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에스텔라 영애, 혹시 가위 있어요? 밧줄이 엉켜서…….”
척.
“어머, 토끼 모양 가위네. 귀여워라! 고마워요.”
“레이디, 혹시 윤활 오일 있습니까? 고삐가 얼어서…….”
척.
“최상급 윤활 오일이군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데이지, 혹시 메모할 만한 종이나 펜을 가지고 계십니까?”
척.
“가을국 장인이 만들었다는 가죽 노트네요. 구하기 힘들다 들었는데 대단하십니다.”
탐험이 시작된 지 일주일.
나는 안장 양쪽에 달린 빵빵한 주머니로 시선을 내렸다.
그 안에는 온갖 물건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왜 탐색대에 챙겨 온 건지 알 수 없는 페로몬 향수도 있었다.
놀랍게도 이게 그나마 반으로 줄인 짐이었다.
환관이 넣어 준 육포 냄새 때문에 굶주린 마물 떼에 습격을 당한 이후, 알렉스가 내 가방을 검사해 필요 없는 물건은 모두 덜어 냈기 때문이다.
가방 검사를 하던 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디 소풍 가냐고 한심해하던 그 눈빛을.
휙휙 내다 버리길래 아예 다 빼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절반 정도 물건을 그대로 둬도 좋다고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잘 썼습니다.”
예의 바른 삼검이 노트를 돌려주며 말했다.
“계속 쓰셔도 돼요.”
“아닙니다. 오늘 회의록을 정리하실 때 참고해 달라는 의미로 적어 둔 것이니 레이디께서 보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러면 제가 돌아가서 확인하고 기록해 둘게요.”
나는 힘겹게 팔을 움직여 노트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멀리서 보면 털 뭉치로 보일 만큼 온갖 방한 옷을 껴입은 탓에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왕벌 환관이 억지로 입힌 옷이었다.
그는 매일 밤 옷을 지어 내게 하나씩 입히고 있었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도 아니고 매번 촉촉한 눈망울로 부탁을 해 대니 원.
그런 위험한 눈을 가졌으면 안대라도 좀 쓰라고.
사실 그의 선물이 싫지는 않았다.
‘따뜻해…….’
두툼한 솜옷은 저질 체력인 내가 겨울 한파를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옷을 살피다 꼼꼼한 바느질과 섬세한 포도 무늬 수를 보고 감탄했다. 그는 완벽한 현부양부(賢父良夫)였다.
장가 잘 가시겠는데?
아니다. 환관은 장가 못 가려나?
“으.”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온몸을 골고루 압박하는 솜에 신음을 흘리며 겨우 가방을 닫았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삼검 씨가 손등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이미 내 귀에 웃음소리가 포착된 뒤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삼검 씨 무서운 사람이네. 좀 웃기게 입었다고 대놓고 비웃다니.
나는 시선을 돌려 삼검을 쳐다봤다.
환관이 내게 지어 준 옷은 패딩점퍼에 가까운 두툼한 외투였는데, 삼검은 다소 얇은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같은 여름국 사람인데 왜 준비한 의복이 다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환관이 내 옷은 미감을 버리고 방한에 초점을 두어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첫날, 여름국의 가벼운 차림으로 왔던 삼검은 이제 제법 따뜻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검은 철릭 위에 솜을 채운 푸른 답호(褡????, 반소매 포)를 걸쳤다. 그리고 반소매 아래 드러난 철릭 부분은 검은 가죽 토시를 차 꼼꼼히 한기를 차단했다.
꼭 사냥 나가는 조선시대 왕의 모습 같았다.
심지어 그는 털모자를 쓰지도 않았다.
그저 이마와 머리가 이어지는 부분에 비단 머리띠를 단정히 묶었을 뿐이다.
낯선 동로판 남주에게 조상님들의 단아한 미적 감각이 느껴졌다.
안정적인 이목구비 배치와 풍운에 어린 기개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한마디로 심상이 차분해지는 기분.
말없이 저를 보고 있으니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삼검이 웃음을 치우고 짧게 묵례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웃음이 많으면 좋죠. 건강에도 좋고, 듣는 사람도 좋고. 많이 웃어 주세요.”
되도록 제 시야에 닿는 곳에서. 자주. 많이. 활짝.
나는 오늘도 게임이 하사하신 은혜로운 세계에 깊이 감사했다.
뭐 하러 루브르 박물관에 가. 여기가 아름다움의 정수를 담아 둔 시각적 쾌감의 집결지인데.
이건 인류의 역작이야. 나 혼자 봐서는 안 돼. 이 풍경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함께 봐야 한다고!
애끓는 인류애를 가눌 수 없어 속으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디아나: 영애 꼭 도라에몽 같네요.]
순간 도라이 같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제 발 저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밝게 회신했다.
[디아나 영애도 필요한 거 있으세요? 말만 하세요. 영애를 위해서라면, 없는 것도 만들어 올 수 있어요!]
[디아나: 필요한 건 없는데 이런 것도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어떤 물건이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의아함에 황제 영애를 바라보니,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다 곧 입술을 뗐다.
“레이디, 혹시 보온 침낭 같은 것도 있습니까?”
“아! 네.”
주섬주섬 보온 침낭을 꺼내는 나를 보며 황제 영애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잠깐 그 안에서 같이 쉬고 갈까요?”
“…….”
