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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42화 (43/208)

42화.

“잠깐만요!”

내 목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지며 협곡 사이를 울렸다. 나는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긴 마족 지대예요. 돌아가야 해요!”

마족 지대에 들어선 것도 무섭지만, 무엇보다도 이 다리가 내 두려움을 자극했다.

분명 다리의 방향은 동쪽.

마족 지대 경계를 넘지 않는 방향이었다.

나는 짙은 안개를 보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이 다리는 대체 어떻게 우리를 마족 지대로 옮긴 걸까.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두려움을 꾹 누르고 소리쳤다.

“다리 끝으로 돌아갈게요! 거기서 만나요!”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뭐야, 무섭잖아.

갑자기 웬 #공포물이야.

나는 연기에 휩싸인 채 구명줄처럼 고삐만 움켜쥐었다.

‘담당자님, 이거 뭐예요? 또 버그예요?’

[마족 지대 진입으로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장난치지 마세요.’

[--.-.-.------.-.---.-]

[유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확인 완료.]

[--.-.--. 게이트 입장을 허가합니다.]

노이즈 소리와 기계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상태창이 알 수 없는 문자와 한글을 번갈아 보여 줬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이게 뭐야.”

답 없는 한탄이 연기 속으로 흩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말 머리를 돌려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꺅!”

갑자기 말이 사라졌다.

바닥에서 올라온 연기가 말을 삼켜 버린 것이다. 그 하얀 연기가 뭉쳐지며 내게 다가왔다.

“으악, 저리 가!”

겁에 질린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낙마했는데 왜 아프지 않지?

나는 연기에 파묻힌 채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프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으아아악!”

나는 연기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연기를 벗어나자 주변 광경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푹.

두툼한 눈에 떨어진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검은 바탕 속 짙푸른 선 하나.

이곳은 깊은 골짜기 바닥이었다.

조개 안에서 살짝 벌어진 껍데기 틈으로 하늘을 보는 기분이었다.

절벽이 어찌나 높은지 밤하늘이 얇은 실처럼 보일 정도로 검은 암벽이 모든 시야를 꽉 메운 것이다.

그 어디에도 내가 걷던 다리는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욕을 삼켰다.

“미친 시스템 진짜…….”

나는 속으로 심한 욕을 내지르다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손을 내려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검은 세상에 색채라고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남색 하늘, 그리고 그 아래 대칭을 이루는 하얀 눈길.

절벽 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그려 낸 길이었다.

사아아아.

협곡에 고인 바람이 눈 위에서 파도처럼 움직였다.

한기가 끊임없이 밀려온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막막함을 꾹 누르고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담당자님, 여기 대체 어디예요?’

[마족 지대는 현재 개발 중인 맵으로 정보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딱딱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돌아갈 방법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다시 묻자 밝은 알람음과 함께 분홍색 상태창이 켜졌다.

[천릿길도 한 걸음---.--! 한 발을 --.------. 첫걸음이 당신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거예요.]

“…….”

나 진짜 많이 참은 거 같아.

그러니까 나와 봐요. 담당자님.

담당자님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 볼 테니까!

속에서 천불이 일어 와락 인상을 구기는데, 다시 딱딱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마족 지대 진입으로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나는 손에 닿은 눈을 콱 움켜쥐고 씩씩댔다.

“악! 짜증나!”

빨간 마물도 나한테만 달려들고, 다 같이 다리에 올랐는데 나만 버그에 휩쓸리고.

“시스템 이 미친놈아! 대체 왜 나한테만 이래! 왜!”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내지른 소리가 절벽 안에서 메아리쳤다.

“왜!”

“나한테만!”

“이래!”

그 소리가 다시 내 귓가로 파고드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내 목소리가 아닌 기분.

누군가 내 목소리를 삼키고 제 목소리로 뱉어 낸 것처럼 소름 돋는 미성이 되돌아왔다.

마족 지대 협곡.

알 수 없는 마물이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타임워프! 타임워프 하자.

타임워프를 쓰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다시 겨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상태로 타임워프를 하면?

이름 모를 마물의 뱃속에서 눈을 뜨는 건 아닐까?

