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39화 (40/208)

39화.

아이시스는 다시 내게 시선을 옮기더니 설명해 줬다.

“호미니스는 여름국 영의정이에요. 얘 때문에 은퇴 못 하고 계신 60대 어르신인데 그분이 은퇴 신청서 올리면, 얘가 은퇴 나이 상향 공지 내리는 게 여름국 연례행사예요.”

“나이만 많지 정정하셔. 솔직히 나보다 어려 보이잖아?”

“그건 외관만 그런 거고. 넌 번 아웃도 모르냐? 사람이 50년 가까이 일만 했는데 안 지치겠냐고. 좀 보내 드려라.”

뭐라 답하려던 디아나가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봤다.

“이런 얘기 재미없죠? 뉴비 영애 얘기나 들어 봅시다.”

“저, 저요?”

갑작스레 내게 꽂힌 화제가 부담스러워 입을 달싹였다.

아이시스도 동의하는지 내게 몸을 틀었다.

“맞아요. 영애 얘기 너무 궁금하다.”

나는 두 사람의 시선을 응시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우리의 공통 관심사가 뭐가 있을까.

그때, 수증기 너머 나무 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응시하다 물었다.

“가을국 황태자는 목욕을 좋아하나 봐요. 이런 곳도 준비하고.”

그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 천장으로 올라갔다.

아이시스가 디아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목욕탕은 얘 때문에 만든 걸걸요? 얘가 온천 엄청 좋아하거든요.”

“맞아. 내가 만들어 달라고 했어.”

“걔 좀 적당히 부려 먹어.”

디아나는 축축이 젖은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뭐 어때, 알렉스는 이런 거 몇 분이면 만드는데.”

두 사람의 투덕거림 속에서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몇 분이요?”

건물을 몇 분 안에 만들 수 있다니.

“알렉스는 나무 조각 하나만 있으면 이런 목조 건물은 뚝딱 만들어요. 아무래도 걔가 S급 같아. 능력치가 사기야.”

“그럼 네가 가져. 솔직히 아무리 이능이 대단하다 해도 널 위해서 만들어 준 거지, 아무한테나 이능을 쓰진 않을걸? 이 정도면 최소 썸 아니냐?”

“나한테도 잘 안 써. 내가 안 올까 봐 신경 쓴 거지. 알렉스가 좀 여우 같은 면이 있잖아.”

“여우 같은 면이 아니라 대놓고 여우지.”

내가 멀뚱히 있자 대화에 소외된다고 여긴 건지 디아나가 빙긋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알렉스가 얼마나 영악한지 알아요. 영애?”

알 것 같긴 한데, 눈치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찰랑.

그녀는 갑자기 제 팔을 들어 겨드랑이 아래로 난 긴 흉터를 보여 줬다.

가슴부터 골반까지 길게 찢어진 큰 상처였다.

“아카데미에서 알렉스랑 검술 대련하다 다친 상처예요.”

나는 그녀의 몸을 가로지르는 길쭉한 상처를 보고 충격에 입을 벌렸다.

“안 아프셨어요?”

“엄청 아팠죠.”

그녀는 내 당연한 말에도 웃어 주며 팔을 내렸다.

“알렉스는 성장과 퇴화를 마음껏 다루거든요. 이 정도 상처는 금세 아물게 해 줄 수 있는데도 치료해 주지 않았어요.”

“그럴 능력이 있는데 왜 안 해 줘요?”

디아나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으나 그녀는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그 안광을 감추었다.

“저는 타국의 황족이니까요.”

“영애를 견제하는 건가요?”

감히?

우리 황제 영애를?

그 빨간 머리 변태 자식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아니, 영애는 황제의 몸으로 직접 토벌에 참석해서 대륙을 돕는데! 그런 인애로운 우리 영애한테 감히 상처를 내요?! 그 변태 놈을 제가……!”

울컥한 내가 흥분하자 그녀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 지금까지 조용하게 있었지.

뜻하지 않게 유지해 온 차분한 이미지가 무너진 듯하다. 그러나 이미지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진정해!

우리 황제 영애의 옥체에 저런 상처를 남긴 것도 모자라서, 옹졸하게 치료해 주지도 않고!

그런 주제에 황제 영애 힘이 필요하다고 토벌대에 참석시키고!

나쁜 자식!

왕벌 환관의 마음이 이랬을까? 위대하신 폐하의 상처를 보니 애끓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영애 옥체 어떻게 해!

