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소리 없는 필담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궁금한 걸 묻고 그는 대답을 해 주는 식의 대화였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어요?]
요한은 여름국어가 서툰 모양인지 질문을 한참 바라보다 답을 적고는 했다.
그는 턱을 괸 채 내 짧은 물음을 응시하다 펜을 들었다.
스윽.
하얀 종이 위로 동그라미 세 개가 그려졌다.
[마족 지대와 사계국으로 이어지는 경계는 세 곳입니다.]
그는 동그라미 아래로 단어를 하나씩 적었다.
[다리, 절벽, 숲.]
나는 이상한 다리를 건너다 절벽으로 떨어졌다.
그곳을 말하는 건가?
[경계는 마족 지대와 사계국의 힘이 뒤섞여 있다고 합니다. 그 구역을 벗어나야 경계를 건너갈 수 있다고 하죠.]
저 구역을 통과해야 겨울국에서 마족 지대로, 혹은 마족 지대에서 겨울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게임 맵을 이동하는 게이트처럼.
나는 그에게 펜을 받아 물었다.
[세 구역 중 아무 곳이나 가면 되나요?]
[네, 그런데 간혹 세 구역이 하나의 길처럼 이어진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세 개의 동그라미 위로 직선을 쭉 그었다.
[그걸 구역에 갇혔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되면 경계를 통과할 수 없다고 하죠.]
그는 씁쓸히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경계를 넘어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계속 이어지는 그의 답을 바라봤다.
[어쨌든 경계를 통과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인데, 그대가 이곳으로 넘어온 걸 보면 아마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가장 오른쪽에 있던 동그라미에 체크를 했다.
[성에서는 자작나무 숲이 가장 가깝습니다. 몸이 회복되면 이곳으로 출발하는 걸로 하죠.]
요한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건넸다.
툭.
햇살이 내려앉은 자리 위로 투명한 상자가 놓였다.
모서리에 맺힌 무지개 사이로 익숙한 종이가 보였다.
이동 스크롤.
그런데 아주 오래 보관해 온 모양인지 종이 끝이 삭아 있다.
요한이 다시 펜을 잡았다.
[경계를 넘은 뒤 사용하면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머뭇거리다 한 문장을 덧붙였다.
[잘 아시겠지만.]
사계국에서 사 온 건가?
[사계국의 이동 스크롤인가요?]
그는 잠시 내 질문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지 않나요?]
뭐가 웃긴지 요한이 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머금은 채 그가 답을 썼다.
[선물 받은 거라 그 값은 알지 못합니다.]
경계를 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 했으니 구하기 어려웠을 거다.
사계국에서도 비싼 스크롤인데 말도 못 하게 귀한 물건이겠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차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목숨도 구해 줬는데 선물까지 받다니.
나는 줄 게 없는데.
하지만 염치없게도 이 호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 아주 필요한 물건이었으니까.
나는 그의 선물을 거부하지 못하고 답을 썼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요한은 내 감사 인사를 보다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햇살의 영역에 들어온 은빛 머리칼이 반짝였다. 마족이 아니라 천사처럼 보일 만큼 따뜻한 빛이 그의 윤곽을 뒤덮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그가 적은 답을 확인했다.
[갚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를 돕는 건 제 영광이니.]
“…….”
당신 솔직히 말해.
마족 아니지? 대천사지?
마족 사회에 잠입한 첩자잖아.
나는 은인을 심문하고 싶은 괴이한 충동에 휩싸여 시선을 피했다.
이어지는 침묵이 불편해 물끄러미 종이를 보다 다른 대화 소재를 생각해 냈다.
[여름국어는 어떻게 공부했어요?]
차분히 깔린 그의 시선을 따라 촘촘한 은빛 속눈썹이 그림자를 그려 냈다.
파도가 일듯 눈동자에 어린 햇살이 살랑살랑 물러나다 덮쳐 오길 반복한다.
이래서 눈빛에 빠진다는 표현을 쓰는구나.
익사할 것 같아.
주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내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힐끔 나를 쳐다봤다.
그는 집중해 달라 부탁하듯 톡톡 펜으로 종이를 건드렸다.
죄송합니다, 집중할게요.
미안한 마음에 바로 종이를 쳐다봤다.
[여름국 언어만 공부한 건 아닙니다. 사계국 언어를 모두 공부했습니다.]
책으로 언어를 배우는 게 가능한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요한이 도서관의 책을 둘러보다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책을 보라는 듯.
[여기 있는 책들은 전부 5권씩 있어요. 5가지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언어 규칙을 찾아 익혔습니다.]
천재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흔한 남주 버프인가?
요한은 내 떨떠름한 표정을 보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설명을 더 자세히 해 줬다.
이 도서관에는 책들이 5권씩 있다고 한다. 봄국, 여름국, 가을국, 겨울국, 마족 지대. 5개의 언어로 번역된 책.
하지만 누가 그 책을 썼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수십 년 전부터 자리해 왔다고 말할 뿐.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도서관 서재를 살폈다.
정말로 같은 커버를 가진 책들이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뭉친 책들은 딱 5배수였다.
5권, 10권, 15권.
[실례가 안 된다면 책을 읽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따라 책장으로 다가갔다.
표지 사이에 자리한 한글이 유독 눈에 띈다.
단어로 된 제목들.
비손, 카투스, 천호, 나티, 홍체.
홍체?
익숙한 단어에 나는 그 얇은 책을 꺼내 읽었다.
『붉은 몸을 가진 마물. 지능이 뛰어나 사람을 기억할 수 있고…….』
빠르게 글을 읽던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얼마 전 마주쳤던 홍체에 대한 설명이었다.
