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협탁에 쟁반을 올려 두던 남주가 움직임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정작 그 소리를 들은 남주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고민하듯 잠시 시선을 내릴 뿐.
남주가 숟가락에 있던 수프를 제 손등으로 떨어뜨렸다.
왜 저러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그를 빤히 쳐다보는데, 그가 손등을 들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제 붉은 입술을 벌리더니 손등의 수프를 핥았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
젖은 살갗을 핥는 붉은 혓바닥.
19금 소설 다독으로 더럽혀진 영혼이 그 야릇한 모습에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주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다 고개를 젓고 다시 수프를 내게 떠 주었다.
먹어도 안 죽는다는 건가? 그런 의심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은 오해를 만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청순한 오해를 하실까.
저런 남주가 주는 음식이라면 독이 들어 있어도 먹을 나인데.
나는 움찔거리는 입꼬리에 바짝 힘을 주어 무표정을 유지했다.
남주가 내 캐릭터를 눈치채면 충격받을까 걱정이 된 탓이다.
이렇게 된 거 청순한 이미지 한번 지켜 보자.
남주는 내가 의심을 거두었다고 여겼는지, 숟가락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왔다. 경계심 많은 유기견에게 밥을 주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배려심 넘치는 태도였다.
“제가 먹을게요.”
나는 숟가락을 뺏어 쥐려다 신음을 흘렀다.
“하윽.”
힘줄을 다친 건지 손에 힘을 주자 통각이 덮쳐 온 탓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욱신거리는 팔을 쳐다보는데 커다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락.
그는 내 소매를 걷어 붕대를 살폈다.
다행히 상처가 벌어진 건 아닌지 피가 새로 올라오지는 않았다.
달그락.
그가 내게 상체를 기울였다.
입을 맞추러 다가왔다 해도 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러나 그와 내 사이에는 숟가락이 있다. 속을 따스하게 데워 줄 고소한 수프가 담긴 숟가락이.
나는 머뭇거리다 입술을 벌렸다. 숟가락 끝을 문 채, 그가 흘려주는 액체를 마셨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자리한 푸른 눈동자. 통하는 말이 없는데도 무언가가 시선을 타고 전해진다.
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듯 꿀꺽 따뜻한 수프를 삼켰다.
그는 곧바로 새로 수프를 떠서 건넸다.
기분 탓인가.
그가 내게 수프를 먹일 때마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고소한 수프 냄새보다 소나무와 눈이 뒤섞인 차가운 체향이 더 짙게 느껴질 정도로.
한 입, 한 입 수프를 받아 마실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경찰, 누가 경찰 좀 불러 주세요.
남주가 저 극악무도한 미모로 다정하게 굴어요. 제 심장을 터트려 죽일 생각인가 봐요.
판사님, 이건 살인 미수입니다. 형벌은 당장 내 남주로 만들어서 인생을 더럽히는…….
콰득.
순간 머릿속을 스친 주접에 숟가락을 콱 물고 말았다.
짐승 같은 행태에 놀란 듯 남주가 한쪽 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
“…….”
……나 설원에서 그쪽 슬롯에 넣지 않았어요?
답을 찾지 못한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남주의 윤곽이 여러 겹으로 보일 만큼.
‘담당자님, 저 혹시…… 슬롯 추가되었나요?’
그러나 94%의 버그율을 자랑하는 우리 AI 담당자님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남주랑 목이 닿았던 거 같은데.
흐릿한 기억을 곱씹는데, 돌연 뺨으로 온기가 번졌다.
남주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고 있었다.
그 손길은 턱으로 내려가더니 살짝 압력을 가했다.
“아.”
턱 근육이 꾹 눌리자 자연스레 입이 벌어지고 숟가락은 자유를 찾았다.
숟가락이 목적이었는지 그는 다시 수프를 떴다.
아무래도 저 수프를 모두 먹이는 게 목표인 듯하다.
그동안 보아 온 그의 눈빛 중 가장 의지 넘치는 눈빛이었다.
반항하지 않고 다시 숟갈을 물자, 그는 살짝 숟가락을 기울여 수프를 입안으로 흘려 넣어줬다.
꿀꺽.
삼켜진 소리가 만족스러운지 그의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진짜 누가 경찰 좀 불러 주세요. 가만히 있는 사람 마음에 불을 지르잖아요. 방화범이에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남주는 그저 제 의무를 다하듯 성실하게 수프를 먹였다.
어느새 수프 그릇이 바닥을 보였다.
아쉽다, 아쉬워.
물 부족 국가의 마지막 식수원이 고갈된 것처럼 비통한 마음이 들었다.
그릇 바닥을 슬프게 바라보는데, 남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또 내 표정을 오해했는지, 빈 그릇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더 먹고 싶냐고?’
나는 세차게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무리다.
수프는 양이 엄청 났다. 남주 얼굴에 홀려 다 먹었지만 걸으면 출렁 소리가 들릴 정도로 위장이 빵빵한 물풍선이 됐다.
다행히 남주는 이해한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는 문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려는 건가.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 남자가 문가를 고갯짓했다. 같이 나가자는 듯이.
***
고요한 복도에 그와 나의 발걸음 소리가 겹쳐 울렸다.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내가 있던 성과 다른 성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였다.
