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는 턱을 괸 채 골똘히 그 문장을 보다 답을 적었다.
[지금은 성을 지키고 있어요.]
[아, 그만두면 안 되는 일인가요?]
아니면 이직이라도.
무서운 동료를 벗어나 좋은 사람들 틈에서 일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이직을 권했다.
요한은 뭐가 웃긴지 턱을 괸 손바닥에 입술을 파묻고 웃음을 참다 답장을 적었다.
[안타깝지만 수호성은 신의 뜻으로 정해지는 자리라 제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요한은 꽤 긴 설명을 적어 주었다.
마족 사회는 오직 힘으로 서열이 결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16명의 마족에게는 마왕을 지킬 의무가 지어지는데, 그게 16 수호성이라고 했다.
16 수호성 내 서열 또한 대결을 통해 결정된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왕 토벌에 실패하게 되면, 요하네스와 싸우게 되는 건가?
응, 아니야.
우리 제작진이 그렇게 스케일 큰 전투씬을 구현했을 리가.
지금 마족 지대 연동도 버그율이 94%인데, 마족 지대와 사계국의 대전투?
말도 안 되지.
게다가 캐릭터 디자인 비용 아끼려고 노화 구현도 포기한 사람들인데 퍽이나 전쟁씬에 돈을 쓰겠다.
나는 내 망상을 비웃다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래서 마왕 동면지를 찾아 몰래 죽이게 메인 시나리오를 짠 건가?
전투씬 없이 쓱, 목만 따게.
이 게임은 이곳저곳에서 자본주의의 진한 향기가 묻어났다.
그러다 보니 불신도 자연스레 짙어졌다.
톡톡.
내가 딴생각에 빠진 걸 눈치챈 요한이 펜으로 종이를 건드렸다.
나는 계속 집중하고 있던 척 뻔뻔하게 질문을 적었다.
[그럼 아까 남자들도 수호성이에요?]
[맞아요.]
[다들 절 싫어하는 거 같던데 요한은 괜찮은 거예요?]
그는 무슨 뜻이냐는 듯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저는 곧 떠날 사람이지만, 저 사람들은 계속 봐야 하잖아요. 괜히 제 편 들다가 요한이 곤란해질까 봐 걱정돼서요.]
끄적끄적 적고 고개를 드니 요한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가 적은 문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초 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쓱 올라왔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는 턱을 괴던 손을 치우고 답을 적었다.
[그럼 데이지를 죽여도 된다는 말인가요?]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죠! 절대 그런 뜻이 아니죠!]
아니, 뭘 또 그렇게 급발진을 하실까!
[그게 아니라 저를 어차피 경계로 데려다준다고 하셨잖아요? 알아서 죽이겠다고 저 동료들한테 말하고, 절 데리고 성벽을 나가면 되잖아요.]
생존 본능을 불태우며 빠르게 내 말을 설명했다.
부산하게 글을 쓰는 내가 웃겼는지 요한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졌다.
나는 따라 웃지 못하고 내 목숨과 요한의 인맥을 지킬 방법을 마저 적었다.
[요한이 혼자 돌아오면 저쪽 사람들도 대충 알겠죠. 날 죽였거나 사계국으로 돌려보냈거나, 얼어 죽었거나.
하여튼! 저는 곧 돌아갈 테니까 그때까지는 동료들한테 요한도 날 처리할 생각이라고]
글은 거기에서 멈췄다.
요한이 내 펜을 뺏어 갔기 때문이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이 제 품으로 가져가 적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쓱 종이를 내밀었다.
[싫어요.]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펜을 받았다.
힐끔, 요한의 눈치를 보며 적었다.
[왜요?]
요한은 건넨 펜을 받아 다시 답했다.
[눈치 볼 필요 없으니까.]
갑작스러운 반말에 흠칫했다.
내가 혹시 기분 나쁜 말을 했나 싶어 적은 필담을 훑어봤다.
그러는 사이 요한은 또 제 답을 적었다.
[내가 제일 강해요.]
요한도 남주라 그런가?
자기애가 강하네.
흐려지는 시야를 깜빡여 초점을 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요한의 눈에 그 애처로운 발악이 모두 보였는지, 그가 또 웃기 시작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한참 웃던 그는 다시 테이블로 몸을 숙였다.
[근데 진심이에요. 제가 제일 강해요.]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거짓말 같은 말을 적었다.
[데이지한테는 손끝 하나 못 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런 거 신경도 쓰지 말아요.]
그는 잠시 펜을 든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찰나였다. 다시 이어진 문장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눈에 새겨졌다.
[내 손님이잖아요.]
요한은 그 뒤로도 몇 번 나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나 또한 요한을 안심시키듯 알겠다,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불안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불안을 달래는 이상한 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저녁에는 의원에게 치료를 받기를 반복하다 보니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나는 요한에게 부탁해 선물받은 책을 가방에 넣었다.
