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모래 폭풍처럼 설원을 쓸고 온 바람에 눈가루가 가득했다.
“으윽.”
차갑게 얼굴을 할퀴는 눈 결정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달빛에 의지하는 푸른 설경은 아름다웠다.
죽기에 딱 좋은 날씨라던 영화 주인공의 대사가 생각나는 절경이었다.
나는 사막을 건너는 상인처럼 두툼한 솜옷을 여미며 계속 걸음을 뗐다.
사박, 스으윽.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아직 반도 오지 못했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걸으니 숲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숲에서 밀려오는 바람의 간격이 짧아지는 것 같았다.
훅 밀려온 바람은 3초 뒤 다시 크게 한 번 밀려오고, 잠잠해졌다가 다시 5초 뒤에 크게 밀려왔다.
마치 파도처럼.
자박.
숲까지 열 걸음도 채 남지 않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나무 기둥 사이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반짝였기 때문이다.
아몬드처럼 가로로 길게 찢어진 붉은 눈동자였다.
분명 나는 걸음을 멈췄는데 그 윤곽은 점점 선명해졌다.
“크르으으으.”
낮은 울림소리와 함께 붉은 눈의 주인이 눈 위로 발을 내디뎠다.
……저게 뭐야?
늑대도 아니고 멧돼지도 아닌, 기괴한 짐승이 몸을 낮춘 채 나를 응시했다.
늑대 같은 몸에 엄니를 가진 마물이었다.
그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내게 다가왔다.
“미친……."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뿌연 숨이 흩어졌다.
나는 처음으로 로그아웃을 고민했다.
날카로운 이빨에 조각나는 고통은 죽어도 느껴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지금 로그아웃은 될까?
‘담당자님!’
속으로 애타게 AI를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죽음을 선택할 수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배가됐다.
애초에 바짝 얼어 있던 혈관, 그 안에 남아 있던 피마저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몸속의 모든 수분이 증발한 듯 시야가 아찔했다.
정말로 기절할 것 같았다.
안 돼. 정신 놓으면 안 돼.
“하아…….”
지금 기절하면 정말 죽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억지로 깨끗한 시야를 만들었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마물과 간격을 유지했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물러난 만큼 마물들이 거리를 좁혀 왔다.
가장 앞에 선 마물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뒷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튀어 오를 준비를 하듯.
나는 굳어 버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그게 놈들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타악!
스프링이 튕겨 오르듯 마물이 뛰어 올랐다.
“크아아아앙.”
우두머리의 뒤를 따르던 마물도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겁에 질린 채 뒤돌아 도망쳤다.
하지만 다친 다리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르게 움직일 뿐.
콰득.
순식간에 놈들에게 붙잡혔다.
“꺄악!”
마물이 내 등을 할퀴었다.
찌이이이익.
두툼한 솜옷이 찢어지자 하얀 솜이 함박눈처럼 공중으로 흩어졌다.
앞으로 넘어진 나는 등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재빨리 뒤돌아 마물을 응시했다.
내 위에 올라탄 마물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또 다른 마물이 내 다리를 물어뜯었다.
“놔!”
나는 발을 버둥거리며 마물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옆에 있던 마물들이 동시에 달려드는 바람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상체에 올라탄 마물이 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촤악. 촤악.
놈들의 이빨에 방한 옷이 사정없이 물어 뜯겼다.
그 소리가 소름 끼쳤다.
허벅지로, 배로, 종아리로 달려든 마물들의 이빨에 천이 정신없이 뜯겨 나가고 그때마다 팝콘처럼 솜이 허공으로 튀었다.
“윽!”
기어코 살점을 찾아낸 마물 하나가 내 팔을 물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단말마처럼 새어 나온 신음은 고통에 짓눌려 이어지지 못했다.
엄청난 통각에 숨도 못 쉬고 달달 떨었다.
죽는다. 어떡해. 나 진짜 죽나 봐.
두려움이 설움으로, 설움이 극한의 공포로 정신없이 뒤바뀌며 통증을 뒤덮었다.
“크르르릉.”
귓가로 들리는 흥분한 울음소리에 솜털이 바짝 섰다.
저항할 힘조차 모두 사라지고 다리에 차가운 감각이 번져 갔다.
솜옷이 모두 찢긴 것이다.
포기한 나는 눈을 감았다. 본능적으로 새어 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콱.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족쇄에서 풀려난 듯 가벼워졌다.
나는 천천히 팔을 내려 시야를 확인했다. 물기로 번진 시야에 믿을 수 없는 모습이 담겼다.
바닥에서 솟은 고드름에 마물이 꿰뚫려 있었다.
내 다리와 팔을 물어뜯던 다른 마물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끼잉. 끼잉.”
숲을 보던 놈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다 뒤를 도는 찰나, 화살이 날아와 놈들을 꿰뚫기 시작했다.