구름다리는 특이하게도 수평이 아닌, 건너편 성의 꼭대기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트인 난간 너머로 마족 지대가 한눈에 담겼다.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기는 아득한 높이였다.
꼭대기에 날 데려가는 모양인지 남주는 쉴 새 없이 계단을 올랐다.
이따금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피긴 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 힘들어…….”
마침내 30층쯤 되는 성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남주는 거대한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득히 높은 철문에 새겨진 그림을 보며 나는 입을 벌렸다.
그림은 지옥을 형상화한 듯 바닥에서 불길이 일고, 천장에서는 고드름이 사람을 찌르듯 떨어졌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실제 크기로 조각되어 그런지 전쟁터 안에 들어선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정말 쓸데없는 디테일이야.
다행히 그 기분 나쁜 상념은 길어지지 못했다. 뻑뻑한 경첩 마찰음이 내 정신을 잡아챈 탓이다.
끼익.
남주는 방문을 열듯 육중한 문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밀었다.
그를 따라 안에 들어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은 도서관이었다.
3층 높이의 거대한 도서관.
곳곳에 나선형 계단이 있고, 돔형 천장 유리에서 쏟아진 빛이 실내를 밝혔다.
“와…….”
시즌 2는 이계 컨셉인지, 마족 지대는 어두우면서도 밝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뽐냈다.
던전 같기도 하고 고대 신전 같기도 하고, 지옥 같기도 하고 천국 같기도 하다.
나는 햇볕에 따스히 달궈진 나무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실내를 둘러봤다.
수를 셀 수 없는 다양한 책이 끊임없이 시야에 담긴다.
자박자박.
언제 책을 꺼낸 건지 품에 4권의 책을 안은 남주가 나선형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내가 기댄 책상에 책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응시하다 살포시 미간을 구겼다.
똑같이 생긴 4권의 책.
맨 하단에 적힌 페이지 숫자 또한 같다.
그러나 쓰인 문자는 전부 달랐다.
나는 오직 두 권의 책만 어떤 문자로 적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놓인 책은 한글로 적혀 있었고, 네 번째 놓인 책은 알파벳으로 적혀 있었다.
예전에 AI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유저에게 내장된 기본 스킬은 ‘승마’와 ‘언어’인데, 이 세계관은 4가지 언어를 차용하고 있다고.
봄국은 프랑스어, 여름국은 한국어, 가을국은 스페인어, 겨울국은 영어.
AI 연결이 끊기면서 필수 스킬이 사라진 모양인지 봄국과 가을국 언어는 해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름국 언어만 해석되어야 하는데 나는 네 번째 놓인 책도 읽을 수 있었다.
토익 900을 목표로 달려온 취준생 버프와, 이직을 위해 스피킹에 주말을 바쳐 온 K-직장인 버프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남주를 응시했다.
그는 내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 나의 언어인지.
그는 내가 마족이 아닌 사계국 사람임을 알았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하다 두 번째 책을 손으로 짚었다.
시스템 연동이 해제된 탓에 기본 스킬이 모두 사라졌지만, 한글은 시스템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주는 내 손가락에 시선을 둔 채 서랍을 열어 펜과 종이를 꺼냈다.
이내 그가 무언가를 적어 내게 보여 주었다.
[여름국 사람입니까?]
그는 여름국, 그러니까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네! 여름국어를 할 줄 아세요?”
그러나 남주는 이해하지 못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책으로 배운 언어라 소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
그는 다시 무언가를 적었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 문장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궁금할 게 많을 텐데 가장 먼저 물어온 게 내 이름이라니.
남주는 내게 펜을 건네고는 의자를 빼 주며 앉을 것을 권했다.
이 필담이 오래 진행될 거라 알려 주듯.
나는 의자에 앉아 답장을 적었다.
[데이지. 이게 제 이름이에요.]
종이를 돌려주기 전에 한 문장을 더 적었다.
[그쪽은요?]
그는 종이를 가져가지 않고 내 쪽으로 몸을 숙여 글을 적기 시작했다.
순간 밀려온 남주의 체향에 나도 모르게 몸을 물렸다.
선생님, 이렇게 불쑥불쑥 들어오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안 돼. 그만해.
은인에게 주접부리지 마.
나는 격한 마음의 갈등을 겪으며 필담에 집중했다.
그제야 반듯이 적히고 있는 그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요하네스. 요한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요한.”
요한이었구나.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읽자 남주가 움찔했다.
나는 변명하듯 ‘요한’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요한.”
이게 네 이름이라고. 이름을 말한 거지, 이상한 말을 한 게 아니라고.
해명하는 마음이었으나 그는 조금 다르게 이해한 듯했다. 따라 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듯, 가만히 글자를 눈에 새기다 내 말을 따라 했다.
“요한.”
세상에, 요한 선생님 목소리 무슨 일이세요.
불에 달군 캐러멜을 귀에 부은 것처럼 고막이 끈적해졌다.
바로 옆에서 들은 감미로운 목소리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시선을 피해 종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내 앞으로 손을 뻗어 왔다.
하얀 손가락에 쥐어진 펜이 글자를 적는다.
문장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달아올랐던 뺨이 차갑게 식어 갔다.
나는 그가 적은 문장을 몇 초간 곱씹다 요한을 쳐다봤다.
진심인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내려 그의 제안을 읽었다.
[사계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