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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51화 (52/208)

51화.

물음표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는데 요한은 대답 대신 손을 건넸다. 말에 오르라는 뜻이었다.

아니, 잠깐만요.

의원님한테 사계국 오면 연락하라고 말한 걸 본인 선에서 커트했다는 뜻 아니야?

나는 남의 연애사를 읽는 독자처럼 요한의 의도를 아주 상당히 객.관.적.으.로 곱씹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주접이 스멀스멀 올라올 준비를 하는데, 요한은 또 청순한 오해를 한 듯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수첩으로 다시 물어왔다.

[말 타는 게 무서워요?]

뻣뻣하게 굳은 내 모습을 겁먹은 거라 오해한 듯했다.

말이 무서울 리가.

자율주행으로 달리는 내 필수 스킬인데. 나는 요한에게 답하듯 호기롭게 말안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발을 굴렀다.

휙.

촥.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뛰어오른 몸이 바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승마’ 스킬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도 열흘 넘게 말을 탔는데, 몸에 승마 기술이 배지 않았을까?

다시 해 보자.

휙.

착.

다시 발을 굴러 봤지만 깡충 몸이 떠올랐다가 푹신한 눈 위로 착 가라앉았다.

역시 인생은 날로 먹으면 안 되나 보다. 내장 스킬로 누린 승마 경험은 내게 경험치를 주지 않았다.

요한은 입술을 깨물고 최선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찮은 모습이 어지간히 웃겼나 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눈치를 주니 요한은 그제야 표정 관리를 시작했다.

그는 웃음을 싹 지워 내고 내게 두 손을 뻗어 왔다.

말에 올려 주겠다는 뜻 같았다.

나는 돌려받은 수첩에 글을 적었다.

[말에 올라가도 제가 말을 몰 줄 몰라서 안 될 것 같아요. 저희 걸어가면 안 될까요?]

당연히 요한이 그러자고 할 줄 알았다.

그는 #다정남이니까.

그런데 그는 내 수첩을 읽다가 손을 내밀었다. 펜을 달라는 말인가 싶어 펜을 주자 그는 수첩에 펜을 끼우고는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손으로 내 허리를 움켜쥐었다.

“으앗!”

붕 떠오른 몸이 그대로 안장에 올려졌다.

으, 올라오긴 했는데…….

마족 지대 말은 품종이 다른지 사계국의 말보다 몸집이 컸다.

훅 높아진 시야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낙마 무서운데…….”

한 번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서 그런지 불안정한 자세가 너무 무서웠다.

안장을 꽉 움켜쥔 채 나는 요한에게 다시 부탁해 보고자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새가 지나가듯 그림자가 바로 사라졌다.

시야가 트이자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번졌다.

“--.---.-.-.”

뒤에서 요한의 목소리가 밀려왔다.

그 짧은 말은 명령처럼 단호했다.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그의 말에 성 입구에 있던 남자가 문을 열었다.

쿠우우우우웅.

거대한 문이 아주 느리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허리 아래로 들어온 커다란 손이 고삐를 움켜쥐었다.

말이 천천히 성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눈 위로 다각다각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포근히 차올랐다.

나는 뒤에 있는 요한에게 몸이 닿을까 뻣뻣하게 굳은 채 허리를 바짝 세웠다.

혼자 말을 타면 더 편할 텐데 나 때문에 수고롭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의기소침해진 나는 요한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때였다.

내 이마로 살포시 온기가 내려앉았다.

그 손길을 따라 고개가 뒤로 당겨졌다. 요한은 제게 기대어 가라는 듯 자세를 잡아 주고는 다시 손을 내려 고삐를 잡았다.

안정적인 말발굽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

마족 지대와 사계국의 경계로 가는 길은 시험 길이었다.

취향 남주냐, 20억이냐.

AI 연결이 끊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AI 연결이 가능했다면 요한을 남주로 선택했을지 모를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여기서 가장 위험한 건 마물도 폭군도 아니었어.”

다정남주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멘탈 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눈이 떨어질 때면 머리 위로 얼음 우산을 만들어 주고, 추워서 살짝 팔을 문지르면 어떻게 한 건지 손난로를 온몸에 붙인 것처럼 온기로 얇은 막을 씌워 줬다.

반나절을 지나 해가 지자 요한은 쉬었다 가자며 이글루 같은 얼음 텐트를 만들었다.

심지어 안에 부싯돌로 불을 피워 주고 침낭까지 깔아 줬다.

타닥타닥, 따스한 소리를 내며 온기를 채우는 모닥불을 바라봤다.

인위적으로 만든 불은 요한의 이능을 녹이지 못했다. 그 덕에 훈기가 가득한데도 얼음벽은 녹지 않았다.

그저 하얀 돌처럼 매끈히 제 태를 유지할 뿐.

몸이 노곤해져서 그런지 눈이 감겼다.

‘남주는 안 피곤하나?’

그는 기껏 따뜻한 숙소를 만들어 놓고 본인은 불침번을 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시선을 돌려 얼음 문을 쳐다봤다.

저 차가운 벽 너머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결국 침낭에서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모닥불을 피워 놓은 요한이 나를 쳐다봤다.

푸른 눈동자가 왜 나왔는지 이유를 고요히 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수첩을 내밀어 보여 주었다.

[심심해서 잠이 안 오네요.]

그는 피식 웃더니 옆으로 움직였다.