타임워프는 정해진 미래로 건너뛰는 건데, 마족 지대로 떨어진 지금 내 미래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조정 경기 당일로 타임워프 하는 바람에 폭군의 비에른 납치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처럼.

게다가 마족 지대와 사계국은 연동되지 않는다며.

그럼 몸이 사계국으로 이동했다 해도, 의식은 못 갈 수도 있는 거잖아.

어찌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나는 손을 말아 쥐었다.

“하아, 나 진짜 어떡해.”

울음 섞인 목소리가 뿌연 김과 함께 새어 나왔다.

고요한 협곡 사이로 두려움에 압도된 내 목소리가 퍼졌다.

결국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건 게임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세뇌했지만, 살갗이 얼어붙는 감각과 다리의 통증이 버그에 휩쓸린 내 두려움을 자극했다.

한참을 울던 나는 숨이 짧아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푸른 밤하늘과 달빛이 보였다. 억지로 찢은 종이처럼 경계가 우툴두툴한 어둠을 눈에 담다 나는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려 내 앞에 깔린 하얀 길을 응시했다.

눈 때문인지 겨울 한기 때문인지 손의 감각이 무뎌졌다.

이대로 얼어 죽어 절벽 엔딩을 칠 바에는 살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아!”

그리고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가 시큰거렸다.

감각 없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다시 천천히 일어났다.

“으윽!”

다리가 부러진 건지 지면에 발을 올릴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 진짜, 가지가지 하네.”

설움에 또 눈물이 맺혔다.

아득한 눈길이 물에 젖은 듯 흐려진다.

나는 눈을 깊게 깜빡여 시야를 깨끗하게 닦아 내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낙마했는데 다리만 다친 거면 다행이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정도면 난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나는 모스 부호처럼 발자국을 남기며 골짜기 사이를 걸었다.

사박, 스으으.

눈 위로 깊게 찍힌 점. 그 옆으로 그어지는 얇은 선.

사박, 스으으, 사박, 스으으.

음산한 내 발걸음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었다.

“하아.”

정말 죽을 것 같았다.

혈관이 얼어붙는 고통과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는 힘.

그것에 온 신경을 빼앗겨 어둠도, 저 어둠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를 마물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아, 진짜 X 같은 게임.”

새어 나온 숨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뺨으로 달라붙는다.

아무리 힘들어 봤자 게임이야.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질 수는 없어.

사실 인공 지능에게 진 인간이 이미 많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빡빡 우기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새나가는 온기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좁은 눈길이 확 넓어지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으로 달빛을 반사하는 하얀 벌판 때문에 눈이 부셨다.

골짜기의 끝, 그곳에는 넓은 설원이 있었다.

나는 몇 발자국을 더 내디뎌 완전히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살았다!”

어둠을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차올랐다.

나는 뒤돌아 골짜기를 쳐다보았다. 아득한 높이의 산이 방금 커팅된 케이크처럼 얇게 벌어져 있었다.

위로 올라가면 다시 겨울국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이상한 연기를 거친 게 찜찜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게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이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아, 저길 어떻게 올라가야 하나…….”

나는 절뚝이는 다리를 내려 보다 손으로 허벅지를 문질렀다.

일단 지금 몸 상태로는 절대 절벽을 오를 수 없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틀어 암벽의 끝을 쳐다봤다.

뒤로 돌아가면 완만한 산길이 있지 않을까? 산길을 찾으면 올라가기 쉬울지도 몰라.

다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내가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이다.

자박.

나는 다시 뒤돌아 설원을 쳐다봤다. 설원 너머로 바람에 살랑이는 침엽수림이 보였다.

나무들이 거친 바람을 따라 음산하게 울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저 숲으로 가서 나무로 부목을 대고, 불을 피워 조금 쉰 다음에 길을 찾자.

나는 두 손을 모아 입김을 호호 불어 손을 녹인 뒤 걸음을 뗐다.

할 수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20억도 중요하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시스템이 자꾸만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힌다는 피해 의식이 든 탓이다.

그 장난질에 무력하게 희생되고 싶지 않았다.

승부욕이 차오른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생존 의지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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