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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34화 (35/208)

34화.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내 머리가 이상해졌거나, 이 상황이 이상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정면으로 시선을 튼 나는 이내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팝콘을 씹듯 고기를 우물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실내조명이 밝은 것도 아닌데, 다양한 색채의 눈동자들이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거린다.

그야말로 흥미 어린 안광.

광신도 환관을 볼 때와는 결이 다른 흥미였다.

내셔X지오그래픽 속 동물의 기행을 볼 때 느끼는 호기심이 아닌, 연애 관찰 프로그램을 볼 때 불쑥 솟아오르는 유희 가득한 흥미.

커플이 막장이면 막장일수록 배덕한 흥이 오르는 그 관음적 쾌락.

한마디로, 이 상황은 정말로 이상하다는 거다.

저 타락한 눈빛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지 고민하는데, 디아나의 목소리가 정신 차리라는 듯 고막을 찢으며 들어왔다.

“내 사람?”

“예. 제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절대.”

갑자기 소유권 분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알렉스를 노려보며 빠르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하. 제가 왜 전하의 사람인가요. 제가 가을국 제국민도 아니고, 저는 봄국을…….”

“레이디가 봄국을 대표하게 된 건 내가 직접 봄국에 찾아가 부탁했기 때문이잖아.”

부탁?

너 그렇게 양심 없이 우아하게 말할 거야?

황제한테 고발해서 날 협박했던 거잖아. 그게 어떻게 부탁이야!

“거절하는 그대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편지를 써 그대의 마음을 돌렸고.”

이야, 내가 흑막인지 떠보려고 테스트한 거면서 그걸 이렇게 포장하시네.

“그렇게 그대가 나를 위해 일하게 된 거잖아.”

너에게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긴 하지.

심각하게 미화된 악연이 로맨틱한 서사처럼 놈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탐사가 끝날 때쯤에는 그대가 가을국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 새X가 날 가을국까지 데려가서 부려먹을 생각인가?

선을 그으려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내 대답을 가로채길 좋아하는 엘런이었다.

엘런은 붉은 눈동자를 들어 알렉스를 응시했다.

“레이디 데이지는 봄국의 제국민. 타국인이 함부로 그녀를 데려갈 수 없습니다.”

“왜? 레이디가 직접 올 수도 있잖아.”

“그것 또한 안 됩니다.”

“네가 무슨 권리로 안 된다고 말하는 거지?”

“이에테르 공작을 대신해 그녀를 보호하게 된 보호자로서 반대합니다.”

버뮤다 삼각지대도 아니고, 삼국의 권력자 사이에 앉은 나는 뜻밖의 소유권 분쟁에 끼게 되었다.

이게 무슨…….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 띠링, 알람음이 들렸다.

[메이저 에피소드 ‘여주에게 감긴 세계관 최강자들의 분쟁’이 탐지되었습니다.]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 보상으로 1캐시가 적립됩니다.]

……나쁘지 않네.

분쟁을 중재하려던 나는 자본의 맛을 본 후 얌전히 그 마음을 눌렀다.

원래 주인공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

[아이시스: 와, 다행이다. 사실 영애는 서열이 애매해서 한번 정리하고 들어가야 했는데, 제대로 정리됐네요.]

[아이시스: 이제 누가 영애를 함부로 대하겠어요. 삼국 실세랑 척지고 싶은 게 아니면.]

[동기화 메시지 수신 건수는 10건으로 제한됩니다. 수신이 차단됩니다.]

메시지 제한 때문에 성녀 영애의 말이 끊기고 말았다.

나는 시선을 내려 워치에서 반짝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아이시스: 다들 구경하느라 난리 났네. 하긴 이게 웬 꿀잼이야 ㅋㅋ]

[아이시스: 잘하면 영애가 탐색대 서열 1위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서열 1위?

에이, 무슨 1위예요. 저 왕벌 환관이 남작 영애면 평민이랑 다를 바 없다고, 같은 식당에서 밥도 못 먹는 신분이라고 얼마나 갈궜는데.

