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시야 위로 살굿빛 온기가 번졌다.
눈꺼풀이 간지러워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속눈썹에 맺힌 햇살에 시야가 하얗게 타들어 갔다.
“---..-.---.-.--.-!”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뜻을 알 수 없었다.
타다다닥.
빠르게 다가온 목소리 주인이 억지로 내 몸을 일으켰다.
흐린 시야로 앳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갈색 로브를 입은 단정한 차림새였다.
남자는 신중한 표정으로 내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눈꺼풀을 억지로 벌리더니, 이번엔 제 혀를 길게 내밀었다.
혀를 내밀어 보라는 건가?
몽롱한 정신 때문에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삐죽 튀어나온 작은 살점이 성에 차지 않는지, 남자가 눈을 찌푸리다 내 혀를 쭉 잡아당겼다.
“우으!”
짜요. 짜!
남자의 손가락은 짜고 썼다. 약초를 잔뜩 만진 건지 풀 맛이 강했다.
그 덕에 정신이 확 들었다.
고개를 물리니 남자가 순순히 나를 놔주었다.
그는 협탁에 두었던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는 다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
“…….”
어린 의원과 나는 시선을 교환하다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막막했던 탓이다.
고민 끝에 그는 햇살이 들어오는 유리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두 손을 모아 손등에 뺨을 대고 자는 척을 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그의 어색한 연기를 떨떠름한 눈으로 지켜봤다.
남자는 방금 일어난 척 기지개를 켜더니 협탁에 있던 새 붕대를 들고 팔에 감는 시늉을 했다.
“아!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붕대를 갈아 끼우라고요?”
나도 따라 기지개를 켜고 붕대 감는 시늉을 하니 남자가 신나서 손뼉을 쳤다.
“---.-.---.-!”
목소리 톤이 높아진 것을 보니 칭찬하는 것 같았다.
환자에게 이토록 친절한 눈높이 설명이라니.
덕분에 나는 타 종족임에도 그와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했다.
의원이 손가락 3개를 폈다.
‘하루 3번 약을 먹고.’
피곤한 듯 하품을 한다.
‘일찍 자고.’
그러다 인상을 와락 쓰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빙긋 웃었다.
‘스트레스 받으시면 안 됩니다.’
병원에 가면 늘 듣던 처방이라 이해하기 쉬웠다.
내 이해력이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 기여도의 8할을 차지했으나, 나는 겸손하게 미소를 지으며 의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의원이 더 환히 웃으며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이해한 건 아니지만 손짓을 보아하니 그런 뜻인 듯하다.
달칵.
그가 나가자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그제야 방을 둘러보았다.
두툼한 가죽 카펫과 회색 돌벽.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실내다.
중세시대 고성 같네.
거친 벽을 눈으로 훑던 나는 격자 유리창을 응시했다.
순백의 도화지를 붙여 둔 것처럼 창밖의 세상이 새하얗다. 설산이 유리를 하얗게 물들인 탓이다.
시야에 담기는 정경은 차가운데 방은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아늑했다.
타닥타닥.
누군가 피워 둔 벽난로가 공기를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나는 일렁이는 불꽃을 보다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혈관을 타고 퍼지던 열기.
그 뜨거운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목을 쓸며 눈을 감았다. 곧 설원에서 느꼈던 감각들이 나를 덮쳐 왔다.
어두운 밤하늘과 차가운 바람. 별빛처럼 반짝이던 은빛 머리칼과 붉은 가면.
현실감 없는 기억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나는 시선을 내려 몸을 살펴보았다.
손가락까지 덮어 버린 커다란 남성용 튜닉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나를 데려온 건지 알 것 같았다.
3번 남주.
뺨을 꼬집으려 오른손을 들던 나는 신음을 흘렸다.
“으윽.”
팔에서 불길이 번지듯 엄청난 통각이 일었다.
소매를 걷어 보니 붕대로 칭칭 감긴 팔이 보였다. 붉은 촛농을 떨어뜨린 것처럼 하얀 붕대 위로 핏자국이 번져 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마물에게 뜯어 먹히던 끔찍한 통각이 되살아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끔찍한 게임 진짜!
눈물이 핑 돌았다.
대체 왜 나한테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한숨을 내쉬던 나는 그 답답한 숨을 치워 버렸다.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일단 살아 있잖아.’
그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 걸 보면 그렇게까지 운이 나쁜 건 아니야.
방 안을 둘러보던 나는 두툼한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있던 슬리퍼를 신고 창가로 다가갔다.