씩씩대고 있는데 디아나와 아이시스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디아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제 턱을 매만졌다.

“뉴비 영애 너무 귀여우신데?”

아이시스가 디아나의 어깨를 찰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약간 봄국 황녀 영애 재질이셔.”

“그러네, 어쩐지 익숙하더라.”

그녀들은 라리사 영애를 언급하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여전히 분을 풀지 못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황제 영애를 바라봤다.

그 젖은 시선을 의식한 황제 영애가 날 달래기 시작했다.

“알렉스한테 너무 화내지 말아요. 걔한테는 가을국이 전부니까.”

“아니, 영애! 이렇게 사람이 물러서 어떡해요?!”

저 또라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으시려고!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관대한 디아나의 정신 교정을 시도했다.

“조국이 소중한 건 영애도 똑같잖아요! 짧은 대화였지만 영애도 여름국 걱정 가득한 거 제가 딱 느꼈단 말이에요.”

디아나는 웃음을 참듯 입술을 잠시 말아 물었다.

“물론 나도 여름국에 애정이 있죠. 하지만 나는 그보다 소중한 것들이 많아요. 가족도, 친우도 있고 또 내 인생을 돌아볼 여유도 있고요.”

“알렉스도 있겠죠!”

그 자식은 돈도 많고 이능도 뛰어난데. 영애보다 더 풍요롭게 살면 풍요롭게 살지, 물욕이 덜 하겠어요?

내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답하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알렉스한테는 정말 가을국이 전부예요.”

“어떻게 확신하세요?”

“그 애는 평생 세뇌받았으니까. 조국 외에는 무엇에도 욕망하지 않도록.”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 더 묻고 싶었는데, 불편한 주제인지 디아나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뉴비 영애는 엘런이랑 둘이 온 거예요? 영애 쪽 사람은 없어요?”

비에른이 기사들을 보내 준다고 했지만, 봄국 황제에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무래도 마왕의 기상 시간은 국가 기밀이니 봄국 황제가 끼어들어 커트한 것 같았다.

“저는 사촌 오라버니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오라버니네 사람을 데려오지 못하게 황제가 막았어요.”

“아, 그래서 봄국은 엘런 쪽 사람만 잔뜩 온 거구나.”

디아나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런 공작이 얘 사촌인 거 알아요?”

“네, 아까 들었어요.”

디아나가 민망한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희 아버지가 워낙 후궁이 많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형제가 좀 많아요.”

아이시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요. 여름국에 있는 웬만한 남주들은 다 얘 형제일걸요? 얘는 ‘출생의 비밀’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아, 소름 돋게 그 소리 좀 그만해라.”

“네가 이상한 거야. 아니 어떻게 좌 삼거미 우 사거미를 두고 슬롯 넣을 생각을 안 하냐? 대단해.”

“친동생을 넣을 생각 하는 네가 더 이상한 거야.”

아이시스는 뭐라 더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시스: 봤죠? 얘는 쌍둥이를 남주가 아니라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니까요? 과몰입 오져요, 진짜.]

아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아이시스를 보며 키득거리다 물었다.

“근데 아무리 사촌이라도 타국 사람인데 엘런과 친하신 게 신기해요.”

“아무래도 아카데미도 같이 다녔고 어릴 때는 궁에서 같이 살았으니까 친해질 수밖에 없었죠.”

“아! 알렉스도 같이 아카데미에 다니셨다고 했죠?”

“맞아요. 셋이 같이 졸업했어요.”

세상에, 그 무슨 명문 아카데미란 말인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황제가 있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황태자가 앉아 있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뒤에는 황제보다 더 전투 의지 충만한 공작이 앉아 있고.

교수님들 수업하시기 얼마나 힘드셨을까?

과제 성적 평가는 제대로 하실 수 있었을까?

알렉스 F 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셨겠지.

갑자기 아카데미 교수들이 불쌍해졌다.

“아이시스 영애도 아카데미 동기세요?”

“아니요. 저는 타임라인 시작한 지 이제 6년 됐고, 그때는 신전에서 시동으로 지냈어요.”

그녀는 디아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아카데미 다녔으면 좋았을걸. 얘랑 같이 다니면 재밌었을 거 같아요.”

“나도 좋았을 거 같다. 네 말 한 마디면 바로 교수님들 휴강하셨을 거 아냐.”

