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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56화 (57/208)

56화.

성격 급한 알렉스는 내 숙소에서 나가자마자 대원들을 모아 바람이 이는 곳으로 갔고, 거기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밤이 된 순간 그들은 땅의 색이 묘하게 짙어진 걸 눈치챘다.

나무 하나 없는 드넓은 평지.

마치 썰물이 밀려간 자리처럼 일정 구역의 땅만 색채가 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성채의 그림자라는 걸 깨달았다.

마왕의 이능은 요하네스보다 뛰어났다.

그는 밤에도 제 성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빛이 모자란 탓인지 그림자는 숨기지 못했다.

나 혹시 지능을 숨긴 천재였던 걸까?

나도 몰랐던 #힘숨찐 키워드가 있었나 봐.

[유저의 키워드에 #힘숨찐은 없습니다.]

기가 찼는지 AI 담당자님이 단호하게 내 망상을 잘라 냈다.

‘아니, 사람이 혼자 망상 좀 할 수도 있지. 무안하게 왜 이러세요.’

꽁해진 나는 속으로 꿍얼댔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드디어 마왕 동면지 탐색대의 임무를 완수한 거다.

이제 봄국으로 돌아간다!

어깨춤이 절로 나와 자꾸만 팔이 들썩였다.

“성안에 들어갈 수 없다면, 성을 베어 버리죠.”

귓가로 박히는 충격적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는 고개를 들어 디아나를 쳐다봤다.

영애, 성을 벨 수 있는 버프도 있나요?

진짜 그런 버프가 있다면 봄국에 돌아가서 가서 통곡 좀 해야겠다.

차별이 심해도 이렇게 심할 수가 있나.

능력 없는 여주는 대체 이 험난한 로판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버프 빈부격차를 이리 격하게 설정한 걸까.

“……성을 베실 수 있습니까?”

엘런도 놀라웠는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데 왜 그런 의견을 내십니까.”

그녀답지 않은 영양가 없는 발언에 체이스 경이 안경을 고쳐 썼다.

디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자를 알고 있으니까요.”

헉, 황제 영애보다 더 검술이 뛰어난 먼치킨이 있던 거야?

“그게 누구입니까?”

같은 생각인지 엘런도 물었다.

“안 됩니다.”

그러나 삼검은 그가 누군지 아는지 디아나의 제안을 잘라 냈다.

하지만 디아나는 무시하고 답했다.

“대륙 제1검. 그자가 산을 베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동산도 산이라 하면 뭐,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검이 비꼬듯 끼어들었다.

“동산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언덕 아니었습니까?”

“맞죠. 동네 강아지가 묻어 둔 뼈다귀 찾는 것처럼 흙이나 좀 뒤집었지, 그걸 뭘 산을 벴다고 표현하십니까.”

그들은 대륙 제1검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 뒷담을 했다. 그러나 디아나가 한 번 쳐다보니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이 조용해지자 디아나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마왕이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아예 성을 통째로 베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들 그 대륙 제1검이라는 자가 누군지 눈치챈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할 수가 있나?

해답을 들었는데 왜 저래.

입을 달싹이던 엘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자는…… 폐하의 후궁이 아닙니까.”

“쿨럭.”

나는 사레가 들렸다.

후궁?

“게다가 제1검은 심성이 간악한 자입니다. 폐하가 부탁하면 대가를 요구해 올 겁니다.”

드라마 속 못된 새언니처럼 삼검이 후궁을 욕했다.

옆에 있던 새언니2 사검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일검이 힘을 보탠다면 청 정도야 몇 번이고 들어줄 수 있지.”

디아나는 가볍게 웃으며 제 안사람에게 겨눠진 시월드의 공격을 막아 냈다.

참된 부군상이었다.

아니다. 부녀라 해야 하나?

아무튼 다처다부제 혼란하다, 혼란해.

“근거지를 찾았으니 이제 방안을 찾을 때가 아닙니까.”

디아나는 결정한 듯 손으로 책상을 한 번 쳤다.

“다들 여름국으로 가시죠. 제가 일검을 설득하는 동안 그대들은 쉬면서 함께 출병 계획을 세우면 좋을 듯합니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봄국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곧 있을 프리마돈나 영애의 파티 티저도 감상하고, 비에른을 설득할 외박 서사도 만들어 둬야 했다.

무엇보다 따뜻한 내 방구석에서 며칠간 죽은 듯이 자고 싶었다.

그게 표정에 드러난 모양인지 아이시스가 메시지를 건네 왔다.

나는 워치 위로 반짝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이시스: 영애, 여름국 가기 싫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좀 쉬고 싶어서요.]

[아이시스: 여름국에서 쉬면 되죠. 여름국은 커뮤니티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관광지예요. 다른 영애들은 못 가서 안달인데 이게 웬 기회야. 서사 준비할 필요도 없는데 같이 가서 푹 쉬고 와요. 우리.]

곤란한 낯으로 거절할 말을 생각하는데, 끔찍하게 유혹적인 단어가 어두운 화면 속에서 반짝였다.

[아이시스: 여름국은 한식 먹는 거 알죠? 우리 추운 데서 고생했는데 따끈한 김치찌개랑 쌀밥 먹어요.]

