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48화 (49/208)

48화.

『협회장은 데이지를 손에 넣을 기회를 계속 노리지만, 그녀의 주변에 거물들이 끼어든다. 마치 신이 그녀를 보호하는 것처럼.

카이엘드 공작, 심지어 황제 피델리오 5세와 엮이는 바람에 이제 그녀를 조용히 데려가는 게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꼭 필요한 존재.

협회장은 그녀를 손에 넣을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

“이, 이게 뭐야!”

나는 경악한 채 책을 떨어뜨렸다.

이름 모를 흑막 씨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스포당했다.

게다가.

“청혼? 청호오오오온?”

이 양심 없는 흑막 새끼!

데이지 부모님을 죽이고 데이지랑 결혼하겠다고?

이 자식 진짜 사패네.

알렉스 네가 선녀로 보이는 날이 와 버렸다. 분발하자. 아니, 분발하지 마.

데이지의 기억이 없는 나는 트레이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복수심을 느낀다든지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인류 보편적인 감정. 막돼먹은 놈의 못된 짓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런 놈들은 천벌받아야 해!”

트리비아나는 1권으로 간략하게 가문을 설명하기에 에스텔라도 그럴 줄 알았는데, 에스텔라는 기록 덕후 집안답게 설정집이 역사서 그 자체였다.

설정 분량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찜찜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내 설정과 ‘제국 악녀의 부내나는 일상’의 초기 설정이 많이 다르다는 거다.

소설 속 여주는 아주아주아주 부자였다.

얼마나 부자냐면 그녀는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작가님이 배경 묘사하기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손가락만 까닥하면 제국 최고의 보물과 미인들이 방으로 들어왔으니 여주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 소설은 짠내라고는 1도 없는 #사이다물이었다.

갈등이라고 해 봤자, 황태자가 그녀를 밖에 나오게 하려고 집으로 배송되던 물건들을 몇 개 가로채는 정도?

빡친 여주가 무도회에 참석해 황태자를 괴롭히고 그런 모습에 또 황태자는 감기고. 뭐, 이런 전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1.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2. 친척인 공작의 집에서 살고 있다.

딱 저 두 가지만 같았다.

메인남주 집착황태자, 서브남주 짭근공작.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을 다 때려 넣은 그 소설을 만나 캐시를 지르며 3일 만에 격파했고, 그 소설을 참고한 캐릭터에 빙의, 아니 접속했다.

그러니 그 내용이 생생한 건 당연지사.

운 좋게 생생히 원작을 기억하고 있는데 다 의미 없다.

나는 옆으로 드러누워 어둠이 내려앉은 설산을 바라봤다.

침대 위에 쌓인 책들을 툭툭 건드리며 답답한 숨을 흘렸다.

“나 무사히 [결] 칠 수 있을까?”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AI 담당자님이 그리워진다.

설국에 있으니 자꾸만 감성적으로 변하네.

빨리 돌아가서 커뮤니티와 AI에 접속하고 싶었다.

나는 팔을 들어봤다. 소매가 주륵 내려가자 붕대로 감싼 팔이 드러났다.

손을 쥐었다 펴 보니, 크게 아프지 않았다.

다 나으려면 며칠이나 걸리려나.

나는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 책을 집었다.

아이스타스.

우리 황제 영애 디아나의 미들 네임이자 엘런의 미들 네임.

역시나 아이스타스의 첫 이야기는 여름 제국의 건국사로 시작됐다.

건국사는 아까 에스텔라에서 본 내용이라 솔직히 재미없었다.

대충 속독하던 나는 황제가 처음 가이아를 만나는 부분에서 멈췄다.

여름국 황제는 세 남자를 사랑한다는 가이아의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몹시 자존심 상해하며 가이아를 여름국 황궁에 가두었다.

#감금물로 시작되는 건국사라…….

“이거지! 재밌겠다.”

#후회남 각을 잡는 황제의 이야기를 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감금은 찰나였다.