책에는 글자뿐만 아니라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나는 다른 책을 한 권 꺼내 또 읽어 보았다.
천호.
『여우처럼 생겼으나 인간으로 몸을 바꿀 수 있는 마물.
주로 여름국 산맥에 서식하며 때때로 인간계로 내려온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설명.
그보다 더 익숙한 그림.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를 미인이 쓰다듬고 있는 삽화가 있다.
구미호인가?
대체 이게 뭐야.
나는 책들을 몇 권 빼 더 읽었다.
지옥의 문.
무서운 제목에 흠칫했으나 곧 차분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겨울국 경계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 겨울국 마지막 황제가 마왕과의 전투에서 남긴 이능의 부산물로 황제가 제 불을 제거하는 것을 잊고 도망친 탓에 세상에 남겨졌다.
다자르 설원에 남은 그 불길은 설원에서 50년째 불타고 있다. 마왕은 그 거대한 불을 보며 ‘지옥의 문’이라 이름 지었다.』
다자르 설원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고?
1층에 있는 책들은 게임 속에 존재하는 식물, 동물, 마물, 장소 등에 관한 책 같았다.
빽빽하게 꽂힌 1층의 책들을 보다 2층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눈을 찌푸렸다.
책 제목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트리비아나.’
저거 우리 공작부인 영애 성 아니야?
정확히는 그녀의 남편 성이지만.
나는 그 책에 시선을 둔 채 2층으로 올라가 바로 책을 꺼냈다.
『봄국 건국 시 트리비아나가의 기여도는 15대 공작가 중 단연 최고였다.』
15대 공작가라.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3대, 5대도 많다 싶은데 15대라니.
유서 깊은 공작 인플레이션 현상에 눈이 흐려졌지만, 납득하려 애쓰며 트리비아나 책을 읽었다.
이건 가문 설정집인 듯하다.
전기처럼 족보도 들어 있고, 가문의 특징도 적혀 있고, 야화도 담겨 있다.
책장을 넘기던 나는 흥미로운 구절을 찾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던 트리비아나 일족은 수 번의 회귀를 거쳐 미래를 바꾸었다.
봄국 초대 황제는 트리비아나의 도움을 빌려 제위에 오르고, 트리비아나가에 중부 영지와 작위를 수여했다.』
오, 회귀 능력.
『트리비아나가는 명예를 중시했다. 하여 그들의 족보에는 이혼 선례가 없다.』
엥? 우리 시에나 영애 이혼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시에나의 앞날을 걱정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긴 나는 입을 벌렸다.
『이혼 선례가 없는 이유는 회귀 이능 덕이라는 설이 있다.
트리비아나 가주는 직계 후손이 혼례를 올릴 때, 후손의 배우자에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석 반지를 선물한다. 특이하게도 반지에 가주의 피를 담는데, 그렇게 하면 트리비아나의 능력이 타인에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리비아나의 일원이 된 배우자는 가주에게 받은 회귀 반지를 통해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트리비아나가에 이혼 선례가 없는 이유는 바로 반지를 받은 배우자가 이혼하는 대신 시간을 돌려, 아예 혼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치. 이혼보다는 파혼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글을 마저 읽었다.
『물론, 이것은 트리비아나가의 전설일 뿐이다. 초대 가주에게 회귀의 힘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수백 년의 시간 동안 희석된 피에 아직도 그 이능이 남아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
시아버지가 주는 회귀 반지.
이거 익숙한데.
‘쓰레기, 줍지 마세요. 쓰레기통에 양보하세요.’에서 본 설정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소설 여주도 은발에 자색 눈동자를 가졌다.
세상에! 이거 원작을 각색한 캐릭터 설정집이구나.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감탄했다.
시에나는 ‘쓰레기, 줍지 마세요. 쓰레기통에 양보하세요.’의 여주였어.
흥미진진한 눈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는데 벌써 책이 끝났다.
뭐야, 이게 끝이야?
시에나의 이야기는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찌푸렸던 인상을 폈다.
생각해 보니 이게 맞았다.
빙의한 이상, 세계관 설정 이상의 원작 스토리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전개가 바뀔 테니.
빙의물은 같은 설정으로 시작해도 감정선, 시점, 에피소드가 바뀌며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원작은 그저 거들 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책을 바라봤다.
지금 눈에 담기는 가문만 해도 수백 개다.
여주의 가문뿐만 아니라 남주, 악역, 엑스트라의 가문까지 모두 설정이 있는 모양이다.
세계관을 이루는 동물, 식물, 마물뿐 아니라 캐릭터 관계를 만드는 가문까지.
이 많은 책은 일종의 세계관 설정집이었다.
소품으로 책을 새로 만드는 대신 하드 디스크에 넣어 둔 설정 데이터 복붙한 듯하다.
하긴 있는 자료 쓰면 되는데 뭐 하러 귀찮게 책을 만들어.
중세 세계관에 ‘수학의 정X’ 저작권 사 와서 배포할 수도 없고.
그런데 100여 개의 시나리오가 얽힌 세계관이라 그런지 설정량이 어마무시하다.
이렇게 많은 작업을 거쳐 세계관이 만들어지는구나.
대단하네.
제작진의 피, 땀, 눈물, 야근, 특근이 담긴 설정집을 훑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제목을 살피며 부지런히 ‘에스텔라’를 찾았다.
이런 기회가 있다면 내 설정부터 보는 게 인지상정.
그런데 책 배열이 가나다순도 아니고 ABC순도 아니라 찾는 게 힘들었다.
그러나 결국 찾아냈다.
“에스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