들을 뵙는 기분이랄까.
눈을 마주치면 존경과 예를 담아 삼강오륜을 읊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조신히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손등만 바라봤다.
“그래요. 봄국에서 오셨다고요.”
“예.”
“폐하와 겨울국에서 연을 트셨고요.”
“……예.”
잠시 세상이 멈춘 듯 침묵이 흘렀다.
이 상황은 마치 새로 들어온 후궁에게 텃세를 부리는 모습.
나만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아니었다.
띠링.
[메이저 에피소드 ‘권세 높은 여조에게 견제받는 캔디 여주’가 탐지되었습니다.]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 보상으로 1캐시가 적립됩니다.]
시스템도 인정한 공식적인 불편함이었다.
영애들에게도 캐시가 떨어진 모양인지, 순간 그녀들의 냉정한 낯이 움찔했다.
미묘한 떨림을 분노로 여긴 궁인 엑스트라들이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궁인의 불안을 느낀 듯 상석에 있던 후궁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궁인들을 달래듯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너희들도 나가 있거라.”
“예.”
기다렸다는 듯 다리에서 대기하던 열댓 명의 궁인들이 후다닥 뒷걸음질을 치며 사라졌다.
워낙 처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몇 분 후 완전히 발소리가 사라졌을 때쯤 나지막한 탄성 소리가 들렸다.
“흐읍.”
고개를 드니 여덟 명의 후궁 영애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옆에 있던 영애들의 팔을 잡고 흔들거나, 퍽퍽 치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입을 꽉 다물었지만, 그 틈을 비집고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요즘 영애들은 대부분 AI 무제한 연동권을 사용한다고 하던데, 그녀들 또한 자신들의 단체방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들이 좀 무서워져서 슬쩍 아이시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영애, 이분들 괜찮은 분들 맞죠?’
한참 뒤에 온 답변이 미적지근했다.
[아이시스: 음...... 심성은 고우세요.]
꼼질꼼질 뒤로 몸을 빼며 누각에서 도망치려 하자 아이시스가 손을 뻗어 내 등을 꾹 눌렀다.
[아이시스: 닭다리만 보고 참아요.]
울상을 지으니 아이시스가 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시스: 저기 종류별로 김치도 준비해놨잖아요. 영애가 언제 수라간에서 담근 궁중 김치를 먹어보겠어요. 버텨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타임라인.
10년 뒤에나 현생으로 돌아가 김치를 맛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꾹 눌렀다.
어느새 흥분을 다스린 후궁 영애들이 다시 차분한 낯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붉은 해당화가 그려진 치마를 입은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미안해요. 서로판 영애는 오랜만이라. 잠시 비주얼 충격을 받아서 저희가 추태를 보였네요.”
하늘색 당의를 입은 여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 여주랑 천사 여주라니, 각막에 할렐루야였어요. 제 안의 음란마귀가 엑소시즘 당하는 소리였으니 이해해 주세요.”
……그런 우아한 얼굴로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그때, 가장 뒤쪽에 앉아 있던 민들레꽃 당의를 입은 후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실몽실한 하얀 치마가 그녀의 사뿐한 걸음을 빛내 주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흑단처럼 고운 머릿결, 단아한 얼굴선. 흑백으로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하얀 피부.
미인도처럼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 명화가 걸어온다.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짙어졌다.
분명 아름다운 언니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쪽 영애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지라 솔직히 겁이 났다.
꼼질꼼질.
소심하게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옆으로 도망쳤는데, 그녀가 내 옆에 앉으며 와락 팔짱을 꼈다.
“영애는 이름이 뭐예요? 직업은요?”
갑작스러운 인적 사항 조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였다.
“나는 하이디예요. 혹시, 아이시스 영애한테 들었어요?”
“아…….”
‘들었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려는 찰나 하이디 영애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시스를 쳐다봤다.
“뭐야, 영애한테 내 소개 안 해 줬어요? 하이디 섭섭…….”
숟가락을 들던 아이시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하이디 영애, 그 이상한 3인칭 화법 쓰지 말랬죠.”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영애들 사이에서 내 이름을 각인시킬 수 없다고요!”
그녀는 묘한 관종 느낌을 내며 볼을 부풀렸다.
하이디의 시선이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우리 천사 영애 이름이 뭐라고요?”
“아, 제 이름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입니다.
그런데 여름국 영애들은 캐릭터에 한민족의 DNA라도 새겨진 모양인지 성격이 급했다.
내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또 질문이 쏟아졌다.
“영애 정말 #천사여주예요?”
“와, 수인 영애 이후로 #인외여주 처음 보네요. 영광이에요! 우리 악수부터 해요. 영애.”
“천사는 고증 제대로 했다. 금발에 푸른 눈에. 영애 날개는 어디 있어요?”
갑자기 내 옆으로 몰려든 영애들이 나를 인형 다루듯 만지작거리며 말을 쏟아 냈다.
갑작스러운 캐릭터 변경에 나는 도리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요. 저는 그냥 봄국 남작 영애예요.”
“아하, 귀족 영애구나. 그럼 직업은 없어요? 투잡은 안 해요? 뭔가 사업 잘하게 생겼는데.”