다시 들어도 참 대단한 버프다.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아이시스를 바라보는데 내 시선을 오해한 건지 디아나가 진지한 얼굴로 제안해 왔다.

“영애, 여기서 몇 살이죠? 아카데미 가고 싶은 거면 말해요. 추천서 써 줄게요.”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학부생 때 너무 힘들었거든요. 다시는 그런 걸 겪고 싶지 않…….

“내가 대신 가면 안 돼? 아카데미 교수님들 지적인 냉미남이라며.”

……지적인 냉미남?

“나는 카이엘드 아카데미 출신이라 교수님들이 다 무인이셨어. 네 취향 미남들 보려면 봄국 황실 아카데미로 가야 할 거 같은데.”

“저요! 저! 저 탄탄한 온미남도 좋아해요. 추천서 써 주시면 어디든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갑자기 벅차오른 학구열에 나는 황제 영애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뭐 중세 아카데미 빡빡해 봐야 얼마나 빡빡하겠어?

그리고 F 맞으면 어때? 취업할 것도 아닌데.

“영애 진짜 라리사 영애랑 친자 검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비슷한데.”

두 영애는 키득키득 웃다 내게 세계관 정보를 더 공유해 주었다.

나는 두 먼치킨 영애들에게 새로운 정보들을 받으며 목욕을 마쳤다.

무섭게 느껴졌던 마왕 동면지 탐색이었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목욕을 마친 나는 노트를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냥 쉴 걸 그랬나…….”

사실 오늘은 회의가 취소된 덕에 회의록 정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회의 내용 기록을 건너뛰는 것일 뿐. 오늘 탐사지에서 본 것들은 따로 기록해야 했다.

당연히 그것도 내 업무였다.

내일 해도 되겠지만 그러면 내일 일이 2배로 늘어날 테니 오늘 끝내 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삼검 씨한테 메모를 기록해 두겠다고 약속도 했고.

까먹기 전에 하자.

드르륵.

문을 열자 푸른 달빛이 들이찬 도서관 내부가 보였다.

“으, 무서워.”

마족 지대와 겨울국 정보를 잔뜩 진열해 놓은 알렉스 때문에 어두운 도서관은 호러 그 자체였다.

특히나, 죽은 마왕 부인의 초상화는 어둠 속에서 특유의 공허한 분위기를 흩뿌렸다.

나는 얼른 초에 불을 붙여 도서관에 빛을 채웠다.

온도 높은 빛이 실내를 비추니 그제야 음산한 분위기가 가셨다.

금고를 열어 탐사 기록집을 꺼낸 나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도 펴 삼검이 적은 메모를 확인했다.

신기하게도 그는 바람에 대해 적어 두었다.

나는 기록지에 그 사실을 옮겨 기록했다.

[특성 버프 ‘명필 필사가’ ON]

버프가 켜지자 펜촉이 기분 좋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북풍으로 거슬러 오르던 바람이…… 3초간 사라졌다……. 그리고 천천히 파도처럼…… 규칙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5초…… 3초…… 5초…… 파동처럼 반복되는…….”

그나저나 삼검 씨 글씨 참 잘 쓰시네.

나야 버프라지만 삼검 씨는 태생적 명필이었다.

잘생기면 글씨도 잘생긴 건가.

그는 한글의 각진 모서리 부분을 유려하게 휘며 제 부드러운 성품을 필체로 드러냈다.

글씨에 빠진 나는 몰입한 채 그의 필기를 옮겨 적었다.

그때였다.

띠링.

[업무 효율을 높여 주는 BGM을 재생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반짝이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시스템의 뜬금없는 호의가 적응이 안 된 탓이다.

비록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호의는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네, 틀어 주세요.’

그러나 우려와 달리 시스템은 순순히 BGM을 틀어 주었다.

[‘능률 200% UP ♨ 로판 노동자 영애들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따스한 봄날, 영애들의 티 파티’를 재생합니다.]

꽃밭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듯한 착각이 일 만큼 밝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맑은 피아노 소리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상쾌한 소리를 내며 홀 안을 채웠다.

생각보다 웅장한 서라운드 사운드와 퀄리티 높은 음악에 눈을 깜빡였다.

와, 너무 좋은데?

이런 연주를 무료로 들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BGM 재생은 1분 미리 듣기만 가능합니다.]

[이어 들으시려면 BGM 이용권을 구매하세요!]

역시나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과금을 권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