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나는 세잎클로버 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아낸 사람처럼 팔짝 뛰며 좋아했다.
“---.”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그제야 나 혼자 있는 게 아님을 깨닫고 어색하게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제 입가를 가린 채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웃어 놓고 안 웃은 척해 주는 걸 보니 요한은 확실히 #다정남이다.
그냥 요한이랑 마족 지대에 눌러앉을까?
남주 선택이고, 글자 수고 뭐고 20억 그냥 포기…….
못 하지.
미안해요, 요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본에 미친자인가 봐.
저쪽에서 날 여주로 원한 적도 없지만, 나는 혼자 요한을 밀어내며 책을 꺼내려 사다리를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늘 내게만 호락호락하지 않던 이 망할 놈의 시스템을.
개국 공신 트리비아나 설정은 1권인데, 에스텔라 설정은 5권…… 실화냐.
아주 촘촘하게 흑막 개연성을 설계하신 모양인지 분량이 묵직하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다시 내려와 종이와 펜을 들고 요한에게 다가갔다.
눈으로 무슨 일이냐 묻는 요한에게 나는 글로 물었다.
[여기 있는 책을 방에 가져가서 읽어도 되나요?]
한 번에 읽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 아예 방에 가져가서 밤새 읽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해 주었다.
[반출 가능한 권수 제한이 있나요?]
남의 집 서재를 도서관 취급하듯 묻자 그가 웃음을 흘렸다.
질문을 읽던 푸른 눈동자가 올라온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마음껏 가져가라는 듯.
선생님, 자꾸 그렇게 웃어 주지 마세요. 20억이고 뭐고 자꾸 눌러앉고 싶어지잖아요.
미모가 개연성이라는 시스템 기능은 납득 가능한 개그였다.
요한의 얼굴을 볼 때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영애들이 말하던 비주얼 하이라는 것인가.
인생을 망칠 것 같은 중독성 강한 얼굴이다.
나는 그를 피하듯 2층으로 올라가 에스텔라 시리즈를 꺼내 왔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을 더 골랐다.
아이스타스.
아는 사람의 이름이라 호기심이 인 탓이다.
우리 황제 영애의 책도 5권이었다.
책을 안아 들고 조심조심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데, 언제 다가온 건지 요한이 책을 뺏어 갔다.
“아니에요. 제가 들게요!”
당황한 나는 그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요한은 호락호락한 #다정남이 아니었다.
몸을 돌려 책을 방어하더니, 고개를 기울여 내게 내려갈 것을 재촉했다.
‘줘요.’
‘내려가요.’
무엇 하나 내 의사를 묻는 부분이 없는데, 어째서 다정하게 느껴지는 걸까.
하드모드 맵이 분명한 마족 지대.
#아포칼립스 #생존 #모험 #던전 등 위험한 키워드가 가득해 보이는 곳에 자리한 #다정남.
힐링물의 #다정남과는 다른 따뜻함이 느껴진다.
강압적인 다정이라니.
……취향이었다.
나는 먼저 내려가라 강요하는 푸른 눈빛을 마주하다 못 이기는 척 걸음을 뗐다.
***
마족 지대는 어찌나 해가 짧은지 책 한 권을 읽고 나니 어둠이 찾아왔다.
싫지는 않았다.
등불에 의존해 책을 읽으니 아늑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침대 위에 엎드린 나는 타닥타닥 타는 벽난로 소리를 들으며 계속 책장을 넘겼다.
‘에스텔라.’
놀랍게도 남작 작위를 받은 건 내 아버지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 우리 조상님들은 작위도 없고, 엔트리도 아니고, 부유한 상인도 아니었다.
다만, 이 피에는 남다른 덕후력이 있었다.
“5권으로 쓰일 만했네. 개국 공신에, 반역에 안 끼어 다닌 곳이 없으셔.”
바쁜 선조들의 업적을 보며 헛숨을 흘렸다.
그들은 성조차 없던 평민이었다.
그럼에도 기록이 많은 건 이 피에 역사 덕후, 기록 덕후라는 설정이 있기 때문.
