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58화 (59/208)

58화.

“어때요? 잘 보여요?”

아이시스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르코 폴로 영애는 진실을 적은 거예요.”

그러나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이시스가 되물었다.

“……정말로 주막에서 로제 떡볶이를 판다고요?”

말하기 무섭게 아이시스는 자괴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몰입감 확 떨어지네. 로판 세상에서 떡볶이가 말이 되냐고. 그것도 로제…….”

아이시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제 미간을 문질렀다.

나는 그런 아이시스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영애, 저는 오늘부터 빙의물에서 몰입감을 따지지 않기로 했어요.”

“왜요?”

“언제 어디로 빙의할지 모르잖아요. 특히 내가 읽은 책 속으로 빙의할 확률이 높으니까 앞으로 열린 빙의물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이시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할 작품 분위기까지 걱정해야 한다니. K-로판 독자로 살기 힘든 세상이네요.”

입꼬리를 씰룩이던 나는 0점 준 영애들을 떠올리다 흠칫했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싹 사라졌다.

“……근데 점수 따라 음식이 블라인드 되는 거면 0점 준 영애들은 여름국에서 어떻게 식사해요?”

“아, 0점 줘도 전통 음식은 먹을 수 있대요. 궁중 요리나 나물 같은 음식은 동로판에서도 많이 나오니까.”

“그럼 0점 설정했어도 괜찮겠네요. 다행이다!”

“네. 현생 못 잊은 영애들이 빙의해서 현대 음식 찾는 거 있잖아요? 그 설정만 못 가져가는 거죠.”

“별거 아니었네요. 현대 음식 좀 못 먹으면 어때요! 전통 음식도 맛있잖아요.”

“……10점 준 영애가 그런 말 하면 되게 얄미운 거 알죠?”

“죄송해요. 제가 먼치킨 설정은 처음이라 겸손하지 못했네요.”

“아니다, 영애는 그래도 돼요. 미안해요. 내가 사과할게요.”

내 안쓰러운 버프를 떠올렸는지 갑자기 아이시스가 사과했다.

아니, 사과하지 마세요. 난 지금 행복하단 말이에요!

현대 한식이라니.

손가락이 접신이라도 한 건지 계속 내 빙의 생활을 완벽하게 이끌고 있다.

여기 온 김에 최대한 많은 현대 한식을 먹고 돌아가야지.

나는 히죽거리며 여름국 맛집을 검색했다.

인기 여행지라 그런지 게시물이 참 많았다.

무려 283개가 검색됐다.

이걸 언제 다 읽지.

추천글부터 읽을 생각으로 조회수 순으로 글을 정렬했다.

무릇 이유 없는 대중픽은 없는 법.

그런데 1페이지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글이 있었다.

제목: 한식 때문에 여름국으로 시집갔다가, 파김치부터 나박김치까지 다채롭게 김장 한 썰 (#시월드 #막장드라마 #킬링타임) [73]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게시글을 읽다 아이시스에게 물었다.

“영애, 여기에 #시월드 키워드도 있어요?”

“네, 그 키워드 #회귀 #가족복수극이랑 세트일걸요? 사이다 키워드라 선호 키워드로 설정한 영애들이 꽤 있더라고요.”

빙의 6년 차라 그런지 아이시스는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아이시스에게 내가 읽던 게시글의 링크를 보냈다.

“이거 #시월드 영애가 올린 글인데 보셨어요? 필력이 엄청나시네요.”

“오, 재밌겠다. 읽어 볼게요.”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흘렀다.

뛰어난 몰입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중한 탓이다.

다 읽고 나니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마침 아이시스도 다 읽었는지 기막힌 한숨을 토했다.

“이런 자식은 갱생 불가죠.”

나는 그녀의 노골적인 비난에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후회남도 정도가 있는데 이 남주는 선 넘었어요.”

아이시스와 나는 여름국으로 시집 간 봄국 영애의 시집살이 설을 읽으며 분노했다.

남주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영애의 남편은 시어머니가 배추 백 포기를 주문하는 것을 보며 수육과 겉절이를 같이 먹으면 맛있을 테니 고기 10근을 사 오겠다며 나갔다고 한다.

영애의 손맛이 최고니 동생네 부부도 불러오겠다는 명언까지 덧붙이며.

“이 남주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심지어 수육도 우리 영애가 삶았잖아요.”

“그러니까요. 영애 너무 착하시다. 깍두기 담글 시간에 저 남주를 담갔어야지.”

아이시스가 혀를 쯧쯧 차다 판결을 내리듯 오른손을 들었다.

“시월드 영애의 이혼에 동의합니다.”

“받고, 연하 벤츠남과의 재혼을 승인합니다.”

짝. 영애와 나는 명작 대사를 인용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래서 덕질 메이트가 중요한가 보다.

매 순간순간이 #킬링타임.

시간 낭비를 하는데도 즐겁네.

책임질 식솔(?)이 없는 성녀와 남작 영애는 아주 한가했다.

마왕의 동면지를 발견한 지 이틀이 지난 지금.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황태자와 공작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러 본인 집무실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같이 온 수하들의 거센 요청에 끌려갔다.

하긴, 연말이면 한창 바쁠 때지.

회사를 경영하는 것도 아니고, 북부 영지나 제국을 경영하는 이들이니 오죽 바쁠까.

그러나 그것이 K-남주.

