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나는 차분히 내 앞에 뜬 슬롯 정보를 읽었다.
이름: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
직업: 마족 지대 16 수호성
계급: 제1의 수호성
특성: 두 방울의 피
키워드: #아포칼립스 #상처남 #다정남 #생존물 #직진남 #동정남 #인외남주 #역키잡 (더 보기)
등급: 남주 선택 후 확인 가능
그런데 상태창에 뜬 정보 중 내 눈을 사로잡는 단어가 있었다.
#역키잡?
남주에게 적용되는 내 키워드는 #착각계 #여공남수 #역키잡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했다.
‘요한에게 적용된 제 키워드는 뭔가요?’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에게 적용된 키워드는 #역키잡입니다.]
역시나.
입이 벌어졌다.
생각해 보니 요한의 나이를 묻지 않았었다.
당연히 나랑 비슷한 줄 알았지!
사색이 된 나는 머리를 스친 생각에 흠칫했다.
혹시 요하네스 미성년자였나?
안 돼! 미성년자 남주는 안 된다고!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요한에게 설렜던 내 과거를 격하게 부정했다.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는 미성년자가 아닙니다.]
패닉에 빠진 내가 안쓰러웠는지 AI 담당자님이 슬그머니 내 죄책감을 덜어 갔다.
아, 다행이다.
안도감은 잠시였다.
이번엔 다른 걱정이 들었다.
‘……근데 성인을 #역키잡 할 수 있나요?’
다 큰 성인 남성을 어떻게 키우라는 거지?
황당한 마음으로 답을 기다리는데 AI 담당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 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당신의 열린 이야기를 응원합니다.]
돌았나 봐.
개연성 어디 갔어.
이건 키워드 모욕이야.
#역키잡은 갓 성인이 된 남주가 남자로 보이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게 맛있는 포인트인데, 성인 남주에게 #역키잡 키워드 붙이면 다 역키잡인 줄 알아?
로판의 헤비 독자로서 시스템의 키워드 부여 방식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것은 로판 독자를 모독하는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아, 혹시 이것도 버그인가?
마족 지대에서 남주를 슬롯에 담은 바람에 오류가 생긴 게 아닐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데 어느새 다리 끝에 도착했다.
하얀 눈안개 너머로 커다란 나무 독채가 하나 보였다.
탐색 대원들은 기지로 돌아가지 않고, 다리 끝에서 지내고 있었나 보다.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계셨어요?”
고삐에 스크롤을 묶던 디아나가 내게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디아나: 영애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쭉이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답에 나는 움찔했다.
[디아나: 혹시 다리 아래로 떨어진 게 아닐까 싶어서, 다리 아래도 수색하고 이 근처에서 계속 영애를 기다렸어요.]
그녀는 말로 해도 될 이야기를 메시지로 알려 주었다.
한숨을 내쉬는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뽀얀 김이 흘러나온다.
[디아나: 알렉스가 영애에게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아요. 곤란한 질문 하면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메시지 계속 켜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에게 시스템 오류를 말할 수는 없으니, 실수로 스크롤을 잘못 써서 마족 지대에 다녀왔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디아나: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내 생각이 들린 모양인지 디아나가 동의했다.
길게 말을 휘감은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드디어 기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
“스크롤을 잘못 만져서 마족 지대로 갔다는 건가.”
“네, 맞아요. 바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스크롤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다 거기서 마족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요.”
“지금 입고 있는 옷들이 마족의 옷이고?”
“네, 맞아요.”
“마족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텐데.”
“아니요. 친절하던걸요.”
말을 잇던 나는 알렉스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가뜩이나 날 흑막으로 여기는 놈인데 내가 마족의 편을 드니 표정이 가관이었다.
우리는 기지로 돌아오자마자 회의실로 왔다.
탐색 대원 외에는 출입을 금하던 회의장이지만, 지금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가을국에서 온 의원이 내 팔의 상처를 보며 기함하고.
“아이고, 우리 데이지 양의 발이 퉁퉁 부었습니다. 어찌합니까? 폐하아.”
여름국 환관은 따뜻한 돌을 넣은 천으로 쉴 새 없이 내 발을 찜질해 줬다.
왕벌 환관은 여전히 그의 과한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발을 마시지할 때마다 한숨 한 번, 한탄 한 번, 울음 한 번을 내뱉었다.
어쨌든.
비록 ‘마왕의 기상 시간’만이 차단된 정보라고는 하나, 탐사 정보 또한 비밀리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불신의 상징 알렉스 때문이었다.
나는 울먹이는 환관을 보다 시선을 들어 내 앞에 마주 앉은 알렉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저놈이 이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한 게 신기했다.
심문은 해야겠고, 그런데 또 겨우 돌아온 나를 막 대하는 건 양심이 찔린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얼결에 황제처럼 심문을 받게 됐다.
