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런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럼 후궁 영애들은 어떻게 해요? 디아나를 남주로 선택할 수는 없잖아요.’
[아이시스: 좋은 남주 만나면 디아나가 바로 이혼해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여름국은 데뷔탕트나 연례 무도회 행사가 없어서, 남주를 찾으려면 황궁에 있는 게 나아요. #능력남주나 #귀족남주는 벼슬길 들어서 궁에 자주 오거든요.]
[아이시스: 가끔 사신으로 #외국인남주도 방문하는데, 황실 연회는 후궁 여주들이 진행해서 여러모로 집에서 지내는 거보다 궁에 들어와 있는 게 남주 탐색하기 더 좋아요.]
아이시스는 여름국 황실에 대해 설명해 줬다.
내명부 품계에 따라 후궁의 직급이 나뉘는데, 그에 따라 담당하는 국내외 행사와 외교 업무도 달라진다고 했다.
여름국에서 후궁은 의전 공무원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아이시스가 키득키득 웃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녀는 깍지 낀 손가락 위에 턱을 올리고는 요염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이시스: 못 믿겠으면 직접 알아봐요. 데이지 영애는 마음만 먹으면 후궁이 될 수 있잖아요?]
디아나뿐만 아니라 아이시스도 종종 저렇게 후궁 드립을 치며 나를 놀렸다.
눈을 치켜뜨자 아이시스가 말을 돌렸다.
[아이시스: 어쨌든 #수인여주는 동물들과 소통하는 버프가 있으니까 조심해요. 근처에 있는 쥐나 벌레가 이상한 말을 전할지도 몰라요.]
나는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하며 그녀의 조언에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남주를 선택하면, 디아나가 이혼해 준다니.
이거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불륜인가…….
아니, 아무리 정략 관계라지만, 애초에 여주들이 부부라는 것 자체가 이상해!
남주를 두고 싸울까 봐 영애들의 타임라인을 겹친 AI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새삼 남주 선택이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다.
그래도 AI가 신경 쓰는 이유도 이해했다.
솔직히 남녀관계에 감정 소모가 없을 수 없잖아.
나는 노트북을 보던 시선을 들어 벽을 쳐다봤다.
벽에 옷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일어나 로브로 다가간 나는 가만히 그 하얀 천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천 자락이 손끝에 감기자, 차가운 겨울 공기가 코를 스치는 듯했다.
그때, 아이시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애, 미련 금지.”
나는 로브를 만지작거리며 아이시스를 돌아봤다.
“그치만 완전 제 취향이었는데……!”
아이시스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 남주 동료들이 영애를 죽이려 했다면서요.”
우리도 마왕을 죽이려 하니까 샘샘 아닐까요?
하지만, 눈치 없이 그 말을 하는 대신 조용히 속으로 반항했다.
“다 떠나서 영애 마족들이랑 말도 안 통하고 거기서는 버프도 못 쓰는데, 서사나 제대로 쌓겠어요?”
“말 안 하고 조용히 눈빛으로 대화할 수도 있잖아요.”
“영애가 선택한 남주 시나리오가 30년짜리면 어떡하려고요? 30년 동안 침묵할 거예요?”
아이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 없는 전개라니. 영애 꼴찌 확정이에요.”
아이시스가 다시 물었다.
“랭킹은 신경 안 쓴다고 쳐요. 근데 영애 20억도 포기할 수 있어요?”
“포기라니요. 제가 거기서 [결]을 칠 수도 있잖아요.”
아이시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영애 말대로 마족 남주에게 완성된 시나리오가 내장되어 있다고 가정해요. 그런데 그 시나리오가 영애한테 매끄럽게 플레이 될까요? 영애는 사계국 유저인데?”
“…….”
“마족 지대 버그율이 94%가 넘는다면서요. 사계국 유저한테 마족 남주 시나리오가 버그 없이 온전히 이관될지 전 모르겠네요.”
모르겠다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아이시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결]을 절대 못 칠 거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나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끼익.
나무 바닥을 끄는 의자 소리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데이지.”
내게 다가온 아이시스가 내 팔을 쓰다듬었다.
팩트로 조곤조곤 팰 때와 달리 다정한 말투였다.
“내 친구를 그런 무서운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요.”
아이시스가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랑 같이 사계국에서 재밌게 놀다가 [결] 완성해요.”
토닥토닥, 어깨를 쓸어내리는 온기가 포근했다.
“버그는 추억으로 남기고.”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내린 채 자개장 위에 올려 둔 투명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유리 상자 안에서 낡은 이동 스크롤이 스르륵 움직였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나도 보답을 하고 싶었는데. 다시 보고 싶기도 했고.
마지막에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찡그렸다.
……뭐지, 나 #금사빠인가.
요하네스랑 나랑 뭐가 있었다고.
그저 그의 찬란한 용안과 다정함이 있었을 뿐,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
특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근데 왜 아이시스의 말을 들으니 실연한 것처럼 기분이 우울해지는 걸까.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깊은 한숨이 새나왔다.
난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영애, 삼계탕 먹고 싶죠?”
“…….”
피해 의식인가?