다들 은근히 절 아래로 보지 않을까요.

심지어 난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엄밀히 말해 남작 영애도 아니었다. 호칭에 너그러운 사교계 관습 덕분에 아직 귀족 영애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을 뿐.

[아이시스: 뭐라고요? 저 미친 자식이 영애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요?!]

동기화 수신은 차단됐지만, 내 발신 건수는 아직 남아 있던 모양인지 아이시스 영애에게 내 생각이 전해진 듯했다.

다시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끼익.

아이시스 영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녀 영애에게는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별거 아닌 행동에도 절로 시선이 간달까.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모두 그녀를 바라봤다.

성녀 영애는 천천히 제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었다.

“신께서는 높은 곳에 자리할수록, 낮은 곳에 있는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이 세계관의 종교 구절일 말을 나직이 읊조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끌벅적하던 식당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식당을 둘러보던 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침묵 때문이 아니었다.

회의실에서 봤던 것처럼, 식당에 자리한 이들의 눈 안에서 파란 불꽃이 일렁였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낮을수록 더 귀하게 여겨야 함이 옳습니다.”

아이시스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따라 그 푸른 불꽃이 몸집을 더 크게 부풀렸다.

“그러니 데이지 양이 이 자리에서 가장 귀한 이입니다.”

성녀 영애는 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왕벌 환관을 보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벌이 따를 것입니다.”

환관의 눈동자에 자리했던 푸른 불이 팡 터지자 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으어어억! 잘, 잘못했습니다!”

그는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성녀 영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의자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고, 모두의 눈동자에서 그 불꽃이 사라졌다.

‘......뭐야, 이거 뭐예요?’

그녀가 뭘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성녀 영애의 그 발언으로 내 탐색대 일상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

새벽빛이 내려앉은 푸르스름한 설원.

나는 심각한 얼굴로 내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말을 올려다봤다.

응. 절대 못 타.

내가 타 본 말이라고는 롯X월드 회전목마뿐이야.

게임 난이도 미친 거 아니야? 면허도 없는 애한테 스포츠카를 운전하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

현생에서 승마를 배워 본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혀를 차는 내게 AI 담당자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승마’는 유저의 원활한 적응을 돕기 위해 내장된 필수 스킬입니다.]

‘필수 스킬이요?’

[필수 스킬은 ‘승마’와 ‘언어’입니다.]

[봄국은 프랑스어를, 여름국은 한국어를, 가을국은 스페인어를, 겨울국은 영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애는 기본적으로 사계국의 4개 국어에 능통합니다.]

엇, 그러고 보니 사계국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치 한국어를 사용하듯 대화했고, 로마자를 적으면서도 내 모국어 같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세상에.

내장된 스킬은 마치 내가 타고난 능력처럼 발휘되고 있었다.

깨달음을 얻는 나는 멍하니 상태창을 보다 다시 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정말 탈 수 있는 거 아닐까?

시스템을 무한 신뢰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고삐를 잡았다.

“레이디이이이, 위험하옵니다!”

발걸이에 발을 올리는데 도도도도 달려오는 스텝 소리가 들렸다.

왕벌 환관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 도달한 환관의 입가로 하얀 숨이 흩어졌다.

그는 결연한 눈으로 나를 지긋이 내려 보다 제 짐 가방을 벗어던지고 눈 바닥에 엎드렸다.

“저를 밟고 올라타시지요!”

“…….”

이 캐릭터는 참 한결같이 과했다.

나는 둥글게 말린 환관의 등을 보다 무시하고 말안장을 움켜쥐었다.

발을 굴리니 놀랍게도 몸이 껑충 뛰어올랐다. 그리고 마치 자석을 붙여 둔 것처럼 엉덩이가 안장으로 끌려갔다.

스킬의 힘을 확인한 나는 자신감이 생겨 고삐를 움켜쥐고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대충 고삐를 잡고 흔들면 되는 거겠지?

[승마는 교감으로 이루어집니다. 가고 싶은 방향과 속도를 생각하면, 원하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 자율주행 같은 건가?

