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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53화 (54/208)

53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잘 떨어지면 안 아프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푹.

“아흑, 아파.”

쓸데없는 노력이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매만지며 일어났다.

그래도 낮이라 그런지 그때처럼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와 보기도 했고.

골짜기 끝으로 하얀 세상이 보였다.

뒤돌아 반대쪽도 확인했다.

뒤쪽으로는 검은 동굴이 있었다.

처음 경계를 넘은 날 나는 하얀 설원으로 걸어 나갔고, 거긴 마족 지대였다.

그럼 반대로 동굴에 가면 겨울국이지 않을까?

나는 바로 동굴로 걸음을 뗐다.

한 발 떼기 무섭게 바닥에서 하얀 연기가 훅 올라왔다.

바닥으로 꺼지는 느낌.

또 경계를 이동하는구나.

아무래도 경계에 걸리면 몇 걸음 만에 다음 경계로 빨려 가는 거 같았다.

이제 몇 번 해 봤다고, 덮쳐 오는 하얀 연기가 무섭지 않았다.

이번엔 다리로 가는 걸까?

돌바닥으로 떨어지면 엄청 아플 거 같은데.

잘못 떨어지면 골절을 입을 거다.

제대로 착지할 생각으로 눈을 부릅뜨고 바닥을 응시했다.

그러나 하얀 연기를 빠져나왔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두툼한 눈이었다.

“엥?”

푹.

놀랄 새도 없이 바로 눈더미에 얼굴이 처박혔다.

“으으.”

고개를 드니 자작나무 숲이었다.

아까와 같은 자리.

그러나 그때와 달리 요한은 없었다.

나란히 찍혔던 발자국도 없다.

“뭐야…….”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공간.

두 맵의 중복 플레이 존.

게임에서 다른 맵으로 넘어가는 게이트처럼, 경계는 마족 지대 맵과 겨울국 맵을 연결하는 곳 같다.

아까 전에 있던 곳은 마족 지대의 자작나무 숲 같고, 이쪽은 사계국의 자작나무 숲인 듯하다.

같은 장소지만, 다른 세계의 공간이기도 했다.

게이트를 통과했으니 마족 지대에서 바로 사계국으로 맵이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계속 마족 지대의 3개의 경계와 사계국의 3개의 경계, 총 6개의 경계 안으로 계속 빨려 들어갔다.

게이트에 갇힌 것이다.

마족 지대는 개발 중인 맵이라, 겨울국과 연동이 불안정하다던 담당자님의 말이 생각났다.

“하…….”

문과생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개발의 영역이다.

눈물을 삼키며 하늘을 쳐다봤다.

개발자님에게 물을 수는 없으나, 다행히 내게 답을 줄 수 있는 이가 있었다.

“담당자님, 경계에서 어떻게 나가야 하나요?”

의 절대자 시스템. 그리고 시스템과 연동하며 유저를 돕는 AI.

나는 모든 정보에 접속이 가능한 내 AI에게 물었다.

곧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한 발을 내디뎌 보세요. 첫걸음이 당신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거예요.]

AI는 테마파크 직원처럼 나를 꿈과 희망의 세계로 안내하듯 말했다.

게이트를 넘는 유저들을 위한 환영 멘트를 재생한 모양이다.

마족 지대 절벽에서도 저런 멘트를 들었던 거 같다.

습관적으로 치밀어 오른 욕을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참자. 긍정적으로 생각해. 괜찮아. 일단 난 경계에 들어왔잖아? 그래. 그것만 해도 어디야.”

나는 다시 걸음을 뗄 생각으로 가방을 고쳐 멨다. 그러다 멈칫했다.

가방으로 내려간 시선을 따라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투명한 별 모양의 얼음이 내 쇄골 부근에서 반짝였다.

별 뒤에 달린 얇은 얼음이 로브를 꿰뚫고 있다.

옷핀처럼.

나는 단단하게 여며진 로브를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요하네스 이 유죄 인간. 쓸데없이 다정해서…….”

이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됐다.

