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전방을 응시하던 그녀가 내게 시선을 내렸다.
“저쪽으로 뛰어가요. 내가 뒤를…….”
디아나는 말을 잇다 나를 내려놓고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제게 달려든 개체들을 썰며 소리쳤다.
“얼른 도망가요!”
그러나 그녀가 도와준 보람도 없이 나는 세상의 모든 고구마를 혼자 다 먹은 것처럼 무력하게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온 근육이 겁에 질려 뻣뻣하게 굳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사슴처럼 다리가 달달 떨려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심하게도 날 구하러 와 준 디아나 덕분에 긴장이 풀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농도 100% 순정 고구마 맛 태도가 아닌가.
다시는 고구마 여주를 욕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어떻게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여.
이게 현실이었어! 위험에 처한 여주들은 이런 공포를 겪으며 두려움에 떨었던 거야.
나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촤악. 촤아아악.
쉴 새 없이 검을 놀리며 마물을 썰어 내는 여주가 보였다.
신중한 눈으로 사위를 살핀 디아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마물을 자비 없이 도륙했다.
“…….”
로판 여주 능력 상향 평준화의 주범.
먼치킨 여주를 목도한 나는 눈물을 뚝 그쳤다.
디아나를 보고 있으니 고구마를 답답해하는 분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 탓이다.
그래. 먼치킨은 못 돼도 민폐는 끼치지 말자.
나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지면을 밀어내듯 힘겹게 일어났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디아나의 뒤로 바짝 붙자, 그녀가 내 손을 잡고 퇴로로 뛰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그러나 애써 만든 퇴로는 순식간에 다시 막혀 버렸다. 사지가 절단난 마물들이 순식간에 재조립된 탓이다.
“젠장.”
처음으로 디아나가 황제답지 않은 외설적인 말을 뱉었다.
마물들은 우리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아는지 천천히 다가왔다.
아니, 우리라고 해야 할까.
그들의 시선은 내게 꽂혀 있었다.
특정 혈액형의 피에 달려드는 모기처럼 그들은 내게 집착했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자꾸 날 먹으려 들어!
마물들이 포위해 오는데도 디아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며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체력 소모가 심한지 숨이 거칠어졌다.
디아나는 입술을 깨문 채 제 주머니에 있던 색 바랜 스크롤을 보여 줬다.
“스크롤이 훼손돼서 말이 있는 곳까지는 가야 해요. 저기에 여분이 있거든요.”
디아나의 스크롤도 마물이 마력을 흡수한 듯했다.
나는 붉은 마물 너머 우리가 있던 곳을 응시했다.
수많은 홍체에 가려 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지원을 기다린다고 생각한 건지 디아나가 씁쓸히 말했다.
“아이시스가 다들 기지로 피신시켰어요. 시스템 에러에 휩쓸려서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도 빨리 갑시다.”
디아나는 내 손을 잡고 홍체 속으로 전력 질주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달려 그녀와 속도를 맞추려 노력했다.
말이 있는 방향으로 달리던 디아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 말이 있는 곳을 등졌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제 뒤로 숨겼다.
“영애, 여기서 1분만 버텨요.”
대답할 새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검을 세로로 세웠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공중에서 번쩍였다.
디아나가 눈을 감았다.
마치 무협지의 비기를 푸는 주인공처럼 그녀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집중했다.
사아아아.
바람이 밀려오며 그녀의 긴 머리칼이 나풀나풀 공중을 부유했다.
그때, 갑자기 허공에서 푸른 불꽃이 확 튀어 오르더니 자석처럼 디아나의 장도로 끌려왔다.
디아나는 무어라 제 능력의 이름을 읊는 대신, 눈을 뜨고는 칼날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칼날의 푸른 섬광이 검의 반동을 따라 날아가며 몸집을 부풀렸다. 마치 태풍처럼.
그 거대한 섬광에 마물들이 휩쓸리고 파도 소리를 내며 터졌다.
1분은커녕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찰나 안에 그녀의 전방에 있던 마물이 전멸했다.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바닥의 붉은 물과 디아나를 번갈아 봤다.
이게 바로 먼치킨 여주의 버프인가.
“영애! 너무 멋있어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데, 나지막한 욕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끝도 없네.”
기쁨도 잠시.
터진 토마토처럼 설원을 더럽힌 마물들이 다시 제 형태를 찾아갔다.
맞다. 본체 이 자식 어디 갔지?
나는 그제야 본체가 생각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수히 많은 홍체 위, 말이 있는 방향으로 총총 사라지고 있는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나는 디아나에게 찰싹 붙어 속삭였다.
