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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41화 (42/208)

41화.

“마족에게 인간 수준의 지능이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도서관을 관리하는 가을국 학자의 말에 나는 심드렁하게 그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의 얼굴 앞에 떠 있는 상태창을 쳐다봤다.

[마족은 인간과 똑같은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족의 우월성을 나눌 수는 없으나, 분명 그들은 인간과 다른 사고와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같은 지능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물론 종족이 다른 만큼 사고방식이나 성향은 다르겠지만요.”

나는 상태창을 베껴 답했다.

그러자 학자가 흥분 어린 얼굴로 손뼉을 쳤다.

“오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렇다면 마족의 이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족의 이능은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빙결력입니다.]

얼음을 만드는 힘이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실컷 만들어 먹을 수 있겠네.

“참 부럽고 그리운 기능이네요.”

“……그리우시다고요?”

그는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물렸다.

이 학자도 제 주인을 따라 나를 흑막이라 의심하고 있다.

그들의 의심을 풀어 주려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내어 주고 있는데, 무의미한 짓 같기도 하다.

대체 언제 날 흑막 롤에서 놔줄래!

그런데 이능의 설명이 끝나지 않았는지 상태창에 새로운 글씨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흙과 나무는 얼지 않기에 힘이 통하지 않습니다. 생명체의 성장을 관장하는 생명 이능과 생명체의 성장을 억제하는 빙결 이능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얼음과 나무의 약점은 불. 겨울국 황족이 지닌 불의 이능만이 빙결 이능과 생명 이능을 압도합니다.]

얼음, 생명 그리고 불.

뭐야, 이거.

물, 공기, 흙, 불.

그리스 시대 철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머리가 복잡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머릿속이 복잡해서 흥미를 잃은 걸지도 모르고.

나는 학자를 흘깃거리다 슬쩍 운을 뗐다.

“알렉스 황태자님 말이에요…….”

“예? 예. 예?!”

그는 알렉스를 대화 소재로 선택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다급하게 굴렸다.

알렉스의 평소 인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분에게 치유 능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홱홱 내저었다.

“절대! 말도 꺼내지 마세요! 전하가 치유 능력을 쓰시는 걸 근 몇 년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해 주시긴 하나 봐요?”

“해 주시긴 하죠. 원하시는 대가를 받으시면요.”

“대가요?”

“전에 마르셀라 공작님이 황태자 전하께 공녀님의 치료를 부탁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마차 사고로 다시는 걷지 못하게 된 딱한 분이셨죠.”

그는 침울한 건지 두려운 건지 목소리를 떨며 말을 이었다.

“전하는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으시고도 순순히 치료를 해 주지 않으셨어요. 공작님이 남부 영지 절반을 황실에 상납하고 나서야 겨우 고쳐 주셨죠.”

영지의 절반?

나는 내 허벅지를 손으로 쓸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얼마짜리 시술을 무료로 받은 거지.

그는 입을 달싹이다 내게 몸을 바짝 붙인 채 속삭였다.

“어쨌든, 전하가 무엇을 요구하실지 모르니 절대, 절대로 부탁하지 마십시오.”

“네. 절대 안 할게요.”

그런데 저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말이죠. 선불로 치유를 받았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눈물과 함께 그 질문을 삼켰다.

대체 왜 알렉스 놈이 날 치료해 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디아나도 치유 이능을 쉽게 쓰는 놈이 아니라 했는데.

심지어 알렉스는 생색도 내지 않고 몰래 치료를 해 줬다.

갑자기 착해져서?

그럴 리 없지.

타국 황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도 모른 척하고, 제 나라 귀족에게 격렬히 삥을 뜯고 난 후에야 치료를 해 주던 천성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놈에게 내가 몰랐던 #다정남 키워드라도 있던 건가?

알렉스의 지난 행동을 떠올린 나는 빠르게 그 생각을 치워 냈다.

이 세상에 여주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다정남은 없다.

고로 이 호의는 계략일 텐데.

으으, 머리가 안 좋으니 남주 놈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네.

나는 내 부족한 지략을 탓하며 한숨을 삼켰다.