아니야. 내가 변태라서 그래. 그런 뜻으로 말씀하시는 거 아니야, 정신 차려!
“폐하. 레이디에게 그런 농을 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나 디아나의 말은 누구에게나 나쁜 농담으로 들린 모양인지 사검이 미간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며 끼어들었다.
“아하하.”
디아나는 장난이었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황제 영애는 식당에서 재미를 본 후로 가끔 내게 저런 농담을 쳤다.
그런데 이제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후궁 드립치지 말라니까 진짜!
[영애! 그런 장난 하지 마시라니까요!]
[디아나: 미안해요. 너무 재밌어서.]
[서운하네요, 영애. 저는 영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된 사람인데……. 영애는 제가 곤란해하는 게 재밌으신가 봐요.]
[디아나: 아니요. 영애가 아니라 쟤들이 저러는 게 재밌어서요.]
디아나가 짧게 턱짓했다. 앞을 보라는 듯.
나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앞에는 엘런과 알렉스, 그리고 체이스 경이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뭐가 재밌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디아나: 쟤들이 저렇게 기분 나빠하는 건 처음이라 너무 재밌네요.]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더 제대로 맞춰 봤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새하얀 세상 속, 검은 점 세 개가 도화지 위 바둑알처럼 고요히 놓여 있을 뿐.
애국가 배경 화면으로 나올 법한 차분한 경관이었다.
저기에 디아나의 격한 표현을 겹쳐 보니 어울리지 않아 인상이 찌푸려졌다.
[굉장히 평온해 보이는데요?]
[디아나: 한 번쯤 쉬자고 할 만한데 고집스럽게 계속 움직이잖아요.]
디아나의 시선이 내게로 미끄러졌다.
[디아나: 내가 영애 옆에 붙어 있는 게 싫어서 빨리 끝내고 돌아가려는 거죠.]
#착각계 키워드는 내게 있는데 왜 우리 황제 영애님이 착각을 하시는 걸까.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실소를 흘렸다.
[아, 영애.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쟤들은 저 안 좋아해요. 엘런은 제가 본인을 좋아한다고 착각해서 죄책감 때문에 잘해주는 거고, 알렉스는 저를 부려먹을 생각에 신나서 챙기는 척하는 거예요.]
열심히 메시지로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디아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 생각을 잘라 냈다.
메시지가 아닌 육성이 들려온다.
“레이디 데이지.”
장난기 한 점 없는 진중한 목소리.
“그거 아십니까?”
그녀가 바람처럼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엘런은 제 사촌이에요. 어린 시절을 황궁에서 같이 보냈죠.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는 알렉스와 4년을 함께 수학했고요.”
“폐하와 공작님이 사촌이시라고요?”
그래서 엘런의 미들 네임이 아이스타스였던 건가.
새로운 정보에 호기심이 들긴 했지만, 갑자기 왜 저 두 놈과 엮인 과거를 말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했고, 그 시기에는 저 두 사람이 지금처럼 자기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죠.”
“…….”
“나는 저 두 사람을 잘 안다는 뜻이에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랍니다.”
“음, 네. 그렇군요.”
디아나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지만, 흥미가 없어 건성으로 답했다.
엘런과 알렉스의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왕의 기상 시간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괴롭히는데, 쟤들 과거까지 알게 된다면…….
내 어린 시절까지 조사한 거냐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엘런과 무슨 의도로 자신의 과거를 캔 거냐며 비꼬는 알렉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착각과 의심.
흡사 고전 문학 제목 같은 그들의 치명적인 단점에 벌써 숨이 턱 막혔다.
오만과 편견은 개연성이라도 완벽하지, 쟤들은 밑도 끝도 없이 착각하고 의심하잖아.
“하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앞서가던 세 사람이 말을 멈추고는 체이스 경 주변으로 붙었다.
체이스 경이 들고 있던 마물 탐지 마석에 붉은빛이 들어온 탓이다.
“레이디, 이쪽으로.”
그것을 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디아나와 삼검이 주변을 경계하며 내 옆으로 바짝 붙었고, 사검 또한 검을 뽑고 아이시스에게 말을 붙였다.
일주일간 저 마석에 불이 들어온 건 세 번이었다.
육포 냄새를 맡고 쫓아온 마물 떼의 습격을 받았을 때, 겨울국 황성 근처에 쳐진 결계에 들었을 때, 눈 덮인 마물 시체를 지났을 때.
두려움이 학습된 건지 저 붉은빛을 보는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섰다.
띠링.
그때 갑자기 상태창이 팟 켜지며 안내 글귀가 떠올랐다.
<버그안내문자>
[겨울국] ⚑ 현시 기준. 미공개 지역 마물 탈출. 50M 내 유저 대상 발송. 속히 겨울국을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재난 안내 문자 같은 메시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미공개 지역 마물이라니?
[마족 지대에서 상급 마물이 겨울국 국경을 넘었습니다. 현재 버그 복구 중입니다.]
[버그 복구 예상 시간은 5분입니다.]
내 불안한 생각을 읽은 AI 담당자님이 더 상세히 안내해 주었다.
나는 시선을 틀어 디아나를 보았다.
그녀 또한 재난 안내 문자, 아니 버그 안내 문자를 보았는지 잠시 허공을 보다 설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 삼검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 시선을 앗아 갔다.
“레이디.”
“네?”
“혹시 모르니 스크롤을 꺼내 두십시오.”
그가 허리춤에 찬 장도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