봄국과 가을국 황제는 연합하여 가이아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고, 가이아는 그 두 사람을 남편으로 받아들여 짝수 해에는 봄국에서 지내고 홀수 해에는 가을국에서 지냈다.

여름국 황제는 가이아를 되찾아 오고 싶어 했지만, 연속된 전란으로 불만이 극에 달한 신하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포기한다.

슬픔을 잊기 위해 국정에 몰입하고 덕분에 여름국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매일 가이아에게 편지를 써 용서를 구한다.

바야흐로 여름국 황제의 구르기의 시작이었다.

마음 약한 가이아는 꾸준한 여름국 황제의 사죄에 결국 마음을 열었으나, 황제에게는 큰 걸림돌이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채택한 여름국의 혼인법.

이미 남편이 두 명이나 있는 가이아는 여름국의 제국법에 따라 황제와 혼인할 수 없었던 거다.

물론, 큰 고구마는 없었다.

우리 황제님이 망설임 없이 법을 개정하셨기 때문이다.

다처다부제로.

“…….”

황제가 후궁을 여럿 들이고, 후궁도 남편을 여럿 들일 수 있는 세상이라.

평등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흐린 눈으로 아이스타스 가문의 설정을 계속 읽어 나갔다.

어쨌든 무사히 혼인한 아이스타스 1세는 가이아와 낳은 아이를 황제로 올린다.

아이스타스 2세는 아버지가 개정한 법을 야무지게 활용했다.

그는 수많은 후궁을 들였고 자손을 아주 많이 낳았다.

그렇다. 아이스타스의 책이 긴 이유는 서사가 길어서가 아니었다.

중간중간 삽입된 가계도가 엄청나게 길었기 때문이다.

아, #문란남 #문란녀는 내 취향 아닌데.

외워야 할 황제 이름도 많고, 황후와 후궁도 많고, 아들도 많다. 정말 역사를 공부하는 기분이 들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형제가 많으면 꼭 형제의 난이 일어나던데, 여기도 그랬다.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형제를 죽이고, 그렇게 수도 없이 황제의 이름이 바뀌었다.

수백 년의 역사 동안 벌써 10명의 황제가 그 짓을 반복했다.

잔인하고 답답하고.

읽덮을 고민하며 버티다 보니 어느새 4권까지 왔다.

“엥? 벌써 4권이라고?”

에크리반의 책에서 사계국의 역사는 1천 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름국은 고작 5백 년 정도 흘렀을 뿐이었다.

“1권으로 5백 년을 몰아 둔 건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5권을 펼쳤다.

5권을 읽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흘렸다.

아이스타스 일가는 반란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절벽 엔딩이 별거냐고. 이런 게 절벽 엔딩이지…….”

여름국의 마지막 황제는 무시무시한 폭군이었다.

황제가 국정에 관심이 없으니 부정부패가 들끓어 민심이 흉흉했다.

가을국 황제는 여름국의 망조를 기회로 여겼다.

그는 충성심 강한 신하를 보내 여름국 영의정에게 제안한다.

반란을 준비하면 황실을 전복할 군사를 보내 주겠다고.

영의정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백성을 위해서는 폭군을 몰아내야 하나, 그는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충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폭군에게 용기 내 간언한 그의 죽마고우가 죽게 되고 영의정은 반란을 마음먹게 된다.

하나, 그는 신중한 자였다.

영의정은 에크리반의 기록을 구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여름국 황실의 비밀을 조사했다.

생명의 이능을 타고난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으므로.

알면 알수록 이능의 힘은 위대했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영의정은 고민 끝에 폭군이 잠든 새 독살하기로 마음먹는다.

오랜 시간 황궁에서 일을 해 왔기에 그는 황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수십 명의 후궁을 거느린 호색한이었다. 그는 제 눈에 드는 사람이면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상관없이 취했다.

영의정은 고민 끝에 막내 동생을 황궁으로 보낸다.

황제는 새로 들어온 미녀에게 흥미를 느끼고 제 처소로 들인다.

