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방금 목욕을 끝낸 건지 남자의 뽀송뽀송한 얼굴에 홍조가 자리했다.
그는 장신의 동양 남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런 건가? 대문도 안 보일 정도면 은퇴하고 쉬어야지 왜 여길 따라온 건지…… 민폐가 따로 없군.”
남자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쌍둥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인가, 체이스 경?”
“오? 다행입니다. 청력은 아직 좋으신 듯하니. 아, 그리고 당연히 혼잣말이었습니다.”
체이스는 쌍둥이 검사를 무시하듯 바로 황제 영애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이 말했다.
“여름의 빛, 태양, 생명. 존귀하신 디아나 아이스타스 아르테미스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평온하셨는지요.”
체이스 경의 행동 또한 익숙한 패턴인지 황제 영애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체이스 경은 여전하군. 에너지가 넘쳐.”
고개를 든 체이스 경은 눈을 곱게 접었다.
“주변에 좋은 기운을 주시는 폐하가 여기 계시는데 없던 활기도 샘솟는 게 정상이지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는 제 주군처럼 능글맞게 예를 갖추며 일어났다. 다시 쌍둥이 검사를 스치며 체이스가 나지막이 종알댔다.
“빛이 환할수록 그림자가 짙다지만, 완벽한 폐하를 모시는 이들이 이렇게 예의에 어두울 건 뭐란 말인지. 쯧쯧.”
혼잣말처럼 중얼대는 탓에 뭐라 화를 내기도 애매한 화법이었다.
쌍둥이가 안면을 움찔대는 동안 체이스는 얄밉게도 쏙 제 자리에 앉았다.
한국사를 공부할 때 어떻게 싸움도 못 하는 문신이 무신을 누른 걸까 궁금했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입으로 패면 되는구나.’
제일 늦게 도착한 주제에 체이스 경은 쌍둥이 검사를 까며 자연스럽게 예의 있는 신하 포지션에 안착했다.
알렉스는 체이스의 얌체 같은 행동이 익숙한지 별말 얹지 않았지만,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제 오른팔의 언어폭력이 만족스러운 듯하다.
체이스 경이 어떻게 알렉스 곁에서 버티는지 이해됐다.
저 남자도 보통 멘탈이 아니었다. 사패 남주와 일하려면 저 정도 멘탈은 필수인 건가.
아니, 근데 내가 저 사람이랑 뭐가 비슷하다는 거야?
슬슬 기분이 나빠지는데 알렉스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 모였으니 바로 내일 탐사할 지역부터 정하죠.”
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손끝을 까닥였다.
쩍.
그의 손짓을 따라 원탁이 갈라졌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벌어진 나무판 아래로 작은 나뭇가지들이 돋아났다.
사악. 사아악.
나뭇가지들은 순식간에 작은 산맥을 이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능력이다.
알렉스가 손끝으로 탐색대 기지 모형을 짚었다. 그의 말을 따라 새싹이 점선을 그리듯 듬성듬성 돋아났다.
“가까운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탐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연둣빛 새싹은 가파른 낭떠러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족 지대 경계로 올라가죠.”
마족 지대.
문득 시스템이 보여 줬던 지도가 생각났다.
겨울국의 북부에 있던 닭발의 발목.
[…….]
예, 삼지창의 기둥이요.
나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에 바로 단어를 바꾸었다.
“마족 지대는 스크롤이 발동하지 않는다고 하니 길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탐색은 겨울국 국경 안으로 한정하죠.”
삼검이 알렉스의 말에 반문했다.
“마왕이 겨울국에 있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마족 지대에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적어. 마왕 또한 인간의 반격을 예상할 테니 겨울국에서 빠르게 대응하고 싶어 할 거야. 겨울국에서 이능을 쓰려면 겨울국 영토 안에 있어야만 하니까.”
다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나만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뭔 말이야, 저게?
마족 지대에서는 이동 스크롤이 안 먹힌다고?
마왕은 사계국 안으로 들어와야만 사계국에서 제 힘을 발현할 수 있다는 거야?
이제 막 들어온 뉴비가 따라가기에는 빠듯한 정보였다.
……질문해도 되나?
나는 고민하다 슬쩍 손을 들었다.
내 소심한 제스처를 발견한 알렉스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잘 적고 있습니까, 레이디 데이지?”
언뜻 다정해 보이지만, 내 업무 태도를 지적하며 발언 기회를 잘라 낸 거다.
아니, 나 정보 풀려는 게 아니라 물어보려는 거야.
마족 지대는 스크롤이 안 먹히는 건지 궁금하다고.
“그게 아니라 저 묻고 싶은 게…….”
질문하려는 찰나 팟, 상태창이 켜지며 시스템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마족 지대’는 현재 개발 중인 맵으로 20XX년 출시 예정인 에 추가될 공략지입니다.]
[현재 베타 테스트 중인 유저의 마력, 캐릭터 버프, 캐시 아이템 등의 특수 기능은 마족 지대에서 사용 시 버그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족 지대에서는 이동 스크롤을 사용할 수 없는 거예요?’
[마족 지대 내에서는 스크롤을 사용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사계국과 마족 지대의 시스템 연동이 매끄럽지 않아 마족 지대와 사계국 국경 이동 시 오류 발생률이 높습니다.]
‘오류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데요?’
[테스트 결과 버그 발생률은 94.56%입니다.]
‘……선생님, 90% 이상의 확률로 버그가 일어나는 거면 그냥 안 된다는 소리 아닙니까?’
[…….]
