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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38화 (39/208)

38화.

“유저한테는 제 버프가 안 통해서 다행이죠. 만약에 영애한테도 통했으면 영애 지금…….”

성녀 영애가 장난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로 밖에 나갔을걸요?”

“……왜 그런 무서운 가정을 하세요.”

나는 가슴을 가린 팔을 더욱 꽉 감싸며 쭈뼛쭈뼛 벽으로 바짝 기댔다.

성녀 영애가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걱정 마요. 말했듯이 제 버프는 유저 사이에서는 안 통하니까.”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보라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성녀 영애가 푸스스 웃었다.

그래, 웃음이 나올 만하다.

말만 하면 모두가 믿어 주는 버프라니.

그런 버프가 있다면 길에서 똥을 밟아도 웃음이 나올 거 같다.

“사람들이 무조건 내 말을 믿어 주는 기분은 어떠세요?”

“너무 좋아요.”

그녀는 양팔을 벌리며 세상을 감싸듯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세상의 신이 된 기분이에요.”

영애가 만족스러워하니 열등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버프의 성능이 궁금해졌다.

“영애는 버프를 어떻게 사용하세요?”

“음. 작년에 마물 유기로 난리가 났을 때, 제가 해결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아이시스는 자신의 업적을 곱씹는 듯 입가에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장착했다.

“대륙에 전염병이 돌면서 사람들이 마물 탓이라고 기르던 마물을 버렸거든요. 커뮤니티에서도 유기 마물을 보호하자고 영애들이 소소하게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요.”

아이시스는 그날을 떠올리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주름을 지워 냈다.

“그래서 예언이 떨어졌다고 버프를 썼죠. 마물을 유기한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그건 예언이 아니라 저주 같은데.

“그랬더니 마물 유기는커녕, 버렸던 반려 마물을 찾으려고 사람들이 난리였어요. 버프로 한 번에 사회문제를 해결한 거죠.”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이시스 영애를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애 정치할 생각 없으세요?”

어떤 사회문제가 발생해도 그녀는 말 한 마디로 해결할 수 있었다.

아니, 저런 게 버프지!

담당자님 듣고 있어요?

나 고객 센터 좀 연결해 줘요. 이건 진짜 컴플레인 걸어야겠어요.

[네트워크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진상의 향기를 느꼈는지 AI 담당자님이 날 차단하기 위해 또 거짓말을 시작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응? 왜 한숨이에요? 이쯤에서는 박수를 쳐 주셔야죠.”

“아, 죄송해요. 제 버프가 너무 하찮아서 순간 자괴감이…….”

“맞다. 영애 버프는 뭐예요? 웅크린 집순이 버프는 뭘지 너무 궁금해요.”

웅크린 집순이 버프.

요약하면 구X링, 파X고, 힐링 유X버죠.

나는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버프를 말해 주었다.

“와! 탐나는 버프네요!”

영혼이 1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수증기를 뚫고 왔다.

흐린 연기 너머로 보이는 아이시스의 눈에 동정심이 가득했다.

“영애, 영혼을 담아서 말씀해 주세요.”

“미안해요. 어쩌다 그런 버프를…….”

아이시스는 울컥한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봤죠, 담당자님? 얼른 고객 센터 연결해 줘요!

이거 컴플레인감이라고. 가만 안 둘 거야!

그런데 갑자기 성녀 영애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 디아나 영애도 지금 오나 봐요. 이제 겨우 삼거미, 사거미 떨어뜨렸다네요. 이쪽으로 오라고 했어요.”

AI 동기화 메시지를 수신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민망해서 그렇지, 우리 셋이 이야기를 나누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여긴 남주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 군사 기지인 만큼 목욕 시중을 들어 주는 여인들도 없고.

비밀스러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나저나 황제 영애 고생이네.

혼자 설원에 남아 나를 구한 탓에 황제 영애는 삼검과 사검에게 종일 시달렸다.

사실 사우나에 온 것도 그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게 불편해서 도망친 거였다.

나는 디아나를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삼검 씨랑 사검 씨, 화 많이 나셨을까요?”

“아우, 살기 장난 아니던데요? 뭐 하나 때려 부술 거 같던데.”

“저 때문에 디아나 영애 곤란해져서 어쩌죠.”

“응? 영애 탓 아니에요. 원래 디아나 과보호가 취미인 사람들이라 그래요. 신경 쓰지 말아요.”

아이시스는 고개를 저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평소에도 셋이서 브라더 콤플렉스, 시스터 콤플렉스 주고받으면서 잘 놀거든요.”

“브라더 콤플렉스요?”

삼검과 사검이 디아나에게 집착하는 건 울 황제 영애가 너무 멋있는 사람이니까 이해했다. 하지만, 디아나가 삼검과 사검에게 집착하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의아함을 드러내니 아이시스가 입구를 흘깃 살펴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디아나는 삼거미랑 사거미를 진짜 친동생으로 여겨요.”

