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매달 1캐시로 언제 어디서나 로판 전문 AI가 엄선한 BGM을 감상하세요! 로판 몰입감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차게 광고 멘트까지 속삭였다.
나는 흐린 눈으로 상태창을 보다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이거 광고 아니야?
광고 관람하면 캐시 준다더니?
[광고 관람 보상으로 0.5캐시가 적립됩니다.]
원래 줄 생각이었는지 생각하기 무섭게 바로 캐시가 적립됐다.
나는 돈 쌓이는 소리를 듣다 손바닥에 턱을 괬다.
공돈 생긴 김에 사치나 부려 볼까?
음악이 만족스럽기도 했고, 늦은 밤 도서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구매 욕구가 샘솟았다.
나는 캐시 상점으로 들어가 ‘BGM 1달 이용권’을 결제했다.
로판 BGM 이용권은 새로 나온 서비스인지 최상단 배너에 떠 있었다.
근데, 게임 아이템은 런칭 전에 다 만들어 두는 거 아닌가?
한 번에 열면 좋을 거 같은데 왜 시기에 따라 순차적으로 풀리는 걸까?
실시간으로 영애들의 의견을 반영해 업데이트되는 것처럼 말이야.
이윽고 흘러나온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불필요한 의심을 가져갔다.
알 게 뭐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한가 보지 뭐.
나는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다시 펜을 들었다.
[특성 버프 ‘명필 필사가’ ON]
사각사각.
평온한 선율과 어우러진 펜 소리를 들으며 서류 정리를 마쳐 갈 즈음이었다.
“바람의 변화와 마물 습격에 관계가 있는 건가?”
“으악!”
언제 온 건지 알렉스가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전하, 기척 좀 내 주세요!”
알렉스는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조용한데 내 발소리가 안 들렸다는 거야?”
BGM에 심취한 탓에 알렉스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혼자 움찔하는데 알렉스는 별 관심 없는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의 시선은 노트와 기록지에 머물렀다.
그는 아예 노트를 들어 삼검의 필기를 자세히 살폈다.
한참 글을 읽던 그가 물었다.
“마물이 나타난 이유는 바람과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맞아?”
“……제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응. 그대는 뭐든 다 알 것 같거든.”
알렉스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혀서.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생각하기 무섭게 내 버프가 떠올랐다.
나는 망설이다 AI 담당자님을 불렀다.
‘담당자님, 마족 정보 검색 버프 켜 주세요.’
[특성 버프 ‘마족 정보 검색’ ON]
‘바람이 바뀐 이유가 홍체의 등장과 관련이 있나요?’
[홍체의 등장은 시스템 오류로 겨울국 환경과 연관이 없습니다.]
진짜 다 아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본 마물은 마족 지대에 사는 놈들이에요. 위에서 내려온 거라 동선이 겹칠 리 없으니, 삼검 씨가 포착한 바람의 변화와는 관련이 없을 거예요.”
“마족 지대 마물인 건 어떻게 알아?”
“뭐든 알 것 같다고 한없이 믿으시더니, 인제 와서 출처를 물으시네요.”
내 대답에 웃음 포인트가 어디 있다고 알렉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 웃음을 무시하며 홍체에 대한 지식을 주었다.
“그 마물은 홍체예요. 본체가 제 몸을 복제해서 무리 짓고 다니는데 본체만 제거하면 전부 사라지는 마물이죠.”
그런데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펜을 움켜쥐었다.
“……그것도 적을까요?”
“아니.”
알렉스는 제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탁 접었다. 그러고는 내 기록지를 덮듯이 내려 두었다.
“쉬어. 오늘 고생 많았잖아.”
“그렇죠.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하긴 했죠.”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런데 갑자기 알렉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답지 않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불편하게 살짝 일그러진 미간과 움찔거리는 입매가 낯설었다.
몇 초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변명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데.”
머뭇거리던 시선이 내게로 흘러왔다.
“도망칠 생각은 아니었어.”
도망?
설원에서 아이시스 영애한테 세뇌당한 걸 말하는 건가?
“그 자리에 혼자 두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그는 답답한지 숨을 길게 내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군. 어쨌든 미안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지금 사과하시는 거예요?”
아니, 안 어울리게 사과하고 그러지 마.
그리고 사실 사과할 일도 아니었다. 아이시스가 자신의 능력을 써서 남주들을 세뇌했던 거니까.
그들이 버그에 휩쓸릴까 봐 디아나와 아이시스는 남주들을 기지로 먼저 보내고 나를 데려간 거였다.
하지만, 이 진실을 알려 줄 수는 없겠지.
그건 캐붕 포비아나 세계관의 혼돈 방지 때문이 아니었다.
남주들은 본인을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감정을 느낄 뿐 아니라, 가치관을 형성하며 성장한다고 한다.
이 세계를 게임으로 대하는 아이시스조차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애들이 자기가 게임 속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그러니 이건 배려였다.
내 침묵이 불편한지 괜히 헛기침을 한 알렉스가 물어왔다.
“아픈 데는 없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네, 멀쩡해요.”
“손목은?”
“손목이요?”
“엘런이 대신 기록을 하겠다고 그러던데. 손목이 아파 보인다고.”
그는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엘런의 배려를 무시하는 저 태도를 보니 회의감이 든다.
