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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52화 (53/208)

52화.

B A O

시간이 흐르고 새벽이 밝아 왔다.

요한의 말대로 바닥부터 올라온 빛에 별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감췄다.

사소한 풍경에 서사를 부여한 탓인지 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요한을 쳐다봤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고개를 까닥 앞쪽으로 기울였다.

딱히 웃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요한은 잠시 웃어 주다 모닥불로 시선을 틀었다. 그가 손짓하자 불이 사그라들며 모습을 감췄다.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다시 한번 손짓했다.

사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바람이 밀려왔다.

파도처럼 물러나다 다시 덮쳐 오는 바람이었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어 봤다.

5초, 3초, 5초.

5초간 밀려오던 바람이 3초 정도 쉬었다가, 다시 5초간 밀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얼음집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바람도 다룰 수 있어요?]

요한은 잠시 문장을 읽다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답을 적는 대신 고개를 젓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누는 소리가 없음에도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걸 알았다.

요한이 내민 손을 잡자 그가 나를 말 위로 올려 주었고, 나는 몸을 앞으로 움직여 요한이 편히 올라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안장에 오르기 무섭게 요한은 나를 제 품으로 당겨 기대게 했다.

처음에는 요한의 배려를 거부하고 허벅지에 힘을 주어 버텨 봤으나, 1시간이 최대였다.

스킬 없는 승마는 힘들었다.

허리가 뻐근하고 긴장한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내 초라한 체력을 받아들이고 요한에게 기댔다.

자박자박.

메마른 겨울 공기 속으로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졌다.

눈이 내릴 모양인지 하늘이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드넓은 설원 끝에 자리한 숲이 보였다.

앙상한 하얀 가지에 검은 상흔이 새겨진 나무.

자작나무 숲이었다.

기분 탓인지 말의 걸음이 느려진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걸음이 느려졌다. 말의 발자국을 따라 전해지는 진동도 옅어졌다.

숲의 입구에 이르자 요한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게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경계에서는 말을 타면 안 되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다리에서 갑자기 말이 사라져서 낙마했었지.

요한은 이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닥치는 대로 자료를 수집하는 겨울국 재건 협회장과 알렉스보다 많은 걸 알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요한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박사박.

한참 숲을 걷던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눈에 뒤덮인 앙상한 나뭇가지. 발의 감각을 무뎌지게 하는 차가운 눈.

사박.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은빛 구름 아래, 하늘을 찢을 듯 날카롭게 솟은 얼음산이 보인다.

이곳은 시스템의 이벤트로 처음 요한을 만났던 자리였다.

요한이 선 자리와 내가 선 곳이 반대인 걸 제외하면 그날과 같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러자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 게이트 입장을 허가합니다.]

[네트워크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나는 그대로 경직됐다.

‘담당자님! 지금 연결된 거예요?’

[네트워크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불안정하다고 말하나, 기계음이 들리는 것을 보니 연결된 게 확실했다.

게다가 손목에서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전원이 들어온 워치가 지난 메시지를 수신한 탓이다.

자박.

따라오지 않는 내가 이상했는지 요한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요한을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요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리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벗어나려 움직였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으로 끌려갔었다.

지금 움직이면 또 그때처럼 어딘가로 빨려 갈 것 같았다.

돌아가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당연히 돌아가야지. 여기서는 게임을 완성할 수도 없고 버프도 받을 수 없는데.

AI 연결이 끊기기 전에 발을 떼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도 들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요한 때문이었다.

그동안 입은 은혜가 있는데,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노트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던 나는 벼락처럼 깨달았다.

겨울국과 마족 지대가 혼재하는 이곳이라면 내 버프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담당자님! 마족 언어 해석 버프 켜 주세요!’

나는 요한을 마주한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제발 돼라…….

그때였다.

[특성 버프 ‘마족어 해석’ ON]

“됐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요한이 움찔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다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마족어를 할 줄 아셨군요.]”

기뻐하는 나와 달리, 요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숨기신 겁니까?]”

푸른 눈동자에 실망이 스친다.

“[저를 믿지 못하신 겁니까?]”

“아니, 무슨 세상에! 그런 섭섭한 말씀을!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절대 아니에요! 요한은 무조건 믿죠! 요한을 안 믿으면 누굴 믿어요?”

당황한 나는 광신도처럼 손을 파닥거리며 그에 대한 믿음을 외쳤다.

그러자 아까보다 훨씬 당황한 낯으로 요한이 움찔했다.