책에 처음 기록된 조상님은 에크리반. 그는 겨울국 황제에게 지식을 인정받아 책사가 되었다.
“오, 라인 잘 타셨네.”
마족과 인간의 싸움에서 이긴 최초의 인류는 영토를 4개로 쪼개 나눠 갖기로 했다.
원래는 겨울의 영역만이 겨울국이었으나, 깡패 같은 겨울국 초대 황제는 봄국, 여름국, 가을국의 영토를 일부 뺏어 사계절 보유국이 되었다.
겨울국 황제는 말 그대로 깡패였다.
다른 3개국 황제들과 달리 그는 이능을 타고났기에 감히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구한 제1강대국, 겨울국 황실이 지닌 이능은 불의 이능이었다.
“응? 알렉스도 생명의 이능이 있었는데.”
가을국 초대 황제한테는 왜 생명의 이능이 없던 거지?
책장을 더 넘기던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울 조상님, 큰일을 하셨구나.”
나의 1대 조상, 에크리반 씨는 3개국 황제들이 영토 분배에 불만을 품자 겨울국 황제에게 조언했다.
3국 사이에 갈등을 만들어 시선을 돌리라고.
그 갈등은 바로 경국지색.
그는 미인을 이용해 봄국, 여름국, 가을국의 치정을 이끌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이아.
생명의 이능을 타고난 대륙 최고의 미녀였다.
그녀는 세 황제의 사랑을 받았고, 황제들은 그녀를 갖기 위해 싸웠다.
마음이 여린 가이아는 세 황제를 모두 사랑했고 그들 모두의 아이를 낳아 주었다.
역시 로맨스 판타지 세계 속 건국사.
#역하렘에 #다같살 엔딩이라.
초장부터 로판 덕후의 취향을 훅 파고 들어오신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다음 권을 읽었다.
가이아의 아이들은 모두 생명의 이능을 타고났고, 그 덕에 봄, 여름, 가을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 사람.
겨울국 황제는 3국 황실이 이능을 갖게 되자 격분하여 에크리반을 찾아 죽이라고 명한다.
사실 에크리반은 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해 사계국의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고, 3개국에 이능을 주기 위해 생명의 이능을 가진 여인을 일부러 소개했던 것이다.
봄국에 머물던 가이아는 황제가 된 딸에게 부탁해 에크리반을 데려와 숨겨 주고 그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친우로서.
“에이,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이거 #소꿉친구물 느낌인데.”
나는 미묘한 감정선을 느끼며 흥미로운 눈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크리반은 제 감정에 대한 기록은 일절 하지 않았다.
심지어 족보에 아내의 이름조차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 있는 아들의 이름은 적었으면서. 그러니 그 아들이 입양아인지 사생아인지 알 수 없었다.
흠, 기록 덕후답지 않은 설정 오류.
절대 실수일 리 없다. 기록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에크리반이 아내의 이름을 적지 않은 이유가 그의 아들이 가이아와 낳은 아이이기 때문일 거라는 망상을 했다.
아닌가?
그러면 너무 막장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계속 책을 읽었다.
어쨌든 봄국에서 지내는 동안 에크리반은 제가 아는 모든 것들을 기록했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기록을 받아 또 다음 지식을 기록하였다.
그렇게 에크리반의 후손들은 수 백 년간 세상의 지식을 기록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가 기록된 문서는 값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문서를 관리하던 후손들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봄국, 여름국, 가을국 심지어 겨울국까지 모두 그들의 기록을 탐한 탓이다.
힘없는 그들은 권력자들이 요구할 때면 기록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기록을 열람한 자는 얻은 지식으로 역모를 꾀해 왕좌를 뒤집기도 했고,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확보했다.
심지어 겨울국의 멸망에도 그들의 자료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뭐야. 생략이 너무 과한데? 대체 어떤 자료를 주신 겁니까?”
나는 혼잣말을 하며 페이지를 뒤적였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기록이 이용당하는 것을 보며 후손은 모든 자료를 불태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차마 태우지 못했다.