만약에 겨울국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그래서 마족 지대에 평생 머물게 된다면, 비록 20억은 못 타겠지만 그 차선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더 나빠질 것도 없다.

나는 침착하게 발목을 풀었다.

경계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넘어간 건 한 번이었다.

절벽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날 내가 한 건 걸음을 내디딘 것뿐이다.

그저 끊임없이 걸어 절벽을 빠져나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걸음을 뗐다.

계속 걸으면 답이 나겠지.

“나갈 수 있어.”

나는 곧 노도에 잡아먹히듯 하얀 포말에 둘러싸였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차갑고 푹신한 눈에 떨어졌다.

“으윽!”

다시 절벽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걸음을 뗐다.

몇 번이나 연기 속을 헤집고 떨어지길 반복했다.

30번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숫자 세는 걸 깜빡해서 포기했다.

“#무한회귀도 아니고…….”

나는 시스템을 욕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6개의 경계 안을 맴돌았다.

다시 다리에 진입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발을 떼었다.

자박.

“어?”

그런데 이번엔 하얀 연기가 일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돌바닥을 노려보다 천천히 발을 들었다.

자박.

“어!”

다시 한 걸음 더 걸었다.

자박.

“어어어!”

자박.

자박.

“와, 돌아왔다아!”

돌고래 초음파처럼 내지른 육성이 다리 위에서 마구 메아리쳤다.

심지어 깡충깡충 뛰다가 타박상을 입은 골반이 비틀려 허리를 부여잡아야 했다.

“윽, 그래도 좋아. 드디어 집이다!”

나는 눈물을 닦았다. 내 집, 내 세계로 돌아왔다는 기분에 벅찬 안정감이 밀려왔다.

“이제 기지로 돌아가야지.”

나는 스크롤을 꺼내려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가방이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엥? 책이 어디 갔지?”

당황해 가방을 마구 뒤적였지만, 가져온 책이 전부 사라졌었다.

의원이 챙겨 준 약재와 붕대는 멀쩡히 있는데 오직 책만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하나 더 있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따라 로브가 팔 아래로 주륵 흘렀다. 습관적으로 코트 깃을 올리던 나는 퍼뜩 시선을 내렸다.

얼음 옷핀이 사라졌다.

얼음과 책.

그 두 물건이 흔적도 없이 증발한 거다.

팔짝팔짝 뛰다 흘린 건가 싶어 주변을 돌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책과 얼음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마족 지대 물건은 겨울국으로 가져오지 못하는 건가.

아니야, 난 지금 요한 옷을 입고 있고, 의원님이 준 약재도 그대로 가방에 있잖아.

순간 나는 머릿속을 스친 단어에 답을 찾았다.

이능.

마왕은 겨울국에 제 이능을 발휘하기 위해 겨울국에서 지내고 있을 거라던 알렉스의 말.

얼음은 요한의 이능이라 사라진 것 같고.

그럼 책은 왜 사라진 거지?

설정집도 누군가의 이능인 건가?

[천천히 답을 찾아보세요.]

영양가 없는 조언이 들렸다.

담당자님이 내 생각을 바로바로 읽는 걸 보니 확실히 여긴 겨울국이다.

“어흑, 이 간섭이 그리웠어요.”

촉촉이 젖은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로 올라갔다. 눈이 쏟아질 듯 흐린 하늘이 보인다.

하늘은 마족 지대나 겨울국이나 똑같았다.

마족 지대와 사계국.

다른 세계면서 같은 세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 세계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허전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뒤돌아 다리 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외면하던 불편한 생각을 마주했다.

‘다시 마족 지대로 넘어갈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심장에 차가운 얼음을 올려 둔 것처럼 마음이 시큰했다.

고작 며칠을 지냈을 뿐인데, 어쩌면 다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데이지!”

자욱한 눈안개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

흑마에 오른 엘런이 보이고 곧 모두가 보였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들이 반가워 나도 그쪽으로 뛰어갔다.

“아니, 어떻게 여기 있어요? 계속 기다린…….”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부서질 듯 온몸을 옥죄는 압력에 모든 생각이 증발했다.

