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삼검과 사검은 전투태세를 취했다.
나는 순순히 몸을 움직여 스크롤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
나같이 싸움 못 하는 애가 의리 지킨답시고 눈치 없이 남으면 그게 더 민폐였다.
그런데 그때, 땅이 덜덜 떨릴 정도로 큰 발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두.
고개를 드니 만년설 아래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아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마물 무리였다.
사람처럼 생겼으나, 붉은 피부를 가진 마물은 성인의 두 배 정도로 몸집이 컸다.
마물의 붉은 전신에 다른 색채라고는 두 가지뿐이었다.
하얀 뿔과 금색 눈동자.
악마가 있다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위협적인 외형에 나는 바짝 얼어붙었다.
다행히 마물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설원에서 솟아난 나뭇가지들이 감옥처럼 그들을 옥죄기 시작한 탓이다.
나는 처음으로 알렉스가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나, 그건 찰나였다.
마물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사라진 발걸음 소리가 적막을 가져왔다.
그 침묵이 소름 끼쳤다.
그때, 수백 마리의 마물 대열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마물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 마물의 시선이 나무 결계를 향했다.
몸을 들이받아 부수려는 걸까?
그러나 마물은 그저 나뭇가지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뭐 하는 거지?”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인지 미묘한 짜증이 서려 있다.
나 또한 저 신중한 손짓이 찜찜했다.
짐승이라면 눈앞의 장애물에 몸을 들이받을 텐데, 저 마물은 고요히 나무를 더듬었다.
지능이 있는 것처럼.
이내 마물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멍을 덧그리듯 손가락으로 쓸다 천천히 그 안으로 제 팔을 욱여넣었다.
“저게 뭐야…….”
마물의 팔이 액체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으며 그 구멍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모든 마물의 몸이 액체화되며 나무 틈으로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무 결계는 구멍 난 둑처럼 밀려오는 마물을 막아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하얀 언덕이 피바다처럼 붉게 물들었다.
결계를 빠져나온 붉은 액체는 다시 마물로 조형되더니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뒷머리를 긁적이던 알렉스가 뒤 돌아 우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후퇴해야겠군.”
현명하게도 그는 포기가 빨랐다.
“모두 기지에서 만납시다.”
다들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내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도망에 진심이었던 나는 이미 스크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철퍽.
바로 스크롤을 찢으려는데 불쾌한 감각이 손등으로 번져 갔다.
내 손가락에 붉은 점액질이 붙어 있었다.
점액질은 갑자기 밀대로 누른 반죽처럼 몸을 쭈욱 늘리더니 내 스크롤을 집어삼켰다.
파스스.
점액질이 닿은 스크롤에서 김이 일었다. 마치 점액질이 스크롤 안에 담긴 마력을 빨아먹는 것처럼 기괴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마물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내 인지력보다 마물의 운동 신경이 더 빨랐다.
“데이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땅바닥에서 들렸다.
내 몸은 이미 하늘로 솟구쳐 허공을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악!”
나는 개구리 혓바닥에 붙잡힌 파리처럼 끌려가며 눈물을 삼켰다.
아니, 왜 하필 나야!
바로 앞에 사람이 세 명이나 있잖아!
널 괴롭힌 건 저 붉은 머리 남자라고!
동료를 팔아먹으며 생존 의지를 불태웠지만, 날아간 몸은 마물 떼의 중심으로 가차 없이 처박혔다.
“하윽!”
오래된 눈은 빙판이었다. 그 위로 사정없이 내리꽂힌 탓에 엉덩이가 얼얼했다.
그나마 두툼한 솜옷을 입었으니 다행이지, 얇은 가죽 옷을 입었다면 최소 골절이었다.
나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흐느끼다 고개를 들었다.
“으아악!”
눈앞에서 수십 마리의 붉은 마물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물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뭐지?
솔직히 한 입씩 나눠 먹었으면 순식간에 해치웠을 텐데.
[혐오스러운 표현은 자동 필터링 됩니다.]
[필터링으로 인한 글자 수 미달을 주의하세요.]
‘이 와중에 그런 게 신경 쓰여요? 분량이고 뭐고 지금 담당자님 유저가 절벽 엔딩 치게 생겼는데!’
AI 담당자님은 내 짜증이 익숙한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상태창을 하나 켜 줬을 뿐이다.
[특성 버프 ‘마족 정보 검색’ ON]
[마족 지대 상급 마물 ‘홍체’의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맞네. 나 마족 지대 전문가지.
버프에 익숙하지 않아 활용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담당자님이 버프 사용을 권했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상태창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요즘 취급이 하찮아서 깜빡했는데 나도 여주였다.
그래, 여주가 고작 마족 지대 마물에게 죽을 리가.
나는 세계관이 정한 내 롤을 떠올리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깨끗해진 시야로 입맛을 다시고 있는 마물들이 보였다.
저것 봐. 잡아 와 놓고도 먹지 못하고 있잖아.
마치 여주가 변신하는 동안 공격하지 않는 빌런처럼.