그 가치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단 하루.
그 짧은 망설임의 대가는 잔혹했다.
다음 날, 모든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몇 층이나 내려가야 하는 드넓은 지하실을 가득 메웠던 책들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도난을 당한 것이다.
그 일로 후손은 앓아눕고, 그는 제가 아는 것이라도 알리기 위해 성치 못한 몸으로 기록을 이어 가다 작고하게 된다.
단 3권의 책을 남긴 채.
20년 넘게 지하실은 방치되었고, 그의 손자가 우연히 지하실에 들어갔다가 3권의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손자는 봄국 황제를 찾아가 책을 바치게 되고, 봄국 황제는 기꺼워하며 그에게 남작 작위와 남부 영토, 그리고 엄청난 양의 금화를 준다.
그게 내 아버지로 설정된 트레이트 에스텔라였다.
“와, 대체 무슨 정보길래 작위에 돈에 영토까지 줘?”
수도 고위 귀족에게 꿀리지 않는 부를 누리며 살던 트레이트.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딸을 낳고 부를 누리며 행복하게 지낸다.
“이 시점에서 타임라인을 시작해야 했는데!”
부를 누리며 사랑받는 데이지의 과거를 읽다 나는 슬픔을 삼켰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를 넘긴 순간 그 아쉬움을 빠르게 치웠다.
갑자기 데이지가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을 호소하게 된 거다.
트레이트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사라진 기록을 찾는다.
그는 기록에 데이지의 병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을 거라 믿었다.
본 적도 없는 기록에 무한한 신뢰를 느끼며 트레이트는 3개국을 돌아다니지만, 결국 기록을 찾지 못했다.
트레이트는 매일 신에게 기도하며 제 딸을 살려 주면 평생 봉사하고 세상의 이로움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그를 찾아와 데이지의 치료법을 알려 준다.
그를 신의 사자라 여긴 트레이트는 딸에게 그 방법대로 약을 먹이고, 기적적으로 데이지는 병을 치료하게 된다.
하지만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트라우마가 생긴 트레이트는 원체 몸이 약했던 딸을 과보호하게 되고, 그는 세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딸에게 선물하며 집에서 행복을 찾도록 한다.
“……이렇게 집순이의 역사가 시작된 건가.”
뭔가 애틋한 것 같으면서도 참, 이상하다 싶었다.
감금이잖아, 이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음 권을 넘겼다.
데이지는 타고난 기록자였다.
어릴 때부터 기록을 좋아하던 그녀는 사관을 꿈꾸는데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돈 많은 덕후.
수집을 해 본 이라면 알 거다.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데이지는 아버지가 가져다준 물건들을 팔아 고서들을 수집했다. 엄청난 가격의 고서뿐만 아니라 금서까지.
어머니,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우니 데이지는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사회에 발을 디뎌 본 적도 없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수집을 넘어 제가 필사한 고서와 금서를 자랑하듯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지가 필사한 금서를 본 겨울국 재건 협회장이 호기심을 품고 그녀를 찾아온다. 협회에서 함께 일하자고.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데이지는 철없이 트레이트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고, 트레이트는 데이지가 위험한 일을 해 왔음을 알고 격노한다.
트레이트는 겨울국 재건 협회를 찾아가 다시는 제 딸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데이지는 더 꽁꽁 집 안에 갇힌다.
이렇게 에스텔라가의 비극이 시작된다.
데이지를 손에 넣고 싶었던 협회장은 에스텔라 부부를 사고로 위장해 죽인다. 고아가 된 데이지에게 청혼서를 넣을 준비를 하던 협회장.
그러나 그는 한발 늦고 만다.
뜬금없이 그녀의 사촌이라는 이에테르 공작이 찾아와 데이지를 데려간 것.
“……잠깐만, 이건 내가 타임라인을 시작한 시점이잖아.”
나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5권의 남은 페이지를 확인했다.
다음 페이지가 없었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의 뒷면에 쓰인 몇 줄을 마저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