“영애! 저기 저놈이 본체예요. 저것만 죽이면 다 사라질 거예요.”
그녀는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본체가 있는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우리 황제 폐하가 본체를 어떻게 없앴는지 보지 못했다.
빛밖에 안 보여서.
그녀의 검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흐물흐물 녹아 버린 개체들은 다시 재조립되지 못했다.
본체가 죽은 거다.
딸기 시럽을 뿌린 빙수처럼 붉은 물이 흐르는 설원을 응시하던 디아나가 내게 시선을 틀었다.
“본체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영애 버프예요?”
그녀가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저는 마족 정보 검색 능력이 있어요.”
몇 초간 붉은 액체를 지켜보던 디아나가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제 칼을 검집에 넣었다.
스르릉.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장검이 모습을 감추고, 그녀의 입에서 안도 어린 숨이 새어 나왔다.
“좋은 능력이네요.”
싱그러운 미소로 짧은 숨을 끊어 낸 디아나가 내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이제 돌아갑시다.”
***
나는 축축이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먼치킨이 최고다.”
왜 수십 명의 여전사가 아르테미스 여신을 따라다녔는지 이해했다.
왕벌 환관을 욕할 게 아니었다.
그런 황제를 모시는데 어떻게 광신도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벅차오르는 덕심을 음미하며 따뜻한 물속에 몸을 푹 담갔다.
“따뜻하네.”
생사의 경계를 맞닥뜨린 탓인지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굳은 근육에 온천 효과는 탁월했다.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온기에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이쯤에서 나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다.
알렉스 놈이 천재라는 사실.
쓸데없이 군사 기지에 왜 사우나를 만들었나 했는데,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하아, 좋다.”
나무 욕조에 뒷목을 기대고 눈을 감는데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뉴비 영애, 거기 있어요?”
눈을 뜨니 수증기 뒤로 여자 인영이 보였다.
다가오는 아이시스의 실루엣에 놀라 나는 턱 끝까지 물에 폭 담근 채 팔로 몸을 감쌌다.
“영애, 저 다 벗고 있어요.”
오지 말라는 소리를 돌려 하는데도 아이시스는 빙긋 웃으며 내가 있는 커다란 욕조로 들어왔다.
“네, 당연하죠. 옷 입고 목욕하지는 않으시겠죠.”
“아, 안 돼요! 오지 마세요!”
당황해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왜요? 같이 해요.”
찰랑.
수영장처럼 거대한 욕조가 여러 개 있는데도 아이시스는 굳이 내 욕조로 들어왔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찰싹.
맞은편 벽에 딱 달라붙은 내 모습이 웃겼는지 아이시스가 키득거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웃음기 가득한 숨을 흘린 그녀가 내게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네…….”
“그나마 다행이네요. 다친 곳이 없어서.”
“맞아요…….”
민망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다행히 욕조에 꽃잎이 가득해 물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힐끔 다시 시선을 들자 손으로 따뜻한 물을 떠 제 어깨를 적시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수면 위로 드러난 아이시스의 어깨를 응시하다, 물속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내외하는 내가 재밌는지 아이시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하긴 저도 처음에는 다 조심스러웠어요.”
그녀는 한쪽 입매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덧붙였다.
“그래도 곧 적응하실 거예요.”
“적응이요?”
뭐에 적응해야 하는 거지. 서로의 나체에?
그런데 그녀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곧 세상의 지배자가 된 기분이 들 테니,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질 거예요.”
아이시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무 기둥에 툭 머리를 기댔다.
“아니다. 영애랑 나는 특성이 다르니까 이 기분을 모를 수도 있겠네요.”
“특성이요?”
그녀는 따뜻한 물을 손끝으로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특성에 따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변해요. 소심했던 사람이 대범해지기도 하고, 무던한 사람이 예민해지기도 하고.”
특성이라.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데 시스템이 내게 준 ‘웅크린 집순이’ 특성 버프가 생각났다.
“특성이면 영애의 ‘시대의 예언자’ 같은 수식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그녀는 부드러운 눈매를 더 부드럽게 휘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 수식 덕분에 예언자 버프가 있거든요. 덕분에 제가 하는 말은 사람들이 무조건 믿게 되죠.”
아, 그래서 아이시스가 말할 때면 남주들 눈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구나.
드디어 그동안 실례일까 묻지 못했던 그녀의 버프를 알게 되었다.
충족된 호기심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부러움이 메꿨다.
말만 하면 다 믿어 주는 버프라니, 그런 사기 버프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