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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33화 (34/208)

33화.

“저, 저은아! 전하 자리는 이쪽이온데……!”

남주를 뺏긴 악녀처럼 씩씩대는 환관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기보다 고소한 심적 미각을 느끼며 엘런에게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평온했다.

나는 엘런을 바라보다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여름국 사람이 공작님을 애타게 부르는데요?”

그제야 엘런의 시선이 올라왔다.

“신경 쓰지 마. 원래 폐하가 새로 사람을 들이면 기 꺾는다고 저러니까.”

아, 저러는 게 폐하 때문이었어?

“참 쓸데없이…….”

굳이 네가 기를 꺾지 않아도 나는 황제 영애에게 대들 생각이 없단다.

오히려 영애를 위해서라면 무릎과 자존심 정도는 무료 나눔이 가능하단 말이지.

정치한다는 놈이 저렇게 캐릭터 파악을 못 해서야.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식당 문이 열리며 한기가 덮쳐 왔다.

엘런이 홀로 회의실을 먼저 빠져나온 모양인지,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들어왔다.

“새벽에 출발해도 나는 상관없으니 그대가 알아서…….”

말을 잇던 황제 영애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황금 모란이 수놓아진 붉은 비단에 박혀 있었다.

“…….”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폐하아아아아!”

식당 안쪽에서 요란한 스텝을 뽐내며 달려오는 환관을 확인한 황제 영애는 고개를 돌려 나와 엘런을 쳐다봤다.

첫눈이 쌓인 설원처럼 고운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폐하, 그 길을 밟고 오시지요. 폐하의 앞길을 위해 소인이 준비했사옵니다아아.”

발랄한 목소리에 황제 영애의 눈썹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북부 대공이라는 칭호는 우리 황제 영애, 디아나에게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주변으로 흩어지는 한기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환관은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눈을 맞췄다.

“폐하, 날이 참 춥지요? 아랫것들을 보내 방을 따스하게 데워 두라 일렀습니다.”

그는 차마 비단을 밟지 못하고 그 옆에 선 채 황제 영애가 걸음을 떼길 기다렸다.

황제 영애는 미소를 지으며 환관의 뜻대로 걸음을 떼 주었다.

“그대가 수고가 많아.”

환관은 그녀의 미소에 벅차올랐는지 울음을 참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숨을 고르고는 제가 준비한 것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걷던 이들은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거나 괜히 헛기침했다.

웃음을 참으려는 게 티가 났다.

저 왕벌의 자태는 계급사회에서도 보기 드문 광기인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녀 영애가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이들과 달리 그녀는 근심 어린 눈으로 나와 눈을 맞추더니 내 손목으로 시선을 툭 떨궜다.

나는 그제야 워치를 확인했다.

화면이 쉴 새 없이 반짝이며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이시스: 영애, 상처받지 말아요.]

[아이시스: 저 미친놈 원래 저래요. 나한테도 그랬어요.]

[아이시스: 디아나가 알아서 해결할 거 같긴 한데 너무 놀라지는 말아요.]

[아이시스: 지금 딱 보니까 각이…….]

“성녀님, 먼저 앞에 서시지요.”

성녀 영애는 AI 동기화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는지, 체이스 경이 말을 걸자 메시지가 뚝 끊겼다.

뭐야, 왜 놀라지 말라는 거지?

“또 손목이 아픈 건가?”

빤히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엘런이 물었다.

“아, 네. 펜을 오래 잡았더니 좀 욱신거리네요.”

손목을 돌리며 수긍하자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회의록 정리는 내가 하지.”

나는 돌리던 손목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이요?”

그 노가다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엘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기사도 정신이라고 해 두지.”

“괜찮습니다. 별로 안 힘들어요. 굳이 이런 데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실 필요가…….”

“솔직히.”

엘런은 내 말을 툭 잘랐다.

“다들 그대 손만 보고 있는 게 거슬리거든.”

문맥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 나는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엘런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맞아. 질투하는 거야.”

엥? 뜬금없이 웬 질투?

“이해해. 현실감이 없겠지.”

의아함에 미간이 좁아지는데 엘런이 손을 뻗어 내 미간을 펴 주었다.

“하지만 마음껏 좋아해도 좋아. 지금 그대 때문에 진심으로 질투하고 있는 거니까.”

치솟은 혈압에 목덜미가 뻣뻣해진다. 인간 저혈압 치료제가 오늘은 왜 가만히 있나 했다.

이마에 닿은 손가락을 치우려 고개를 물리는 찰나, 하얀 손이 눈앞으로 들어왔다.

황제 영애가 엘런의 손을 밀어내며 나긋하게 말했다.

“레이디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기사도에 어긋나지. 엘런.”

의자를 뺀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식판을 보던 시선을 들다 흠칫했다.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어 앉은 황제 영애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손끝으로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머리가 기네요. 식사하는 데 불편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별것 아닌 손짓에 나는 바짝 움츠러들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더 이상해서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거 플러팅 같다고 생각하면 막장이지?

나는 그윽하게 내리꽂히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다 사시나무 떨듯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결국 이 기묘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AI 담당자님을 불렀다.

‘다, 담당자님! 설마 여기에 #GL 키워드도 있나요?’