나는 요한이 비켜 준 자리에 앉았다. 머물던 체온 덕분인지 나무가 따뜻했다.

“…….”

“…….”

요한이 혼자 있는 게 걸려 나오긴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건네 볼까 한참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그래, 요한도 피곤할 텐데 불멍 하게 두자.

가끔은 말없이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이 가실 때가 있다.

나는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 생각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침묵.

툭.

수첩을 내려두고 발을 통나무 위로 올렸다.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올리니 자세가 편해졌다.

나는 그렇게 웅크린 채 침묵을 즐겼다.

타닥타닥.

부서지는 불꽃 소리가 초침처럼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 준다.

요한과 내 사이에는 오직 그 따뜻한 소리만 존재했다.

나는 모닥불을 보던 시선을 멀리 던져 설원과 그 위로 대칭된 밤하늘을 바라봤다.

깨끗한 하늘이라 모순되게도 수많은 별 가루가 어지럽게 뿌려져 있었다.

어둠이 그려 내는 색채가 예뻤다.

어두운 파랑, 하얀 별빛, 연보라색 월광이 스민 설원.

“예쁘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뜻도 모르면서 요한이 살포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입가로 흩어지는 김이 따스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뺨을 무릎에 붙인 채 가만히 요한을 쳐다봤다.

얼음의 힘을 가진 마족에게 왜 불의 이능이 있는 걸까.

개발 중인 맵 속의 캐릭터라 오류가 난 건가?

마족 지대 남주의 안에 담긴 시나리오는 어떤 결말을 가지고 있을까.

찬 공기 위로 퍼져 가는 훈연처럼 호기심이 번져 간다.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누군가 허파를 움켜쥔 것처럼 숨이 답답해졌다.

어쨌든 나는 알 수 없는 이야기니까.

마족 지대에서 지낸 열흘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AI와 연결되지 못했다.

남주를 선택하면 [전]에 진입하고 그의 시나리오를 따라 [결]을 완성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사계국의 유저라 지금 요한을 선택할 수 없을뿐더러, 그와 함께하는 에피소드를 시스템에 업로드 할 수 없었다.

마족 지대 남주는 아마도 시즌 2에 접속한 유저가 마족 지대에서 플레이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요한은 사계국 유저인 내게 남주가 아니었다.

요한이 사계국으로 넘어오지 않는 이상.

나는 요한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모닥불을 바라봤다.

한참 그렇게 조용히 있었다.

요한이 뒤척이는 작은 소음이 들렸다. 곧 그 소음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눈앞으로 하얀 종이가 들어왔다.

[별에도 서열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별.

낭만적인 단어를 적은 요한이 웃겨 웃음이 나왔다.

역시 다정남주.

침묵이 신경 쓰였는지, 그는 고민 끝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낸 듯하다.

나는 펜을 받아 그 아래에 답장을 적었다.

[아니요. 별들은 서열을 어떻게 정하나요?]

별자리 이야기처럼 전쟁사를 말해 주려나.

아직 모르는 단어가 많다고 했는데, 요한이 그렇게 긴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답장을 기다리는데 그는 생각보다 짧은 문장을 적었다.

[새벽과 가까운 별이 첫째라고 합니다.]

나는 문장을 읽다 요한을 쳐다봤다.

모닥불의 온기가 서린 푸른 눈이 은은히 반짝였다.

이유를 묻듯 눈썹을 까닥 들어 올리자, 그가 다시 글을 썼다.

[첫 별은 어린 별들이 길을 잃을까 어둠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고, 모든 동생을 순서대로 챙긴다고 합니다.

그렇게 동생들이 어둠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다 가장 먼저 빛 속으로 사라진다고 해요.]

아침이 오면 별이 사라지는 모습을 다정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아포칼립스 남주가 만든 #힐링물 서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종이에 적었다.

[그러면 첫째별은 누가 챙겨 줘요?]

요한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딴지를 걸었는데 그는 오히려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답장을 써 주었다.

[길을 알려 주는 별은 없겠지만, 대신 아침의 배웅을 받을 수 있죠.]

[아침은 가족이 아니잖아요.]

[다른 세계의 존재도 가족이 될 수 있잖습니까.]

푸른 눈동자가 올라온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시선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다시 내려갔다.

[사실 태양도 별인걸요.]

맞는 말이긴 한데.

장난기가 발동해 또 요한에게 시비를 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요한이 계속 말을 적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첫 별은 제가 좋아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걸지도 모릅니다.]

[왜요?]

[첫 별은 태양을 기다려]

그는 글을 적다 멈추었다.

그러고는 말을 돌리듯 다른 말을 적었다.

[졸리지 않아요?]

괜찮다는 의사를 강하게 보이기 위해 단호히 고개를 저었는데, 뭐가 웃긴지 요한이 조금 크게 웃었다.

그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 다른 말을 적었다.

[다른 이야기를 해 줄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이 다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아마도 수많은 설정집에 봉인돼 있었을 이야기들이 그의 손끝을 따라 하나하나 풀려 갔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이 신기했다.

나는 그 어떤 정보도, 시스템의 도움도 없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요한과 보내는 시간은 지금까지 즐겨 온 게임과 다르게 느껴졌다.

뭐랄까.

세상이 아닌 곳에서 꿈을 꾸는 듯 현실감이 없다.

다시 모락모락 훈연이 어지럽힌 설경을 바라봤다.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또 아쉬운 묘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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