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왜 또 여기 계세요?”
불편함을 숨기지 않으며 노려보자 알렉스는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따로 만나자는 뜻 아니었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해 안 가는 소리를 하니 미간이 구겨졌다.
“사람이 많아서 마족어를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거든. 따로 말해 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는데, 아니었나?”
“아니었어요.”
빠르게 대화를 자르며 돌아갈 것을 권하는데, 알렉스는 눈치 없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마족과 꽤 돈독한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정말 나눈 대화가 없다고?”
그의 시선은 벽에 걸린 요하네스의 로브에 머물렀다.
불안한 마음에 바로 로브로 손을 뻗었지만 알렉스가 더 빨랐다.
나무 벽에서 돋아난 나뭇가지가 로브를 낚아채더니 알렉스의 손으로 옮겨 주었다.
“주세요!”
이 자식 손버릇 안 좋네!
나는 정색하고 알렉스에게 다가가 로브를 뺏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로브를 자세히 살폈다.
“남자 옷 같은데.”
“그게 왜요.”
“마족 지대는 많이 낙후됐나 봐. 여자 옷 하나 못 구해 주는 걸 보면. 아니면 이자가 가난했거나.”
“낙후되지 않았어요. 제가 지내던 곳에는 여자가 없어서 그래요.”
“여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개발 중인 맵이면 말이 되지.
나중에 여자 유저들이 접속하면 마족 지대 성비가 채워질 테니까.
그리고 #아포칼립스 지역에서 살아남은 여캐한테 엑스트라 역할을 준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멋진 여자들은 법적으로 주인공을 시켜야 한다.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어느 로판 작품에서 그런 판례를 본 것 같다. 암튼 그런 법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입을 꾹 다문 채 다시 손을 뻗었다.
알렉스는 또 가볍게 로브를 들어 올려 내 손을 피했다.
분하다.
키 인플레이션이 초래한 박탈감을 느끼며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이 또라이가 핀트가 나가 요하네스의 로브를 태우거나, 유리관에 전시한다고 뺏어 갈까 봐 화를 낼 수 없었다.
나는 화를 꾹 참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돌려주세요.”
“버려.”
“싫어요! 빨리 돌려주세요.”
“더 좋은 거로 사 줄게.”
그는 내 손을 가볍게 피하며 제안했다.
“필요 없어요. 이것보다 좋은 옷은 없어요.”
“왜?”
나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았다.
“따뜻하고, 가볍고, 또 디자인도 제 취향이에요.”
그러나 그건 실수였다.
장점을 늘어놓으니 더 탐이 나는지 알렉스는 아예 나뭇가지에 걸어 내 방 천장으로 로브를 치웠다.
“이러시는 게 어디 있어요. 제 거잖아요!”
알렉스는 대답하는 대신 짧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찰나였다.
미소를 지워 낸 그가 옷에 관심을 끄라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놈이랑은 무슨 얘기를 했는데.”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알렉스를 노려봤다.
너 같으면 이 상황에서 곱게 대답해 주겠냐고.
디아나와 아이시스를 만난 이후로는 알렉스가 크게 무섭지 않았다.
계락 남주 위에 먼치킨 여주가 있는 법.
그 무서운 여주들이 내 편이니 말이다.
알렉스가 저렇게 돌아 버린 눈으로 볼 때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곤 했지만, 이번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이 광견의 투기를 자극한 모양인지 알렉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허리를 숙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놀라 흠칫했다.
알렉스는 기가 찬 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손에 제 얼굴을 묻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저쪽도 이 유치한 짓에 현타가 온 듯했다.
혼잣말을 중얼대던 알렉스가 손을 치우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쪽에서 들은 말은 없는 건가?”
나는 눈앞의 금안을 마주하다 입을 열었다.
“알려 드리면 돌려주실 거예요?”
“저거 말고 더 좋은 거로 준다니까.”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데이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면 더 뺏고 싶어지지 않을까?”
“…….”
나는 볼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알렉스를 노려봤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브보다 더 갖고 싶어 할 만한 걸 드릴게요.”
“내가 뭘 갖고 싶어 할 줄 알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나 비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마왕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아요.”
내 말에 알렉스가 웃음을 멈추었다.
숨조차 멈춘 듯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차분히 알렉스가 판단을 내리도록 기다려 주었다.
한참 뒤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마족이 마왕의 동면지를 알려 줬다고?”
질문에 의심이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마족 지대에서 마왕이 잠든 곳을 알아냈어요.”