“그러게. 화장품 사업이나 패션 사업하면 딱 맞겠다.”
취향은 달라도 같이 웹소설을 덕질해서 그런지 여름국 영애들은 익숙한 말을 쏟아 냈다.
생각이 비슷하니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았다.
말을 좀 들어 주신다면 말이다.
슬프게도 그들은 그저 본인의 말을 쏟아 낼 뿐,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인원이 많다 보니 발언권 잡기가 쉽지 않아 대사 욕심이 강해진 것 같다.
아이시스는 익숙한지 인사도 생략하고, 조용히 식사하고 있었다.
부러운 눈으로 닭다리를 뜯는 아이시스를 쳐다보자, 아차 싶었는지 푸른 당의를 입은 영애가 차려진 음식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영애, 일단 밥부터 먹어요. 한식은 처음이죠?”
백숙과 다양한 김치들이 눈에 담기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흑, 네. 감사합니다.”
후궁 영애들은 내가 한식을 처음 먹는다는 걸 눈치챘는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고기부터 한 입 먹어 봐요.”
앞 접시에 고기를 발라 주고.
“아니야, 식기 전에 국물부터 한술 떠요.”
국물도 크게 떠 주고.
“무슨 소리예요. 빙의 후 첫 한식인데 김치부터 먹는 게 국룰이지.”
가위로 겉절이 김치와 순무를 먹기 좋게 잘라 숟가락 위에 계속 올려 주었다.
나는 영애들이 올려 준 음식들을 토 달지 않고 모두 받아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역시 한식이 최고다.
“너무 맛있어요…….”
“영애, 파전도 좋아해요? 그것도 해 오라고 할까요?”
“술은 먹어요? 동동주 한잔할래요?”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고개만 끄덕이는데 알람이 들렸다.
띠링.
[궁중 요리사가 만든 그 맛 그대로 집에서 즐기세요. ㅇㅇ 간편 삼계탕.]
“어머, 오랜만에 광고 떴네요!”
“오, 캐시 득템!”
그때, 녹색 당의를 입은 영애가 짝짝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오늘 메뉴 선정 누가 했어요?”
“저기 숙원 영애가 했어요.”
“자, 다 같이 박수박수박수! 우리 숙원 영애의 탁월한 메뉴 선택에 감사 인사 하고 갑시다.”
그 말에 붉은 당의를 입은 후궁이 가슴에 손을 얹고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 영광을 폐하께 돌립니다. 우리 영애들 모두 캐시 길만 걸으시길.”
“어머~ 우리 숙원 천상 현모양처시다~.”
“오늘은 이 시대의 현모양처 숙원의 처소로 폐하를 양도하겠습니다.”
“저도 양도합니다.”
“근데 이건 폐하 생각도 들어 봐야…….”
“폐하에게 거부권은 없답니다.”
그들만의 개그 코드인지 후궁 영애들이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남편을 양도하는 문화라니…….
아니, 우리 폐하는 남편도 아니잖아!
혼란스러운 여름국 내명부 문화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응? 영애 표정이 왜 그래요? 맛이 별로인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시끌벅적하던 영애들이 입을 다물었다.
내 말에 집중해 주듯.
나는 괜한 오해를 받을까 망설이다 질문했다.
“영애들은 #궁중암투 키워드 때문에 궁에 들어왔다고 들었거든요. 근데 사이가 좋아 보여서요.”
남편(?)도 양도하고 말이죠.
“아아, 난 또 뭐라고. 나름 우리도 궁중 암투 열심히 하고 있어요!”
“맞아요. 에피 착실히 쌓고 있다고요.”
영애들이 뿌듯하게 웃었다.
엥? 이게 궁중 암투라고?
내가 아는 거랑 너무 다른데?
고개를 갸웃하자 동로판에 조예가 깊어 보이는 영애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원래 후궁 싸움은 각개전투가 아니라 집단전이죠.”
그녀는 시선을 후궁 처소로 미끄러뜨렸다.
“사실 후궁 영애가 여섯 명 더 있어요. 내일은 볼 수 있을 거예요. 서쪽 방 후궁 영애들은 다음 주에 있을 연등 축제 점검차 환원에 나갔거든요.”
“맞아요. 그쪽이랑 우리랑 올해 경연(競演) 준비도 하고 있어요.”
“경연이요?”
“아무리 엑스트라라지만 우리 싸움에 궁인들이 너무 고생하는 거 같아서 저희끼리 평화롭게 싸울 방법을 찾았죠.”
평화롭게 싸운다니 그것만큼 이질적인 단어도 없다.
그러나 진심인지 그들은 뿌듯해하며 서로 박수를 쳤다.
“그것도 우리 숙원이 아이디어 냈죠? 진짜 아이디어 뱅크야! 박수박수.”
붉은 당의를 입은 영애가 다시 한번 일어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영광을 경연에 참가하도록 영감을 준 서쪽 방 영애들에게 돌립니다.”
또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하며 그녀들이 웃었다.
웃음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당파를 나누신 것 같다.
일단 난 이 당파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