단단한 바위틈에 갇힌 듯 폐쇄감이 덮쳐 왔다. 그럼에도 밀어내지 못한 이유는 피부로 전해지는 떨림 때문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한숨 같은 엘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런답지 않은 불안정한 음성에 나는 움찔했다.

아무래도 많이 걱정한 모양이다.

하긴, 같이 탐사하던 동료가 갑자기 사라져서 일주일 만에 다시 나타났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걱정 많이 했겠네.

걱정시켜 미안한 마음과 다시 동료들을 만났다는 사실에 안정감이 동시에 차올랐다.

“에스텔라 영애!”

아이시스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엘런에게 시야가 막혀 볼 수 없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엘런은 계속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니 저기, 잠시만요, 공작님.”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이것 좀 놔줘. 다들 보잖아!

다행히 엘런은 내가 밀어내자 바로 몸을 물렸다.

“미안. 잠시 정신이 나갔군.”

그는 제 행동에 스스로 충격을 받은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 엘런의 앞으로 아이시스가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달려온 아이시스가 내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몸을 돌렸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네, 괜찮아요.”

어느새 다가온 디아나가 안도의 숨을 쉬며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정말 어디 안 아픈 거 맞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아이시스는 아이를 살피는 부모처럼 사색이 된 채 계속 내 몸을 살폈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그 소란을 끊어 냈다.

“일단, 기지로 돌아가서 얘기하지.”

알렉스였다.

그는 나를 짧게 응시하다 대원들을 쳐다봤다.

“그게 뭐였는지 모르지만, 또 휩쓸려 갈 수도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내 증발이 모두에게 트라우마였는지 그 말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알렉스의 시선이 내 앞섶에 머물렀다.

요하네스의 로브를 보던 그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우선 다리 끝으로 나가서 이동합시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스크롤을 쓰는 건 위험한 것 같으니.”

알렉스의 제안 뒤로 기계 음성이 들려왔다.

[2건의 메시지가 수신됐습니다.]

[AI 담당자 ON 상태로, AI 담당자 시스템과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메시지 수신에 당황했지만, 얼른 수긍했다.

[아이시스: 영애, 버그에 휩쓸린 거죠?]

[아이시스: 지금 황태자 보니까 심문 들어갈 각인데, 시스템 오류 설명하기 곤란하면 말해줘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는 디아나의 말에 오르며 아이시스를 쳐다봤다.

아이시스는 이미 알렉스 옆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여차하면 알렉스를 세뇌할 생각인 듯하다.

나는 다급하게 답장을 보냈다.

[버그는 맞는데 스크롤 때문은 아니었어요!]

[여긴 겨울국과 마족 지대의 경계예요. 저는 버그에 휩쓸려서 마족 지대로 끌려갔다 왔어요.]

나름 차분하게 설명을 하는데, 아이시스의 시선이 확 이쪽으로 끌려왔다.

[아이시스: 마족 지대에 다녀왔다고요?]

그녀의 시선이 내 어깨로 떨어졌다.

[아이시스: 설마 지금 입고 있는 옷들 마족이 준 거예요?]

[네, 거기서 사고가 났는데 마족에게 도움을 받아서 일주일간 지냈어요. 다시 돌아온 것도 마족이 도와줘서 올 수 있던 거고요.]

마족.

그 일반적인 단어로 말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사계국에서 마족은 적대적인 존재다 보니, 요하네스를 마족으로 표현하는 게 좀 그랬다.

요한은 은인인데…….

묘한 아쉬움에 나는 시선을 피하듯 말 갈퀴를 내려봤다.

근데 요한은 정말 마족일까?

요한은 마족 이능인 빙결 이능을 쓰지만, 동시에 불의 이능도 다루었다.

나는 말안장을 움켜쥐다 확인해 보기로 했다.

‘담당자님, 요하네스의 정보를 열람해 주세요.’

[‘요하네스 히엠 실렌티아’의 정보를 열람합니다.]

역시나 요한은 내 슬롯에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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