어차피 마물은 위기감 조성을 위해 이용되는 생명체일 뿐, 여주에게 위협이 될 수 없지.
시스템은 신기했다.
내가 상황에 몰입하고 겁을 먹을 때면 귀신같이 이것이 게임임을 일깨워 줬다.
곧 불투명한 상태창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급 마물 ‘홍체’. 제 몸을 복제해 무리를 형성하며, 본체를 제거하면 모든 개체가 사라진다.]
홍체.
붉은 몸.
게임 시나리오 작가님은 이번에도 네이밍을 대충하신 티를 팍팍 내셨다.
흐린 눈으로 설명을 읽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가 복제?
수백 마리의 붉은 마물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홍체의 본체는 단 하나입니다. 본체를 제거하지 않으면 홍체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습니다.]
‘본체는 어디 있어요?’
뿅!
앙큼한 소리를 내며 홍체 무리 위로 노란 화살표 하나가 떠올랐다.
반짝거리는 그 화살표가 본체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뭐야, 쉽네?
저놈만 죽이면 된다는 거지?
좋아, 저놈을 죽여 버리자!
호기롭게 전투 의지를 불태우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문과 무의 차이.
내게 본체를 죽여야 한다는 지식은 있었지만, 본체를 죽일 힘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그냥 죽거나.
알고 죽거나.
나는 현실을 부정하듯 애타게 담당자님을 찾았다.
‘담당자님! 저 홍체를 죽이는 방법은 뭔가요? 제가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겠죠? 알려 주세요!’
[본체의 심장을 훼손하세요.]
‘아니, 진짜! 제가 어떻게 마물 심장을 꺼내요?!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 주세요!’
[도망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퇴로를 서치 할까요?]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네네! 도망칠 방법을 알려 주세요.’
[퇴로 서치 중…….]
[퇴로 서치 실패]
[사방에 홍체가 가득합니다. 퇴로를 찾지 못했습니다.]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
AI가 다시 한번 내게 죽음을 권했다.
현생 나가면 자살 방지 위원회에 이 게임을 신고할 거다.
이렇게 쉽게 생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유해한 게임은 정부의 지엄한 철퇴를 맞아야 한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차가운 눈 더미를 움켜쥐었다.
“이런…….”
도망칠 방법이 없다.
아니야, 그래도 날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날 죽이려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침착해.
굳이 다른 탐색대원들을 두고 날 골라 데려온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살려야 할 이유.
지능 마물이면 대화가 될지도 모르잖아.
‘담당자님, 홍체가 왜 하필 저를 선택한 걸까요?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홍체는 육식 마물로, 육질이 연한 인간 여성과 아이를 가장 선호합니다.]
육질이 연한 인간 여성?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감싸고 있는 터질 듯한 솜옷이 보인다.
오동통한 부피감. 딱 봐도 최약체 느낌을 풍기는 무리 내 서열.
홍체가 날 먹잇감으로 선택한 게 납득이 갔다.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광어와 우럭, 연어 속에서 본체의 취향을 한눈에 사로잡은 탐스러운 참치.
왜 남주의 취향을 저격해야 할 판에 마물의 입맛을 저격한 걸까.
자연스레 흐르던 생각의 흐름이 뚝 멈췄다.
‘거짓말! 날 먹으려고 데려왔으면, 왜 안 먹고 쳐다만 봐요?’
AI가 또 장난을 친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담당자님은 진지하게 답했다.
[오직 본체만 음식물 섭취가 가능하며 개체는 본체가 식사하는 동안 주변을 지킵니다.]
‘미쳤나 봐! 그런 무서운 소리 진지하게 하지 말아요!’
아무리 감정이 없다지만, 이 와중에 소름 돋는 말을 하는 AI의 목소리에 화가 났다.
자박자박.
하지만 AI에게 항의하기도 전에 본체가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서운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은 노란 화살표를 머리에 인 채.
홍체가 몸을 구부려 내게 눈을 맞춰 왔다. 순간 놈의 금빛 눈동자에 자리한 검은 홍채가 세로로 쭉 찢어졌다.
분명 놈과 나는 소통할 수 없는 다른 종임에도, 그 눈빛이 전하는 뜻이 너무나 선명했다.
피식자를 보는 포식자의 기대감 어린 눈빛.
그게 너무 공포스러웠다.
몸의 감각이 흐려졌다.
최면에 걸린 듯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갑자기 놈이 시선을 획 돌렸다.
팍, 파박.
물풍선이 터지듯 시원한 폭발음이 들리고, 우두머리 뒤로 서 있던 수십 마리의 붉은 개체들이 어느 한곳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본체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덕에 최면이 풀린 듯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등 뒤로 온기가 덮쳐 왔다.
“정신 차려요. 영애!”
나를 일으킨 손길에 시야가 높아졌다.
바람을 따라 뒤에서 붉은 장포와 검은 머리카락이 밀려왔다.
고개를 드니 디아나가 검을 쥔 손등으로 제 이마에 묻은 붉은 액체를 닦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