생각보다 쉬운 스킬 구현에 속으로 박수를 쳤다.

하긴 요즘 스토리 쌓는 난이도가 하드한데 이런 거라도 쉬워야지.

히죽 웃으며 기분 좋게 말을 쓰다듬는데 아래에서 새하얀 털 뭉치가 불쑥 올라왔다.

안쪽에 부드러운 털이 달린 하얀 모자였다.

휘항처럼 생겼으나 꼬리가 없고, 귀와 볼을 따뜻하게 감싸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환관을 쳐다봤다.

환관은 고개를 숙인 채 수줍은듯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다시 팔을 높이 뻗어 내게 모자를 건넸다.

“겨울 설산은 바람이 매섭습니다. 이 방한모를 머리에 쓰시지요.”

내가 받지 않고 있으니 환관이 우물쭈물하다 눈동자를 슬며시 들어 올리며 다시 부탁했다.

“레이디를 위해 제가 밤새 만든 것입니다.”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제발 받아 주시지요.”

“윽.”

우는 미남에 약한 취향을 저격당하고 말았다.

세계관 남주는 모두 존잘이라는 법칙에 따라 그 또한 인물이 훤칠했다. 다만 인성이 그 빛을 가려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뿐.

예민미 넘치는 도회적인 얇은 몸선.

앙칼진 눈매 안,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불안정한 시선.

주먹만 한 얼굴 안에 자리한 붉은 입술.

탐사 끝날 때까지 두고두고 복수할 생각이었는데…….

분노를 잠재우는 동양 미남의 촉촉한 눈동자에 나는 결국 자존심도 없이 모자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환관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몸을 비비 꼬았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난 너무 쉬운 사람인 것 같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식당에서 있던 일이 더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쪽은 내가 얼빠인 거를 다행으로 여겨야 해.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둔 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그에게 보여 주듯 모자를 받아 쓰니 환관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눈가가 붉어지는 게 또 울 기세였다.

“너무, 너무, 너무나 잘 어울리시옵니다!”

그는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재빨리 닦아 냈다.

아니, 이게 뭐라고 울어.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은 사실인지 저 환관은 내 생각보다 착한 사람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몇 번 해 거친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가방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은 이동 중에 허기가 지실 수 있으니 준비한 육포이고, 이것은 목이 마르실 수 있으니 챙겨 둔 물이옵고, 이것은 잠시 한숨 자고 싶으실 수 있으니 준비한 침낭입니다. 서녘의 마녀에게 구매한 보온 마법이 걸린 물건이니 따뜻하게 푹 쉬실 수 있을 겁니다.”

“자, 잠깐만요.”

그러나 환관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것들을 다시 집어넣고는 내 안장에 가방을 매달았다.

두 손을 모은 그가 다소곳이 허리를 굽혔다.

“부디 편안한 여행길 되시길 바랍니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이건…….”

환관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뒤로 물러섰다. 뿌듯한 얼굴로 손을 한 번 흔든 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내게 선물을 잔뜩 쥐여 주고는 뒤돌아 사라졌다.

빠르게 사라지는 왕벌 환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여러 겹으로 겹쳐진 발걸음 소리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각 제국에서 온 신하들이었다.

곧 그들은 결연한 얼굴로 내 말 주변을 둘러쌌다.

“레이디, 제가 말안장을 한번 봐 드리겠습니다.”

“이런 부츠를 신으시면 동상에 걸리기 쉽습니다. 제게 주세요. 털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어떤 마물이 나올지 모르니 속성으로 호신술을 알려 드리지요. 잠시만 시간을…….”

몰려온 신하들이 물건을 들이밀고, 말을 살피며 내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괘, 괜찮아요!”

흡사 좀비 떼 같은 모습에 나는 지레 놀라 얼른 말 머리를 돌렸다.

“레이디이이이이.”

한탄 어린 목소리를 잘라 내며 도망치듯 말을 몰았다.

머릿속으로 의문이 차올랐다.

대체 성녀 영애는 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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