옆에 진짜 황제 폐하를 두고 더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누구 하나 이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발목으로 퍼지는 온기에 노곤하게 표정이 풀어지는데,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마족 지대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돌아온 건가?”
나는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동 스크롤을 선물받았어요. 사계국에 돌아오자마자 그걸 사용해서 다리로 돌아왔고요.”
나는 요한에게 받은 이동 스크롤을 보여 주며 거짓말을 했다.
이동 스크롤이라는 치트키로 귀환 과정을 설명하니 알렉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지점을 발견했는지 알렉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마족이 이동 스크롤을 쓴다고?”
그들이 이동 스크롤을 쓴다는 게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그 반응은 놀람보다는 걱정에 가까웠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알렉스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가 느릿하게 떴다.
“혹시 마족에게 들은 이야기는 없나?”
들은 이야기라.
엄청 많았지.
요하네스의 성에서 본 수많은 책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걸 말하는 대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요.”
알렉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몇 초간 의뭉스러운 표정을 마주하다 깨달음을 얻었다.
맞다, 쟤는 내가 마족어를 안다고 생각하지.
알렉스는 내가 소통했다고 확신하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버프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요하네스가 여름국어를 사용한 덕분에 필담으로 소통을 해 왔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알렉스의 눈웃음이 불편했다.
나는 로브 자락을 여미며 시선을 피했다.
“레이디, 이 상처는 다 아물어도 흉이 남을 것 같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치료할 예정이나 워낙 상처가 커서 걱정입니다.”
의원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내 팔을 내려다봤다.
펴 바른 고추장이 마른 것처럼 팔 위에 붉은 딱지가 가득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의원에게 웃어 주었다.
“괜찮아요.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진짜로. 경계에 갇혀서 못 나오는 줄 알았단 말이지.
시끌벅적한 이 분위기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를 거다.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다시 알렉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알렉스는 알 수 없는 눈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다 시선을 틀었다.
이어질 질문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데이지 양은 기지에 머무는 거로 하죠.”
갑자기 알렉스가 나를 탐험에서 빼자고 했다.
오! 웬일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표정 관리를 하며 주변을 살폈는데, 다들 그의 말에 동의했다.
“네. 당연합니다.”
“레이디는 휴식이 필요하죠.”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 양은 회복하는 데 집중하는 거로 하고, 우리는 앞으로의 탐사 방향에 대해 논의합시다.”
그는 바로 다시 회의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축객령 아닌 축객령을 당한 채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아이시스: 그러니까 다리가 마족 지대 게이트였다는 거예요?]
탁탁탁탁.
[다리뿐만 아니라 협곡 아래랑 자작나무 숲에도 게이트가 있어요.]
나는 침대 아래 내려 둔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타자를 쳤다.
[아무래도 베타 버전이라 맵 이동이 원활하지 않아서 저만 마족 지대로 강제 이동 당한 거 같아요.]
나는 심문이 끝나자마자 사우나 건물에서 몸을 씻은 뒤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노트북을 켜 메신저 단톡방에 들어왔다.
디아나와 아이시스가 그동안 있던 일을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들에게 그동안 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경계에 갇혀, 빠져나오기 전에 수십 번이나 구간 이동을 했다고.
그러니 탐사할 때 다리와 자작나무 숲, 절벽을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 줬다.
[디아나: 마족이 구해 주다니, 의외인데 정말 다행이네요.]
[아이시스: 마족 지대 남주들은 어때요?]
나는 타자를 치던 손을 그대로 둔 채 머뭇거렸다.
요한의 존재에 대해 말하려면 ‘S급 남주 관람권’을 받은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시스와 디아나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실수로 S급 남주 후보가 다른 이에게 알려지면 커뮤니티가 망가질까 걱정됐다.
[네, 멋있고 좋은 분들이었어요. 무서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머뭇거리다 S급 남주 관람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우연히 만난 마족 남주가 나를 도와주었다고 설명했다.
말을 이어 갈수록 의문이 들었다.
요하네스는 왜 선택할 수 없는 남주인데 S급 남주 후보로 오른 걸까. 아무리 의심해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베타 버전이라 허술한 건지 아니면 시스템의 오류인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오직 하나였다.
어쩌면 다시는 요하네스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다시 경계에 들어설 수 있을지,그래서 운 좋게 마족 지대로 넘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점심 배식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그녀들은 뒤늦은 식사를 하러 떠났고, 나는 입맛이 없어 숙소에 남았다.
탁.
피곤해서 노트북을 끄고 옆으로 누웠다.
멍하게 있는데 창가에 걸린 로브가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밀려온 기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창에 그림자가 진 탓이다.
‘누구지?’
나는 눈을 찌푸린 채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서 있던 알렉스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