“컹!”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마물이 쓰러지고, 동료의 죽음에 놀란 나머지 놈들이 설원으로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바닥에서 솟아난 얼음에 발이 붙잡히고 자비 없이 몸통으로 화살이 박혔다.
푹. 푹.
모든 마물들이 약속이라도 한 양 바닥에 처박혔다.
침묵이 일어야 하는데, 십수 마리의 죽음 위로 시끄러운 소리가 겹쳐졌다.
“----.-.---!”
“--....--.-.”
환호 소리 같기도 하고, 구호 소리 같기도 한 경박한 소리였다.
그 뜻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경쾌한 감정은 선명히 느껴졌다.
기쁘고 신난 것처럼.
소리의 주인은 한둘이 아니었다.
말 울음과 사람 목소리가 뒤섞인 소음을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마족인가?
여긴 마족 지대니까 마족이겠지.
잠시 차올랐던 희망이 다시 썰물처럼 밀려갔다.
마족이 내게 호의적일 것 같지 않았다.
사계국에서 우리가 마왕을 죽이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던 것처럼, 저들도 사계국 인간을 혐오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물의 시체를 쳐다봤다.
긴 그림자가 마물의 시체를 뒤덮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마족이 마물의 시체를 살피더니, 밧줄로 꽁꽁 묶어 말에 매달기 시작했다.
마족 몇 명이 더 몰려와 같은 일을 반복했다.
사냥한 마물을 수거하는 듯했다.
그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찬 바람 때문인지 그들은 모두 얼굴에 붉은 탈을 쓰고 있었다.
이제 내 근처에 널브러진 마물들을 처리할 차례였는지, 그들이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야에 담긴 끔찍한 모습에 나는 움찔했다.
붉은 나무 가면은 꼭 홍체의 얼굴 같았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나 하얀 목덜미가 보이지 않았다면 마물이라 생각했을 만큼 기괴한 탈이었다.
그들은 나를 한참 쳐다보다 뭐라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
“---.----.-..--.-.-.---”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있는 버프가 유용한 순간인데, 버그라니.
내게만 잔혹한 시스템의 일 처리에 이제 실소가 나왔다.
“장난하나, 진짜…….”
웃음을 흘리자 그들이 움찔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결론을 내렸는지 메고 있던 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날카로운 화살촉은 나를 향하고 있다.
나를 죽일지 말지 논의한 것 같았다. 죽이기로 결론이 난 것 같고.
마물에게 뜯어 먹히는 것보다는 이쪽이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무사히 로그아웃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저 한 방으로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나는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짝 긴장한 세 남자가 제 손을 웅크린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발 앞에는 얼음 결정에 뒤덮인 활과 화살이 떨어져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아니, 상황을 파악할 힘이 없었다. 피가 차갑게 식는 감각조차 흐릿했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을 잡아챈 존재가 이쪽으로 오는 듯했다.
그들의 시선이 내 뒤로 꽂히는 걸 보니.
시야가 어둡게 물드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자박.
갑자기 시야가 높아지며 몸이 뒤로 꺾였다. 축 처진 몸이 누군가의 팔에 늘어진 미역처럼 걸린 탓이다.
나는 그제야 나를 안은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느릿하게 보였다 사라지는 시야로 남자의 외형이 담겼다.
하얀 로브, 붉은 가면, 은빛 머리카락.
남자가 천천히 제 가면을 내렸다.
그러자 기억 속에서 잊힌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3번 남주네…….”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그날처럼 또 그에게 구해진 모양이다.
위기에 처한 여주를 구하며 등장하는 남주라니.
메이저 취향에 진심인 가 선택한 S급 남주 후보다웠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으면 캐시가 쌓였을 텐데.
“아까워라…….”
체온이 많이 떨어진 모양인지 잇새로 나온 김조차 흐릿했다.
숨이 끊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다행히 로그아웃 기능이 먹히는 모양이다.
눈꺼풀 힘이 풀어지며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3번 남주가 푸른 눈동자를 내려 내 목덜미 근처를 응시했다.
그는 나를 안은 채, 입으로 장갑을 벗고는 내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맞닿은 살갗을 따라 열감이 퍼져 갔다.
기분이 아닌 감각.
데워진 피가 심장으로 흘러왔다. 그러자 따뜻한 막이 하나 돋아난 것처럼 심장에서 끊임없이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 열기는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그가 집어넣는 온기를 느꼈다.
마족의 이능은 빙결이라고 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목이 뒤로 꺾이는 찰나, 남주가 다급히 내 머리를 받치는 게 느껴졌다.
그 반사적인 움직임에 그와 내 상체가 맞물렸다.
[‘요하-- --.-엠 실---.’가 .-슬롯에 -.--니다.]
희미한 알람을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