다행이라면 알렉스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나 혼자 며칠 내내 눈치를 봤을 뿐이다.

무언가를 요구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알렉스는 그저 휴식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으로 우리는 3일간 기지에서 지내며 탐색 진로를 바꾸었다.

마족 지대 경계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던 방향을, 아예 마족 지대 경계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걸로 말이다.

그는 마족 지대 마물이 내려온 길이 있을 거라며, 그 길의 흔적을 따르면 마왕을 찾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마족 지대 마물들이 가파른 낭떠러지를 어떻게 건너온 건지 궁금한 듯했다. 그 방법에 마왕이 겨울국으로 넘어온 비밀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 부질없다 생각했다.

그저 집에 가고 싶을 뿐.

스크롤을 타고 도착한 마족 지대 경계.

그곳은 바람부터 남달랐다.

가만히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으앗.”

세찬 바람에 모자가 흔들려 얼른 움켜쥐었다.

봄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 인생에 #모험물 키워드는 넣어 본 적이 없는데, 왜 생뚱맞게 에베레스트산 등반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생에서도 여행을 떠날 때면 호캉스와 맛집 투어에만 관심을 두던 나였는데.

만약 내 인생의 사전을 만든다면 ‘익스트림’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거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자욱한 하늘을 바라봤다.

‘……근데 나 왜 여기 있니.’

나는 봄국에서 비주얼 하이에 취해 온갖 디저트를 맛보며 빙의 인생을 낭비하고 싶다고.

웅크린 집순이.

내 특성 좀 봐.

난 집순이란 말이야.

집순이를 K2 등반에 끌고 오면 어떡해.

시스템 씨, 이런 식으로 유저 취향 못 읽고 다른 취향 강요하면 망한다?

소비자가 얼마나 냉정한 줄 알아?

난 #모험물 걸리면 이 게임 바로 지울 거야.

물론, 지금은 20억 때문에 참고 있지만.

“하아.”

빼앗긴 #힐링물 키워드를 찾습니다.

저도 다른 영애들처럼 취향에 맞게 빙의 생활을 즐기다 20억을 타고 싶어요.

이쯤 되면 시스템의 차별이 익숙해질 만한데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시린 마음을 다독이며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이제 2주 남았으니 조금만 버티면 봄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1건의 메시지가 수신됐습니다. AI 담당자 ON 상태로, AI 담당자 시스템과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웬 메시지?

수신을 허락하자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나: 영애, 괜찮아요?]

돌아보니 디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디아나: 뭔가 심각해 보여서]

[아니에요. 그냥 혼자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내 표정이 심각한 줄도 몰랐네.

나는 바짝 언 얼굴 근육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한 번 따라 웃어 주었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디아나 아이스타스 아르테미스’로부터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기프티X이야?

아니, 여기에 사용처가 있긴 합니까?

[아이템 ‘여주 버프 복사’ 1개를 인벤토리에 추가합니다.]

선물 기능도 어이가 없는데, 아이템 이름은 더 기가 막혀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디아나: 제 버프 ‘일도’를 복사했어요. 꼭 검이 아니어도 나뭇가지나 팔을 휘두르면 ON 되니까. 혹시라도 위험한 일 생기면 사용해요.]

그녀는 내가 또 마물에게 공격을 당할까 겁먹은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제 버프를 복사한 아이템을 선물해 줬다.

[영애,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저 정말 괜찮아요!]

[디아나: 아니요. 내 마음이 편치 않아요. 마족 지대도 가까운데 호신용으로 하나 가지고 있어요.]

폐하, 그렇게 어진 인성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 하십니까!

나는 세계관 절대자를 걱정하는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을 하며 눈물을 삼켰다.

캐시라도 돌려줄 생각으로 상점에 들어갔다.

여주 버프 복사는 20캐시.

내가 보유한 캐시는 18캐시.

2캐시가 모자라다.

일단 18캐시라도 보내고 나중에 2캐시 쌓으면 드려야지.

‘담당자님, 캐시 선물해 주세요.’

[유저 간 캐시 공유는 불가능합니다.]