“아…….”

기껏 유지해 온 이미지가 망가진 듯하다. 마지막에 와서 주접력을 들키고 말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금거리는데, 요한의 입술 사이로 옅은 입김이 흩어졌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그 좁은 간격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번졌다.

왜인지 그는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한결 풀어진 낯으로 그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대의 이능입니까?]”

이능?

뭐, 영애들이 버프를 마력처럼 쓰기도 하니까. 마족어 능력을 이능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지 않을까?

시스템 버프를 설명할 수도 없고, 거짓말을 하기도 싫었다.

나는 눈을 굴리다 타협하는 마음으로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지었다.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요한은 곧 서운함을 치워 내고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마지막 인사를 하시려는 건가요?]”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겨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돌아가지 못하면 민망한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나는 체면을 챙기는 대신 은인에게 예를 취하는 쪽을 택했다.

“저 경계에 들어선 것 같아요. 이제 돌아갈게요.”

웃으며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얼굴 근육이 굳어 길게 웃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입꼬리와 눈꼬리가 내려간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답답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요한.”

생명의 은인이자 안내자.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막상 인사를 하니, 감사하다는 말의 무게가 가벼워 오히려 염치없게 느껴졌다.

민망함에 손에 든 배낭을 만지작거리며 중얼댔다.

“물론 감사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제가 표현력이 짧아서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정말 감사해요. 정말 감사하고 고마워요.”

감사하다 고맙다.

다채롭지 못한 단어만 새어 나왔다.

말주변이 좋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럴듯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은데 내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저 그런 말이 이어져 답답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그리고 즐거웠어요. 요한의 성에 있는 사람들도 좋은 분들이었고. 아, 성에서 본 책도 재밌었어요. 새벽에 해 준 별 얘기도 흥미로웠고……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자박.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대답처럼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바로 코앞에 선 요한이 보였다.

그가 허리를 굽혔다.

내 어깨로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흘러내린 옷깃이 어깨 끝에 걸쳐 있던 모양이다.

요한의 로브라 내게는 담요처럼 컸다. 그래서 자주 흘러내렸는데 그게 신경 쓰였는지 그가 옷깃을 당겨 내 목을 꼼꼼히 가렸다.

그때, 바람이 밀려왔다.

파도처럼.

5초, 3초, 5초.

나는 이제 이 바람이 빙결 이능 때문임을 안다. 공기 속의 수분이 모여 수축하고 배열되는 그 반동을 따라 바람이 이는 거였다.

나는 바람의 파도를 따라 살랑이는 은빛 머리칼을 바라봤다. 하지만 요한은 나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내 목 근처에 머물렀다.

파동처럼 번지던 바람이 사라지고 그제야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움직였다.

내 눈을 향해 올라온 시선에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러나 긴장한 건 나뿐이었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다시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할 뿐.

이번엔 내 시선이 그를 따라 올라갔다.

요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찾아와 주실 거라 믿습니다.]”

0.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의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혹시…….”

곤란한 질문일까 망설여졌지만, 나는 결국 묻고 말았다.

“사계국에 올 생각은 없으세요?”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들은 말의 뜻을 헤아리듯.

“봄국에 오면 이번엔 제가 은혜를 갚을게요! 봄국에도 예쁜 곳이 많거든요. 재밌는 곳에 데려가 줄게요.”

요한은 긴 숨을 흘리더니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사계국에 갈 수 없습니다.]”

“왜요?”

“[저도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얼음산에 머물렀다.

“[몇 번이나 이곳에 왔지만 저는 경계를 넘지 못했거든요. 다리와 절벽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요한의 시선이 다시 내게 꽂혔다.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시스템의 선택?

물론, 요한이 말하는 건 이 세계관의 신을 말하는 걸 테지만.

그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그러니 저는 당신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

“[부디 약속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하죠.”

나는 정말 진심으로 말했다.

나중에 봄국에 돌아가고 상황이 안정되면 꼭 마족 지대에 방문할 생각이었다.

“요한이 빌려준 책도 돌려줘야 하니까요. 올 때 선물로 스크롤도 잔뜩 가져올게요.”

그는 어린 조카의 허세를 들어 주는 삼촌처럼 웃었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또 봐요.”

재회를 기약하니 이별이 쉬워졌다.

그래, 다시 와서 만나면 되잖아.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동시에 걸음을 뗐다.

한 발을 내딛기 무섭게 몸이 아래로 훅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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