높은 곳에 방이 있는 건지 창밖의 마족 세상이 한눈에 담겼다.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끝에는 산처럼 높은 성벽이 있었다.
특이한 건 그 성벽이 얼음으로 지어졌다는 거다.
성벽 입구에는 여신인지 남신인지 성별을 알 수 없는 장발 미인이 세상을 등진 채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절대 인간이 만들었다 믿을 수 없는 거대한 크기와 섬세한 인체 묘사.
그 정교한 조각이 마왕의 존재를 믿게 만든다.
미인의 양 옆으로 16명의 마족이 조각되어 있었다.
설원에서 보았던 마족의 모습이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로브. 얼굴을 가린 기괴한 나무 탈.
하회탈처럼 광대까지 올라간 입꼬리와 관자놀이까지 처진 눈꼬리가 대비된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담겨, 어떠한 감정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없기에 광기가 느껴지는 탈이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신성한 느낌이 들었다.
‘마족한테 신성하다니…… 이거 지옥 가도 할 말 없는 감상평 아니냐고.’
나는 찜찜한 눈으로 마족 마을을 눈에 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얼어 있던 유리창에 뽀얀 김이 서렸다.
자연스레 잔상으로 시선이 떨어지는데,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뒷모습만 봐도 내가 남주라 자랑하는 넓은 어깨. 그 위로 시리도록 하얀 은발이 햇살에 은은히 반짝인다.
남주 앞에 선 갈색 로브 사내가 쉴 새 없이 입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내 몸을 살펴 준 의원이었다.
내 상태를 보고하는 중인 듯하다.
누가 왜 그런 착각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의원의 부산한 손짓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답해야 했다.
의원은 붕대로 팔을 감는 시늉을 하고,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세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뭐라고 말했다.
정신 사납게 손짓 좀 그만하라는 듯.
의원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허술한 정경에 웃음이 나왔다.
마족은 무서운 줄 알았는데, 딱히 사계국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움찔대던 의원의 시선이 휙 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의원의 눈이 커졌다.
의원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3번 남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권태로운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다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남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쪽을 쳐다봤을 뿐.
그런데도 나는 그 시선에 바짝 굳어 버렸다.
나는 기지개를 켜는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슬금슬금 창가에서 물러났다. 남주의 시력이 좋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좋겠지.
남주잖아.
남주에게 모자람이 있을 리가.
침대로 걸터앉은 나는 내 발을 쳐다봤다.
“신기하네…….”
접질렸던 다리가 말끔히 나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다.
뼈를 맞춰 준 건가.
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현재 상황을 되짚어 봤다.
마족 지대. 마족.
생각은 빨리 끝났다.
“아무것도 모르겠네.”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시스템도 안 되고. 나 어떡하지…….”
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담당자님을 불러봤다.
“담당자니이임…….”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다.
울적한 목소리만 공허한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질 뿐.
이제 습관적으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키고 양손으로 뺨을 짝짝 쳤다.
좌절은 나중에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 애썼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불안이 생각을 지배했다.
“사계국 맵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쉬운 대로 여기서 남주를 고르고 완결을 쳐야겠지.
그 생각을 하자 참았던 한숨이 다시 터졌다.
시스템 연결이 안 되는데 남주 선택은 어떻게 해?
기적적으로 94%의 버그 발생률을 뚫고 선택할 수 있다고 쳐. 글자 수 업로드는 제대로 될까?
마족 지대에서 분량을 채울 수 있을지, [결]을 완성하고 로그아웃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답 없는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눈을 감고 다시 생각에 집중하는데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셔도 돼요.”
마족이 내 말을 이해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답했다. 허락의 의미로 들리길 바라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문밖의 사람은 내가 허락한 걸 이해한 듯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려 똑바로 앉았다.
3번 남주가 들어왔다.
역시나 여긴 그의 성이었는지, 그는 로브를 벗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를 관찰하던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쟁반이 보였다.
쟁반 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프 그릇이 놓여 있었다.
침대 앞까지 다가온 그가 작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마주 앉았다.
그는 제 무릎에 쟁반을 올려 두고는 바로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떴다.
“…….”
나는 코앞에 있는 숟가락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먹으라는 건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숟가락을 쳐다보기만 하자, 거부한다 여겼는지 그가 숟가락을 거두었다.
그때, 고소한 수프 향에 자극된 위장이 꼬르륵 소리를 냈다.
남주 앞에서만 울린다는 여주의 배꼽시계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