정말 저놈에게도 인간적인 가치관이 있을까?
“신경 쓰지 마세요. 공작님께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 잘했어.”
봐라.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빈말이라도 바꿔 준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저러면서 날 두고 와서 미안하다고 하니 진심으로 느껴질 리가.
알렉스는 잠시 눈으로 내 몸을 훑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멀쩡해요. 빙판에 부딪혀서 허벅지가 좀 욱신거리는 거 빼고요.”
“그래.”
그는 느릿하게 답했다.
에스닉 무늬의 붉은 카펫과 어두운 원목 책장이 놓인 도서관. 장난으로라도 밝은 분위기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귓가로 들리는 노랫소리 때문인지, 알렉스의 주변으로 햇살 같은 온기가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기묘한 감각이 곧 전신을 덮쳐 왔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혈관이 간질간질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흡사 여주가 남주에게 감정을 느끼는 순간처럼.
뭐야, 나 얘한테 반한 거 아닌데? 아니야! 절대 아닌데?!
정색하는 찰나 알렉스가 테이블에서 몸을 떼어 냈다.
“내일 봐, 데이지. 잘 자고.”
그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도서관을 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는 잠시 알렉스가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이 기이한 기분을 털어 내고 싶어 필기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기록을 마친 나는 일어나 금고로 다가갔다.
기록집을 넣고 문을 닫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허벅지가 아프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불쾌함도, 옷감에 스치는 쓰라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치마를 걷어 허벅지를 확인했다.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멍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어디 갔지?”
서둘러 건물을 나왔지만 이미 알렉스는 사라진 뒤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설원만 보일 뿐이다.
아니, 왜 갑자기 날 치료해 줘?
이능 함부로 안 쓴다며?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질문 때문에 잠시 어지러웠다.
“진짜 속을 알 수가 없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을 안고 나는 내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자박.
문 앞에 도착한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어둑한 인형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엘런이 문 앞 울타리에 앉아 있었다.
“공작님.”
엘런을 불러 봤지만, 그는 잠이 들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공작님.”
어깨를 흔들자 그제야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추운데 여기서 뭐 하세요? 세상에, 얼마나 기다리신 거예요?”
어디 아픈가 싶어 손등으로 이마를 눌러 봤다가 깜짝 놀랐다. 몸이 얼음장이었다.
“얼마 안 됐어.”
신뢰감 없게도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새나왔다.
“일단 들어오세요. 차 한잔 드릴게요.”
나는 동사 직전의 엘런을 일으켜 집 안으로 데려갔다.
불씨가 남아 있던 난로에 장작을 조금 더 넣고, 난로에 걸린 봉에 주전자를 걸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나는 컵에 찻잎을 넣으며 엘런에게 물었다.
“별건 아니고 괜찮나 궁금해서 와 봤어.”
“아아, 전 괜찮아요.”
이쪽도 병문안을 온 모양이다.
마침 물이 끓어 찻잔에 물을 채우고 엘런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앉은 그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자 그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곧 침묵이 시작됐다.
어색함에 찻물을 홀짝이는데 엘런이 제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갈색 종이봉투였다.
“이게 뭐예요?”
“타박상에 좋은 약이야.”
그는 종이봉투에서 은색 틴케이스를 꺼냈다.
“하루에 한 번 환부에 바르면 된다더군.”
나는 틴케이스에 새겨진 로고를 응시했다. 마치 기둥처럼 크게 양각된 A.
세계관 최강 명의. #명의여주가 운영하는 의원의 로고였다.
그녀는 그 어떤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게 하는 기적의 연고를 만들어 사계국에 명성을 떨쳤다.
이게 아마 그 연고인 것 같다.
그나저나 #명의여주님은 가을국에 계시는 거로 아는데 거긴 또 언제 다녀온 거지?
“공작님, 혹시 가을국에 다녀오셨어요?”
“그대도 이 의원을 아나 보군.”
엘런이 피식 웃었다.
내가 듣기로 굉장히 바쁜 분이라 예약을 걸고 한 달은 지나야 약을 받을 수 있는 거로 아는데, 역시 권력자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저 호소력 짙은 얼굴로 일단 부탁해 본 건지 모르겠다.
더 묻기도 전에 엘런이 일어났다.
“레이디 혼자 지내는 곳에 오래 있는 것도 실례니 이만 가 봐야겠군. 어쨌든 이걸 주려고 들른 거니까.”
“아, 공작님.”
일어난 엘런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봤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실 필요 없는데.”
조금 재수가 없어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엘런은 나를 잘 챙겨 주긴 했다.
왕벌 환관에게 당하고 있을 땐 먼저 내 옆에 앉아 주기도 했고, 내 손목이 아픈 줄 알았을 땐 자기가 대신 기록을 해 주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약까지 챙겨 주고 있다.
나도 뭔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 엘런에게 필요한 게 뭘지 짐작 가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감사 인사부터 했다.
“혹시 공작님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도와드릴게요.”
그러자 엘런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걸었다.
“그 약속은 잊지 말고 기억해 둬.”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며 덧붙였다.
“언젠가 꼭 그대의 도움을 구하러 올 테니.”
문이 닫히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무덤 판 거 아니겠지?’
CH4. 마족 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