나는 힐긋 나뭇가지에 걸린 로브를 보다 다시 알렉스와 눈을 맞췄다.
“알려 드리면 돌려주실 거예요?”
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내 말이 의심스러운 건가 싶어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설명해 줬다.
그만큼 저 로브를 돌려받고 싶었다.
“전에 삼검 씨가 바람이 파도처럼 물러나다 밀려오길 반복했다고 말한 거 기억나세요?”
알렉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내 말에 집중하듯.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마족의 이능 아시죠? 빙결. 공기 중의 수분이 재배열되면서 일어나는 바람이에요. 5초간 밀려오고 3초간 물러나는 파동이 삼검 씨가 포착한 것과 일치해요.”
“그 지역에 마왕의 동면지가 있다는 건가?”
나는 알렉스의 눈동자를 보다 다시 물었다.
“알려 드리면 돌려주실 건가요?”
침묵이 또 길어진다.
알렉스는 긴 숨을 내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맞다면.”
나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차피 확인해 봐야 할 일이니 입을 열었다.
“빛을 교란해서 시야를 왜곡할 수 있는 거 아세요?”
알렉스는 처음 듣는다는 듯 눈썹을 까닥 들어 올렸다.
“빙결 이능으로 얼음막을 만들어 빛의 반사각을 교란할 수 있나 봐요. 그렇게 모습을 감출 수 있대요.”
요한은 이게 숙련된 이만 가능한 능력이라고 했지만, 마왕도 가능할 것 같았다.
마족의 왕이니까.
그 생각을 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마왕은 마족의 왕인데, 마왕을 제거할 방법을 알려 주는 게 꼭 요한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잠들어 있는 겨울국 황녀도 그렇고 재앙을 막기 위해 다들 고생하는데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마왕이 깨어나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사계국이 동결된다면, 착한 영애들이 모두 절벽 엔딩을 칠 수도 있었다.
마족은 사계국으로 오지 못하니까, 마왕이 죽어도 요한은 모르지 않을까?
요한도 몇 번이나 경계를 돌았지만 넘어오지 못했다고 했잖아.
그리고 아직 개발 중인 게임이니까.
……그래, 이건 게임이잖아.
그럼에도 왜 망설여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절대다수인 유저들을 위해 죄책감을 꾹 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추측이라 직접 가서 확인해 보긴 해야 해요.”
“그대 말대로라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확인하지?”
“밤에는 마왕성이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시야 왜곡은 빛이 많이 필요해서 낮에만 가능하다고 했거든요.”
알렉스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 조용히 있던 그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쩌억.
나뭇가지가 기지개를 켜듯 몸을 늘리며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로브를 집어 들고는 내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음에 드는 정보군.”
“다행이네요. 확인은 언제 하러 갈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쉬어. 확인차 가는 거니 몇 명만 다녀와도 되니까.”
그는 그 말을 하며 창문을 닫았다.
“잘 자.”
닫히는 문을 보며 나는 기막힌 숨을 내쉬었다.
“이 난리를 피우고 잘 자라니. 뭔 말이야, 그게.”
나는 눈을 찌푸리며 중얼중얼 알렉스를 욕하다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그를 욕한 게 무색하게도 바로 곯아떨어졌다. 피로가 꽤 누적된 모양이었다.
개운하게 숙면한 후 눈을 떴을 때, 평화로운 아침 햇살이 종이 유리 너머로 들어왔다.
뭉근한 햇빛을 보다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아침마다 마족 지대에서 약을 먹던 습관 때문이었다.
아차 하고 손을 거두려던 순간 손끝에 닿은 천의 감촉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천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요하네스의 로브가 협탁에 곱게 개어져 있었다.
***
“그림자만 봐도 성의 크기가 어마어마했죠. 황성에 버금가는 크기였습니다. 지원군이 더 필요합니다.”
“지원군이 문제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들어갑니까? 들어갈 방법부터 찾아야죠.”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다가, 마왕이 깨어나서 나오는 순간 덮치는 겁니다.”
“지금 승산이 없으니까 동면 중인 마왕을 죽이자고 이 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개운하게 숙면 취하고 나온 마왕한테 다 같이 달려들자고요? 이게 무슨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도 아니고 왜 아까운 목숨을 버립니까.”
답답했는지 체이스가 빠른 속도로 사검의 말을 반박했다.
대화 속도를 따라잡으려 나는 정신없이 필기했다.
사관 생각도 좀 하면서 말해!
그러나 그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라 내 손을 보지도 않았다.
드디어 마왕의 동면지를 찾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