동생은 제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새로운 후궁에게 푹 빠진 황제는 색에 취한 나날을 보내며 불만 세력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영의정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반란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후궁이 된 동생이 돌연 황제를 죽이지 못하겠다고 영의정을 배신한 것이다.

동생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황제에게 마음을 열어 버렸고, 자신도 모르는 새 그를 사랑하게 돼 버렸다.

늘 그의 말을 잘 따르던 동생이라 영의정의 충격은 배가되었다.

동생은 황제에게 반란을 고자질하고 싶지 않다며 여기서 그만두어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이 잘 설득해 황제의 폭정을 막아 보겠다고.

영의정은 동생을 믿기로 했다.

놀랍게도 황제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무에 힘을 쓰고 후궁을 모두 출가시켜 황실 지출을 줄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란은 여름국이 아닌 외세, 가을국이 짠 판이었다.

황제가 폭정을 멈춘다고 해서 기회를 줄 리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가을국이 제일 보고 싶지 않은 결말이었다.

영의정의 배신에 가을국은 방법을 바꾼다.

그가 반란을 준비한 증거를 황제에게 보낸 것.

대노한 황제는 영의정과 함께 반란을 준비한 이들을 옥에 가둔다.

동생은 가족들을 살려 달라고 빌지만, 큰 상처를 받은 황제는 동생조차 옥에 가두어 버린다.

가을국 신하는 옥사로 찾아가 영의정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국경에서 대기 중인 가을국 군사의 도움을 받을 것인지, 이대로 죽을 것인지.

선택권이 없기에 결국 영의정은 가을국의 손을 빌리게 된다.

새벽, 여름국 황도는 빠르게 함락되었다.

황제는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이능을 쓰지 못하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장 총애했던, 그리고 그를 배신하려 했던 사람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이다.

가을국 황제는 자결하려는 동생을 몇 번이고 살려내 여름국 황제의 이성을 잃게 했다.

가을국 황제는 바로 여름국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 군사들이 모든 황족을 잡아들일 때까지 기다렸다.

가을국 황제는 여름국 황실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이들을 샅샅이 찾아냈다.

그리고 한 번에 목을 쳤다.

황제는 상황을 뒤바꿀 수 있는 이능을 가졌음에도 힘 한 번 쓰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후궁은 충격으로 미쳐 버리게 된다.

“……#피폐물은 진짜 주인공한테 너무 잔인해. 피폐물 #새드엔딩은 법으로 금지해야 돼.”

나는 손가락으로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아이스타스 왕조의 몰락을 애도했다.

영의정은 결국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다.

그는 동생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넋을 놓은 동생을 극진히 보살피며 여름국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새로운 황제가 된 영의정은 몇 년 후 첫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런데 죽은 인형처럼 말을 잃어버렸던 동생이 아기를 보며 계속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환생이라 믿는 양.

모두 꺼림칙하게 여겼으나, 오라버니는 동생이 아이를 아이스타스라 부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아이의 이름을 아이스타스라고 지어 버린다.

아이스타스 아르테미스.

황제가 된 그 아이는 역대 여름국의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로 기록된다.

그 후, 여름의 뜻을 담은 그 이름은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아르테미스.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천수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아이스타스’라는 미들네임을 주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디아나랑 엘런의 미들네임이 아이스타스였구나.”

씁쓸한 이야기였다.

나는 디아나 영애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이렇게나 긴 서사를 가졌으면 그녀에게도 뭔가 위험한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 거다.

‘우리 디아나 영애 지켜야 해.’

책을 골똘히 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르테미스 설정도 읽어 두자. 나중에 돌아가면 우리 영애한테 귀띔이라도 해 줘야지.

책을 모두 독파하고 나니 새벽이었다. 나는 바로 도서관으로 갔다.

그리고 아르테미스를 찾아 책장의 제목들을 훑었다.

그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는 게 시간인 내가 그 바늘을 못 찾을 것도 없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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