나도 여기서 비에른이라는 사촌오빠를 만났지만, 가족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맙고 호감이긴 하지만 사실 진짜 가족은 아니잖아.

아빠와 오빠의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이광필 씨와 비에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달랐다.

형제가 없어서 비교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지만, 잠시 그 두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확연하게 비교됐다.

그나저나 이광필 씨는 잘 지내려나.

나는 코끝까지 따뜻한 물속에 담그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비록 현생에서는 최대 8시간이라고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슬슬 현생이 그립기 시작했다.

찰랑, 아이시스가 몸을 욕조에 기댔는지 수면 위로 잔물결이 일었다.

작은 파동에 가라앉아 있던 보라색 꽃잎들이 부유한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귓가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는 태어나서부터 타임라인을 시작했대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눈동자를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타임워프 기능을 16살 때 알게 돼서 16년을 꼼짝없이 여름국 황녀로 산 거죠.”

16년을 실제로 살았다고?

디아나 영애 정신 괜찮은 거야? 현실이랑 게임에 혼동이 오지 않아?

디아나를 걱정하는데, 아이시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매에 고소가 스미는 찰나 연분홍빛 입술이 벌어졌다.

“게임 초기에는 커뮤에 정보가 많지 않았대요. 그래서 진행한 타임라인이 긴 영애들은 좀…… 몰입이 과해요.”

“몰입이요?”

“과몰입.”

아이시스는 다시 눈을 감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여길 진짜 세계로 여기는 거죠.”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눈은 감은 채 검지를 제 입술에 붙였다.

“어쨌든, 디아나한테 삼거미 사거미는 진짜 형제니까 말조심하라고 미리 알려 주는 거예요. 쉿.”

“쉿.”

나는 얼결에 검지를 입에 붙이고 그녀를 따라 했다.

“아, 귀여워라.”

아이시스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잠시 일었던 두려움이 그녀의 웃음소리를 따라 사르르 녹았다.

“뭐가 귀여운데?”

중성적인 목소리가 수증기 틈을 뚫고 다가왔다.

그 하얀 연기 너머로 비치는 검은 실루엣이 점점 또렷해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눈동자를 내려 시선을 피했는데, 아이시스는 오히려 제 옆자리 난간을 툭툭 치며 앉으라고 권했다.

찰랑, 물소리와 함께 허스키한 황제 영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뉴비 영애는요?”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렇군요.”

디아나는 피곤한지 눈을 감고 어깨를 한 번 돌렸다.

아이시스는 혀를 차며 그런 디아나의 어깨를 주물러 줬다.

“또 일하고 왔어?”

“응. 회의 취소된 김에 가져온 상소 한 번에 처리하고 왔거든.”

디아나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성군 납셨네.”

아이시스는 키득거리며 툭툭 디아나의 어깨를 두드려 줬고, 디아나는 그게 익숙한지 그녀에게 은근히 제 등을 들이밀었다.

친근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간 영애들의 친목을 봐 왔지만, 이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처음 본 탓이다.

“두 분 정말 친하신가 봐요.”

그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흘러왔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추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시스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동안 정보 접근이 제한됐다고 시스템이 말도 못 꺼내게 해서 얘 말고는 어디다 토로할 데가 없었거든요. 뭐, 그러다 보니 특별해지긴 했죠.”

디아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처럼 말 많은 애가 어디다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한테 이렇게 집착할 만하죠.”

디아나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시스가 그녀의 등을 찰싹 때렸다.

“내가 뭐가 말이 많아?”

“네가 입 다문 걸 거의 못 본 거 같은데.”

아이시스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벙긋거리다 헛숨을 흘렸다.

“네가 과묵한 거야.”

디아나는 픽 웃으며 욕조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아니, 네가 말이 많은 거야.”

“왜 한 마디를 안 져?”

“황제가 성녀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지.”

“야, 이게 무슨 카노사의 굴욕이냐? 왜 종교랑 황실 싸움으로 비교해.”

“조심해야지. 황실이 종교에 먹히는 건 한순간이래.”

나는 정치와 종교의 정점에 선 두 여인이 투덕거리는 것을 보며 기묘하게도 평화를 느꼈다.

그들의 시간에 놓인 유대감이 단단해 보여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서사인데, 가만히 그 시간을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 근처에서 온기가 번졌다.

먼치킨 여주들의 우정이라니. 너무 훈훈하잖아.

그들의 유대감을 보며 벅찬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두 사람은 계속 말다툼을 했다.

“종교에 먹혀? 누가 그래?”

“호미니스가.”

아는 사람인지 아이시스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영감님 반란 염려증도 그 정도면 병이야, 병.”

“조심스러운 사람이지.”

디아나는 동의하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워낙 조국에 애정이 깊잖아.”

아이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혀를 쯧쯧 찼다. 그녀는 갑자기 내게 시선을 맞추고는 입 모양으로 ‘과몰입’이라고 벙긋거렸다.

“내 욕 했지?”

눈치 빠른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아이시스를 쳐다봤다.

“응.”

아이시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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