[마음을 담아 아이템을 선물해 보세요.]

AI 담당자는 캐시 대신 아이템을 선물해 보라며 자연스럽게 결제를 유도했다.

과금에 미치셨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태창을 노려보다 현실과 타협했다. 내 캐시로 살 수 있는 아이템 중 그녀에게 가장 유용해 보일 만한 거로 골랐다.

[‘AI 연동 메시지 무제한 이용권’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응. 바로 디아나 아이스타스 아르테미스에게 선물해 줘.’

1캐시 아이템 18개를 구매해 선물하면 되지.

아이시스와 디아나는 ‘AI 연동 메시지 무제한 이용권’을 쓰니까 이용권이 떨어졌을 때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메시지를 받은 디아나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디아나: 영애, 이런 거 주지 말아요. 지금도 이용권 너무 많아요.]

[헉, 그럼 다른 걸로 드릴까요?]

[디아나: 아니요. 다른 아이템도 많아요. 인벤토리에 공간도 얼마 안 남아서 아이템 부담스러워요.]

인벤토리에 넣을 곳이 얼마 없다니.

부내 넘치는 대사에 흠칫했다.

디아나는 정말로 아이템 처리가 곤란한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히려 폐를 끼쳤나.

미안함에 나는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이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고마워요 영애.]

순순히 받아들이자 디아나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요? 하트 치우세요!]

[디아나:♥♥♥♥♥♥♥♥♥♥♥♥♥♥♥♥♥♥♥♥♥♥♥♥♥♥♥♥♥♥♥♥♥♥♥]

후궁 취급에 맛들인 디아나는 종종 저런 메시지를 보내며 나를 놀렸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디아나와 눈웃음을 주고받는데,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다리를 건너야 할 것 같군.”

알렉스의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세상을 뒤덮은 눈안개 너머로 두 개의 산봉우리가 보였다.

아니, 그것은 산이 아니었다.

산처럼 높은 다리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그 사이에 누군가 다리를 세워 놓았다.

현수교처럼 둥글게 휘어진 난간과 그 위에 자리한 조형물이 짙은 안개 너머로 윤곽을 드러냈다.

다리는 앞에 선 사람이 손톱만 해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박탈감이 느껴지는 체이스의 목소리에 모두가 무언으로 긍정했다.

나는 홀린 듯 아득히 높은 다리를 바라보다 말을 몰았다.

다리는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듯 여기저기 깨지고 금이 가 있었다.

정교하게 배열된 검은 돌에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바닥을 쓸고 올라간 시선을 따라 난간 조형물이 눈에 담겼다.

미끄럼틀처럼 부드럽게 내려오는 곡선 위에 환하게 웃고 있는 천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검은 돌로 조각되어 그런지 천사들은 묘하게 악마 느낌을 냈다.

검은 날개도, 짓궂게 웃고 있는 표정도.

꼭 살육을 지켜보는 잔혹한 아기 악마 같은 모습.

아, 나 반전 영화 너무 많이 봤나 봐.

나는 내 불안증을 털어 내려 고개를 저었다.

툭.

그때 머리 위로 차가운 감각이 퍼져 갔다.

다시 고개를 들자 하얀 눈송이 하나가 코끝에 달라붙었다.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천사의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눈송이를 보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동그란 하늘이 보였다. 마치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처럼 내가 선 자리만 둥글게 안개가 거둬진 것이다.

그런데 구름이 이상했다.

우리는 마족 지대 경계를 따라 수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홍체의 습격이 있기 전까지는 북쪽을 항해 올라온 터라, 구름이 북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걸어왔다.

하지만 마족 지대 경계를 따라 수평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구름이 동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걷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은빛 구름이 북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북쪽으로 걷던 그때처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걸 수도 있어서 말하기 애매했다.

[담당자님,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지도 보여 줄 수 있어요?]

탐사 도중 길이 헷갈릴 때면 담당자님에게 지도를 보여 달라고 말해 길을 찾았다.

이번에도 유저 특권을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나타난 문자와 고막을 파고든 소리에 나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마족 지대는 현재 개발 중인 맵으로 지도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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