주접 여주에게는 심리 묘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시스템의 강압이 행해진 기분이 들었다.
대답 없이 찜찜한 눈으로 아이시스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삼계탕 싫어해요?”
“……아니에요.”
#햇살여주에게서 강제로 피폐함을 거둬 가는 햇살 바이러스처럼, 아이시스는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연동 메시지를 받았던 모양인지, 노트북을 들고 와 메시지 창을 보여 주었다.
“방금 여름국 후궁 영애한테 메시지 왔거든요. 같이 저녁 먹자네요.”
[하이디: 띵동♥]
[하이디: 성녀님 그동안 잘 지냈어요? 참고로 하이디는 아이시스 보고 시포서 잘 못 지냈어요!(부끄)]
장희빈도 울고 갈 애교스러운 메시지에 움찔했다.
[하이디: 우리 폐하 또 집무실 셀프 감금 들어가셨던데, 영애는 잘 챙겨주고 있나요? 식사는 했어요?(웃음)]
[하이디: 하이디는 영애가 너어어어무 걱정돼서 참지 못하고 DM 보내요~(합장)]
“……3인칭 화법은 여름국의 궁중 화법인가요?”
“아뇨. 원래 이런 분이세요.”
여름국 영애들도 캐릭터 있으시네.
여긴 정말 다양한 캐릭터가 공존하는 곳이구나.
[하이디: 저희 화월궁 계곡에 누각 만든 기념으로 능이백숙 먹기로 했는데에에, 저녁 안 먹었으면 영애도 올래요?(속닥속닥)]
[하이디: 맞다, 후궁 처소에 한 분 더 오셨다면서요. 혹시 그분도 영애예요? 그분도 오시면 말해주세요. 하이디가 책임지고 2인분 세팅해둘게요!]
“영애, 갈 거죠?”
아이시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래요. 감성이 밥 먹여 주나. 서사가 밥을 먹여 주는 거지. 여긴 [결]만 치면 20억을 주는 니까.
그리고 [기]-[승]을 끝내려면 아직 4만 자나 글자 수가 더 필요했다.
남주 선택은 나중에 다시 고민해 보자.
나는 만지작거리던 유리 상자를 내려 두고, 내 [기]-[승]에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녹음과 붉은 기둥이 번갈아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흘긋 정원을 바라보았다.
푸른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숲세권을 너머 숲을 품은 고궁이라.
역시 동로판 최고 권력자가 사는 곳은 풍수지리부터 다르구나.
집값을 가늠해 보려는데 궁인이 내 상념을 거두어 갔다.
“예서부턴 다리를 건너셔야 합니다.”
급히 초점을 맞추니 거대한 연못이 보였다.
연못 뒤로는 드높은 산과 쏟아지는 폭포가 있었다.
쏴아아아.
시원하게 쏟아진 계곡물이 잠시 연못 구덩이에 고였다가, 정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내려갈까요?”
아이시스의 말에 나는 그녀를 따라 돌계단을 내려왔다.
“와.”
절로 탄성이 나왔다.
아래로 내려간 시야 때문인지 무릉도원 같은 정경이 한눈에 담겼다.
연못 주변으로 심어진 버드나무와 살구꽃 나무.
속세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누각에 닿을 듯 길게 늘어진 버들잎과 비처럼 흩날리는 꽃잎이 발처럼 이따금 누각을 가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그림의 화룡점정.
여덟 명의 미인들이 선녀처럼 누각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구름으로 빗은 듯 풍성하고 보드라운 윤곽과 불상처럼 섬세한 이목구비.
가채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 있어 황실 여인임에도 후궁들에게서 묘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사극을 좋아했던 나는 그녀들을 보다 눈을 살짝 찌푸렸다.
저건 기생이 하던 머리인데? 궁중 여인들은 반듯하게 대칭된 가채 머리를 해야 하지 않나?
게다가 허리까지 내려온 짧은 당의에는 화사한 꽃이 수놓여 있다.
드라마에서 봤을 때는 분명 가운데에 봉황이나 용 같은 동물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말이다.
[여름국 세계관은 한국의 의식주 문화를 차용하지만, 제작진이 창작한 가상의 세계입니다. 현대 요소를 가미한 창의력이 발휘된 디자인으로…….]
알겠어요. 너무 예뻐서 감탄한 거예요.
또 울컥한 담당자님이 속사포처럼 세계관 설명을 시작하기에 뚝 잘라 냈다.
하긴, 한국 문화를 차용한 퓨전 세계관은 다양한 시도를 해도 좋지.
세계에서 한국 콘텐츠 많이 보니까 이 기회에 한국풍으로 예쁜 비주얼을 각인시키면 좋잖아.
K-POP처럼 동양풍 말고 한국풍으로 불리는 콘텐츠 영역이 유명해지면 좋겠다.
여름국 후궁 영애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며 그런 국뽕 어린 생각을 했다.
영애들의 손가락에 끼워진 가락지나 부채 같은 소재 하나하나도 예술이었다.
그 영롱한 빛에 눈이 멀 뻔했지만, 다행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내가 여름국으로 온 이유.
모락모락 김을 내는 뚝배기가 시선을 잡아챘다.
삼계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