김치찌개와 쌀밥?

지금 내가 뭘 들은 거람.

[아이시스: 여름국은 한식의 나라잖아요. 여름국은 궁중 투어하면 정통 한식 먹고, 시장 투어 나가면 현대 음식도 먹을 수 있어요.]

잠시 메시지가 끊기더니, 탄식 어린 메시지가 다시 수신됐다.

[아이시스: 아, 근데 패널티가 있어요. 영애 설문 조사했던 거 기억나요? 몰입감 항목이요.]

아이시스의 말에 몰입감 항목을 떠올렸다.

몰입감을 해치는 요소.

로판 작품에 나오는 현생 요소 수용 가능 범위 조사였다.

현대 물품, 현대 문화, 현대 음식.

세 가지 주제로 수용도를 조사했다.

수용도는 0점에서 10점까지 10단계로 강도를 표현할 수 있었는데, 생각하기 귀찮았던 나는 0점과 10점만 체크했다.

그리고 난 소설을 읽을 때 웬만하면 납득하고 보는 독자라 전부 10점을 주었다.

[아이시스: 5점 이상은 줘야 김치찌개가 보이거든요. 영애 5점은 넘죠?]

[네, 저는 몰입감 항목 다 10점 줬어요.]

잠시 메시지가 끊겼다.

몇 초 뒤 흥분한 아이시스 영애의 메시지가 수신됐다.

[아이시스: 10점? ……나 10점 체크한 사람 실물로 본 거 처음이에요.]

[아이시스: 점수에 따라 블라인드 강도가 달라지거든요. 0점 준 영애들은 현대 한식이 아예 안 보인대요. 3점 이상은 줘야 그나마 김치라도 먹고.]

[헉? 김치도 못 먹는 영애들이 있어요?]

[아이시스: 네. 슬프게도 고춧가루를 묻히지 않은 백김치만 나온대요.]

내 일도 아닌데 안타까웠다.

타임라인 긴 영애들은 N십 년을 살았다는데, 붉은 김치 없이 수십 년이라.

한국인에게는 사형 선고가 아닌가.

나는 공포를 느끼며 지난날의 내 손가락을 칭찬했다.

10점을 주다니. 이 검지가 빙의 생활 속 미각마저 책임지는구나.

[아이시스: 근데 10점이면 영애는 커뮤글도 확인할 수 있겠네요.]

[커뮤글이요?]

[아이시스: 전에 커뮤니티에 현생 음식 수용도 10점 준 영애가 여름국 여행 리뷰 올린 적 있거든요. 그때, 먹은 음식 사진들 올렸는데 사진이 블라인드 돼서 진짜다 가짜다 말 많았거든요.]

[대체 어떤 음식을 올렸길래 난리가 났나요?]

[아이시스: 5점이면 주점에서 떡볶이 주문할 수 있는데, 그게 궁중 떡볶이거든요. 이것도 감지덕지라 영애들이 투어 오면 꼭 먹는데 10점이면....]

머뭇거리는지 혹은 침을 삼키는지 잠시 텀을 두고 메시지가 들어왔다.

[아이시스: 로제 떡볶이도 먹을 수 있대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시스: 게다가 5점 이상 영애들은 삼겹살 먹을 때 기본 야채랑 기름장이 나오거든요. 근데 10점 영애는 양파채랑 그 고깃집 소스도 곁들여서 나온다는 거 있죠.]

흥분하지 마. 진정해.

벌떡 일어날 뻔한 했지만, 허벅지에 힘을 주어 간신히 앉았다.

이미 필기는 뒷전이었다.

아이시스는 성녀면서 악마처럼 유혹적인 단어를 계속 내 머릿속에 주입했다.

10점 영애가 커뮤니티에 올렸다는 치명적인 메뉴들이 맹독처럼 뇌리를 파고들었다.

보쌈과 족발, 순대 곱창과 볶음밥, 제육볶음, 김치찜.

메뉴들이 머릿속에 영롱히 그려졌다.

내가 한식에 이토록 진심이었나.

봄국이고 뭐고 지금 당장 스크롤을 찢고 여름국으로 가고 싶었다.

[아이시스: 영애, 우리 여름국 가면 1일 5식 하는 거예요. 알겠죠? 제1검 고집 세서 아마 설득 오래 걸릴 테니까 적어도 일주일은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제1검 씨, 누군지 모르지만 의지박약이네.

일주일이라니. 한 달은 버텨야지.

나는 이름 모를 여름국 후궁의 끈기를 비난하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디 데이지는 싫습니까?”

디아나의 실망 가득한 목소리에 놀라 퍼뜩 시선을 들었다.

“지내기 편하게 최선을 다할 테니 한번 방문해 보시죠.”

여름국에 가자고 설득하던 타이밍에 내가 고개를 저은 모양이다.

나는 얼른 이마를 바닥에 붙이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제가 거절을 하겠습니까? 여름국에 가게 되어 영광입니다.”

디아나가 밝게 웃었다.

“그럼 저는 먼저 이동하겠습니다. 내일 오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둘 테니 그쯤 와 주세요.”

CH5. 여름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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