[캐릭터 키워드 #GL여주 #BL남주는 있지만, 스토리 키워드 #GL과 #BL은 없습니다.]

[스토리 키워드 #GL과 #BL은 에 추가될 예정입니다.]

[♥시즌 2도 많관부♥]

AI 담당자님은 알차게 시즌 2까지 홍보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흐린 눈으로 상태창을 보다 숟가락을 들었다.

뭐…… 어쨌든 황제 영애가 내게 사심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잖아.

엘런이랑 다녔더니 착각이 옮겨 붙기라도 했나 보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한 번 짓고는 다시 식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으려는데 따뜻한 무언가가 내 목덜미를 스쳤다.

“조심.”

다정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이고, 흘러내리던 머리칼이 누군가의 손아귀로 가지런히 모였다.

“폐, 폐하아아!”

사색이 된 환관이 발을 동동 구르며 식당 기둥을 끌어안았다.

“어찌, 또! 이곳에서 이러신단 말입니까! 으억!”

그의 거센 도리질에 휘항 꼬리가 퍽, 그의 입을 때렸다. 그는 잠시 인상을 쓰다 아예 휘항 꼬리를 입에 물고 울음을 삼켰다.

그런데 저 개그감 충만한 몸짓보다도 거슬리는 게 있었다.

또?

‘또’라니?

무슨 소리야, 그게.

나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성녀 영애와 삼검, 사검, 체이스 경은 덤덤한 표정으로 테이블로 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성녀 영애가 환관의 앞을 지나는 순간, 노기 가득하던 환관의 눈빛이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심지어 바닥에 들러붙을 기세로 허리를 바짝 굽혔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감히 성녀님의 길을 막았습니다.”

두 손을 소매에 숨긴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뭔데, 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

성녀 영애는 두 손을 모아 그에게 가볍게 예를 갖추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녀는 바로 내 손목으로 시선을 떨궜다.

또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다.

아. 불편하네, 이거.

계속 워치로 소통을 하는 게 불편해서 메시지를 AI 담당자와 연동했다.

‘담당자님, 메시지 연동해 주세요.’

[AI 담당자와 연동합니다.]

[3건의 메시지가 수신되었습니다. 확인할까요?]

‘넵. 확인해 주세요.’

[아이시스: 걱정하지 말아요. 영애.]

[아이시스: 저 인간이 디아나한테 집착이 심하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심은 더 심한 사람이라 황실 예법을 무시하지는 못하거든요.]

[아이시스: 대충 간택에 황송해하는 시늉해주면 영애한테 시비 못 걸 거예요.]

‘간택? 시비?’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절로 눈썹이 꿈틀댔다.

[아이시스: 감히 환관이 어떻게 황제의 후궁에게 시비를 걸겠어요.]

‘……황제의 후궁?’

머릿속을 파고든 해괴한 단어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바로 사레에 들린 척 기침으로 가렸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아까 분명 담당자님이 #GL 키워드 없다고 했는데!

[아이시스: ㅋㅋㅋㅋㅋㅋㅋ]

[아이시스: 정말로 영애를 후궁으로 들이려는 게 아니라, 환관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아이시스: 황실 여인이 될지도 모르니 건드리지 말라고.]

‘설마 아까 영애가 말한 방법이 이거였어요?’

[아이시스: 디아나는 영애들을 보호할 때 저렇게 굴어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동로판에서 ‘여자 황제 X 여자 후궁’이라니! 그런 사극은 듣도 보도 못 했어!

이거 고증 제대로 한 거 맞아?

세계관의 고증을 지적하자 AI 담당자님이 끼어들었다.

[여름국은 한국 역사와 무관하며, 오직 의식주 문화만을 차용합니다.]

[여름국은 주변국과의 대립 속에서 역사를 만들고, 황실 문화를 발전시켜 온 독자적인 세계관으로서…….]

쏟아지는 AI의 답변에 나는 다시 내 상황에 집중했다.

황제의 후궁이 되게 생긴 이 상황.

오랜 시간 캐릭터들과 함께 살아온 영애들은 저마다 남주를 다루는 노하우가 있었다.

제 식사 시간으로 폭군을 조련하는 봄국 황녀 영애도 놀라웠는데, 후궁 간택으로 신하의 텃세를 해결하는 황제 영애의 처세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입을 앙다문 환관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영애는 현대에서 왔으니까 그렇다 쳐. 근데 여자 후궁을 간택하는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너는 뭐냐고요.

환관의 젖은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격렬한 가치관 혼란을 겪듯.

미천한 동료가 황제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도록 미리 기를 꺾어 둬야 한다는 마음과 황실 여인이 될지 모르는 귀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

나를 정말 황제의 후궁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저런 편견 없는 사람.’

그런데 그때, 갑자기 꽃향기가 밀려왔다.

내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였다.

“폐하, 이제 레이디의 머리카락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손을 내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의아한 마음에 알렉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장미들이 마치 머리 장식처럼 내 머리칼을 묶어 두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알렉스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건 또 뭔 짓이야.

이놈의 속내를 파악하려 부지런히 눈을 굴리는데 알렉스가 갑자기 몸을 숙여 왔다.

그는 디아나 영애의 손을 떼어 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사람에게 누가 손을 대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디아나 영애의 손이 허공으로 밀려났다.

“그게 폐하실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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