쉴 새 없이 일하는 것은 그들의 숙명.

나는 속으로 깊은 애도를 표하며 업무를 처리하러 돌아가는 북부 공작님과 가을국 황태자님을 동정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우리 디아나도 신하들의 거센 알현 요청에 여름국에 도착하자마자 집무실로 끌려간 거다.

아니 여주는 왜 끌려가는 거예요!

[#능력여주는 어쩔 수 없습니다.]

AI 담당자님이 오랜만에 내 생각으로 끼어들어 설명했다.

#먼치킨여주 #사업여주 #능력여주들은 남주 이상으로 바쁘다는 것.

능력 키워드가 잔뜩 담겼는데, 거기다가 #황제 키워드까지 가졌으니 우리 디아나 영애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주로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오지랖 넓게 세계관 최강 여주를 걱정했다.

그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았다.

나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사아아아.

그때, 창밖에서 들려온 바람 소리에 시선이 절로 움직였다.

하루아침에 계절이 바뀐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연못가에 자리한 가는 솜대들이 여름 바람에 살살 몸을 흔들고 있다.

여름국은 참 평화로웠다.

바람에 부서지는 수면이나 가느다란 잎사귀를 제외하면 움직이는 게 없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틀린 감상도 아니다.

수백 년 동안 그대로 자리를 지켜 온 고궁이니.

나는 둥근 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아이스타스 설정은 괜히 읽어서…….’

예쁘면 뭐 하나. 정작 이 궁을 선물받은 사람은 얼마 지내지도 못하고 정신을 놓았는데.

지금 내가 머무는 이곳의 이름은 화월궁.

아이스타스의 마지막 황제가 만든 궁이었다.

총애하던 후궁이 가장 좋아하던 꽃과 달 속에서 살길 바라 만든 궁이라고 한다.

낮에는 꽃을 보고 밤에는 물에 비친 달을 보라며 곳곳에 꽃을 피우고 연못을 만들었다.

그들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곱씹는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후궁도 아닌데 왜 화월궁에 있는 거지?

왕벌 환관이 쓸데없는 배려를 발휘하는 바람에 나와 아이시스는 후궁 처소에서 지내게 됐다.

“좋잖아요. 황성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황제랑 친한 게 최고예요. 다들 알아서 잘 챙겨 준다니까요?”

아이시스는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그런가요?”

아이시스의 말을 납득하려 애쓰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나는 평화로운 화월궁 정원을 보며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한참 뒤에 아이시스를 불렀다.

“아이시스 영애.”

“네?”

“후궁 처소에서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후궁으로 빙의하면 심심할 거 같아요. 황궁은 은근 할 일이 없…… 읍!”

아이시스가 다급히 손을 뻗어 내 입을 막고는 주변을 살폈다.

[1건의 메시지가 수신됐습니다.]

[AI 담당자 ON 상태로, AI 담당자 시스템과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둘밖에 없는데 웬 메시지?

그러나 아이시스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서 뭐라 묻지 못하고 바로 수신에 동의했다.

[아이시스: 영애, 말조심! 후궁 영애 중에 #수인여주도 있단 말이에요.]

고막을 파고드는 기괴한 단어에 눈을 찌푸렸다.

후궁 영애와 수인 여주 중에서 어느 단어에 먼저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이 들렸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아이시스: 여름국은 #궁중암투물을 선택한 영애들이 많아서 #후궁여주들이 꽤 있어요. 그래서 디아나도 어쩔 수 없었구요…….]

아이시스는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후궁 영애들이 #황제남주를 두고 서로 싸우게 될까 봐 AI가 아예 그 불행의 씨앗을 차단한 것이다.

나는 AI의 처세에 동의했다.

처첩 갈등을 즐기는 남자 캐릭터는 로판에서 엑스트라 외에는 담당할 역할이 없다.

또한 한 남주에게만 집착하며 싸울 경우 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유저들의 행복 역시 깨지게 되니 여러모로 #황제남주는 없는 게 나았다.

하지만 #궁중암투는 황성을 주축으로 벌이는 여주들의 싸움.

황제가 반드시 필요하긴 했다.

그래서 나온 AI의 해결안은 타임라인 중첩이었다.

유저의 설정을 관리하는 게 시스템이라면, 유저의 타임라인을 관리하는 건 AI였다.

AI는 키워드가 망가지지 않는 선에서 유저가 최대 행복을 누리도록 딱 맞는 빙의 타이밍을 계산한다.

그래서 AI는 #황제여주와 #후궁여주들의 타임라인을 겹쳐 평온한 #궁중암투를 진행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AI 담당자의 피셜이다.

여름국 전대 황제의 초상화를 보며 왜 나를 저 시대 후궁으로 빙의시키지 않았냐며 따지는 후궁 영애에게 AI가 직접 말했다 하니 의심할 여지없는 팩트다.

하지만 AI의 인애로운 배려에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디아나는 무슨 죄냐고!’

시스템이 키워드를 잘못 추가한 업보를 왜 우리 디아나가 책임진단 말인지.

분노하는 내게 아이시스가 웃으며 속삭였다.

[아이시스: 영애, 동정하지 말아요. 디아나는 황제예요. 여름국 최고 미남 2명이 디아나의 국서고 후궁이랍니다.]

……나도 황제 시켜 줘.

다음 생에는 아니, 다음 빙의에는 나도 황제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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