에스텔라.
왜 내 이야기만 이렇게 길게 적혀 있는 건지, 사계국에 돌아가면 샅샅이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진행 방식에 대한 설정도 있을까 싶어 도서관을 뒤져보았다.
혹시 AI 없이도 글자 수를 채우거나, 남주를 선택하거나, 로그아웃 할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계관 밖, 시스템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오직 세계관을 구성한 스토리 정보만 있을 뿐.
마물, 인물, 지역, 문화.
아쉬운 대로 일주일간 세계관을 학습하는 것에 만족했다.
덕후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무제한 이용권으로 노란집 작품을 마음껏 읽는 기분이랄까.
어쨌든 경계에서 겨울국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마족 지대에서 [결]을 완성해야 하니 차선책을 세우려 했지만…….
실패했다.
“제발 경계를 잘 넘어야 할 텐데.”
가방을 들고 성을 나오자 하얀 말 두 필과 사용인들이 보였다.
말 앞에 서자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의원이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들고 온 가방을 내려두었다.
“---.-.--.--.-”
의원은 늘 같은 말을 반복해서, 이제 그의 말은 얼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태를 한번 보자는 뜻이었다.
팔을 한 번 돌리자, 의원은 뿌듯한지 박수를 짝짝 치며 붕대를 새로 갈아 주었다.
살도 많이 아물었고, 욱신거리던 통증은 아예 사라졌다.
“-.----.-.-.-.----.-”
가방에서 약재를 꺼낸 그가 손짓으로 설명하려다 포기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대신 의원은 고개를 돌려 말 앞에 서 있는 요한에게 마족어로 약재를 설명해 주었다.
“-.-.-----.-.--..--.-”
요한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설명을 마친 의원은 내 작은 짐 가방에 약재를 넣어 주었다.
그리고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다 요한 쪽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프면 요한한테 물어보고 약을 쓰라고요?”
마찬가지로 나도 인상을 찡그렸다가 요한을 가리키니 또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는 내 옷소매를 걷어 상처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세심히 상처를 확인하는 의원을 보며 시큰한 코끝을 쓸었다. 그는 따뜻한 본업 존잘이었다.
“아, 맞다!”
나는 가방 앞주머니를 뒤져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데, 마족어를 몰라 요한에게 부탁해 번역한 편지였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다고, 나중에 또 만나게 되면 좋겠다고. 혹시 사계국에 오게 되면 봄국 이에테르가에서 데이지를 찾아 달라고, 은혜를 갚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족어는 사계국 언어와 길이가 많이 다른 듯하다.
마족어 쪽지는 짧은데 내가 썼던 편지는 꽤 길었다.
며칠 전 요한에게 번역을 부탁했을 때가 생각난다.
길게 적은 내 편지를 본 요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번역은 까다로운 작업인데 장문으로 부탁했으니 그럴 만했다.
그래도 요한은 번역을 해 주었다.
#다정남이 직접 쓴 편지니 아마 내가 쓴 초안보다도 더 따뜻한 문장이 가득할 거다.
나는 다정남의 초월 번역을 기대하며 의원의 표정을 살폈다.
의원은 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바로 종이를 펼쳤다.
“…….”
그런데 편지를 보는 의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점과 선이 가득한 종이를 마주한 그는 심령사진을 본 사람처럼 두려운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틀어 요한을 쳐다봤다.
다시 내게 시선을 내린 의원은 경직된 얼굴로 미소를 지은 채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났다.
“-.-.-.---”
뭐라 중얼거리며 손을 흔든 의원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뭔가 잘못 전달된 거 같은데?
의심 가득한 눈으로 요한을 쳐다보는데, 그는 제 짐 가방을 말에 올리는 중이었다.
요한이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쓱쓱 글을 적어 그에게 내밀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글을 읽어 주었다.
[편지 제대로 번역해 준 거 맞아요?]
그는 내가 장난친다고 생각한 건지 웃음을 터트렸다.
방심하다 피식 나온 웃음이었다.
[의원님 표정 보니까 겁먹은 거 같던데. 혹시 이상한 말 쓰신 거 아니죠?]
요한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펜과 수첩을 빌려달라는 듯.
건네기 무섭게 그가 글자를 적는다.
[사실 독학으로 배운 언어라 아직 실력이 부족합니다. 모르는 단어도 많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운 친구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기분이 들어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오해를 했나 봐요.]
그가 물었다.
[무슨 오해입니까?]
나는 망설이다 솔직하게 말했다.
[혹시, 의원님과 제 사이를 질투해서 몰래 나쁜 말을]
자의식 넘치는 말을 쓰다 나는 얼른 줄을 쫙쫙 그어 글자를 지웠다.
그러나 정수리 위에서 또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미 요한은 내 질문을 본 듯하다.
민망한 눈으로 그를 보자 요한이 다시 펜을 가져갔다.
[뭐, 의원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