은근 게임에 애착이 강한 AI 담당자님이 토라져 침묵했다.
어쨌든 나는 알렉스에게 묻기도 전에 답을 알게 됐다.
그것도 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답을.
“무엇을 묻고 싶은 거죠. 레이디 데이지?”
그러나 내가 답을 얻은 걸 모르는 알렉스는 묘하게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정보 발설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말에 안심한 듯하다.
나는 내게 주목된 시선을 마주하며 눈만 깜빡였다.
질문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어요.
하나 저들의 기대 어린 눈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억지로 질문을 생각해 냈다.
“아! 대화하는 모든 내용을 적어야 하나요? 아니면 제가 알아서 회의 내용을 메모하면 되나요?”
“다 적어 주었으면 합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알렉스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 자식 자기가 하는 거 아니라고……!
괜히 물어봤다.
알아서 대충 적을걸.
나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씁쓸히 받아들이며 펜을 들었다.
잉크에 적신 펜촉을 종이에 가져다 대는 순간 알람이 울렸다.
[특성 버프 ‘명필 필사가’ ON]
명필 필사가?
나는 상태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적용된 특성 버프인 듯했다.
아니, 시스템 씨 나 진짜 서운해.
내 버프는 왜 다 이 모양이야?
어디다 쓰지도 못할 마족 언어 해석이니, 마족 정보 검색이니.
그리고 뭐? 명필?
글씨 잘 쓰는 게 무슨 버프야!
손만 대면 사업 대박 나서 부를 쌓는다든가, 대충 재료를 뒤섞으면 천상의 요리를 만드는 금손을 가졌다든가, 하다못해 저 알렉스를 쥐어 팰 수 있는 무력이라도 줘야 버프지!
명필 버프를 어디다 쓰라고!
나는 상태창 위로 반짝이는 내 하찮은 버프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내 버프는 그야말로 최강 직장인 버프.
누군가를 위해 골수까지 착취당하기 좋은 능력이었다.
그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나를 쪽쪽 빨아 먹는 알렉스 같은 놈이 저기 있지.
나는 눈동자를 슬쩍 들어 알렉스를 한 번 노려보고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더는 농땡이 칠 여력이 없는 탓이었다.
귓가를 쉴 새 없이 간질이는 대화를 들으며 펜을 움직였다.
사각사각.
기지 근처부터…… 마족 지대 경계까지…… 순차적으로…… 이동…….
그런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누군가 소음을 모두 지워 버린 것처럼.
사각사각.
오직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필기 소리만 들렸다.
다행이다. 대화 따라잡기 버거웠는데.
그래, 너희 계속 생각하면서 조용히 있어 봐.
사각사각.
나는 천천히 그들이 했던 말을 복기하며 필기했다.
이 펜 비싼 건가? 감촉이 장난 아니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매끄러운 감각이 너무 좋았다.
특히 거친 종이를 긁어 내리는 소음이 환상적이었다.
심장의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내리는 파도 같기도 하고, 고막에 포근하게 감기는 솜털 같기도 하고.
한석봉 선생님의 마음이 이랬을까.
잘 써지니 욕심이 들어 더 진지하게 글씨를 쓰게 됐다.
사각사각.
손목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알파벳의 굴곡을 완벽하게 그려 냈다. 천천히 알파벳을 적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묘한 쾌감이 일었다.
[특성 버프 ‘명필 필사가’ OFF]
[버프가 종료됩니다.]
다시 봐도 참 아기자기한 버프다.
이 게임 쓸모없는 디테일이 많아. 대체 명필이 어디에 쓸모가 있다고 이걸 버프라고 부르니?
나는 시스템의 소소함이 귀여워서 웃으며 고개를 들다 흠칫했다.
원탁에 둘러앉은 각국 정상들이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살폈다.
뭐야, 나 뭐 잘못했어?
이해할 수 없는 주목에 미간이 좁아지는데, 워치에 메시지 알람이 떴다.
[아이시스: 뉴비 영애 글씨 쓰는 거 ASMR 재질이네…… 홀린 듯이 다 봤어요.]
[아이시스: 힐링이야 힐링.]
[아이시스: 조금만 더 써줘요.]
나는 메시지 속 낯선 단어를 보며 한쪽 눈썹을 까닥 들어 올렸다.
힐링?
의아해하는데 다시 한번 손목에 빛이 반짝였다.
[디아나: 영애, 나랑 여름국 안 갈래요?]
[디아나: 사관으로 모실 테니 같이 가죠.]
[디아나: 보수는 만족스러울 겁니다.]
황제 영애의 입사 제안이 수신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로판에 잘 맞는 사주 같다.
황제 직고용이라니.
중세에 태어났으면 입신양명하여 집안을 일으켰을 상이 아닌가.
아깝다, 아까워.
실없는 생각에 웃음이 멋대로 흘러나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펜을 내려 두는데 체이스 경이 내 손을 보다 미간을 확 좁혔다.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벌렸다.
“탐사 후에는 피곤할 수도 있으니 7일간 탐사할 7개 구역을 오늘 미리 정해 두는 게 어떠실까요?”
갑작스러운 체이스 경의 발언에 나는 내려 뒀던 펜을 다시 들어 잉크를 찍었다.
[특성 버프 ‘명필 필사가’ ON]
체이스 경의 발언을 적고 펜을 내려 두려는데, 회의 내내 조용히 있던 사검 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맞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삼검 씨도 거들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기억하며 다시 사각사각 글씨를 적었다.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쓰고 있는데 또 침묵이 이어졌다.
회의 끝났나?
슬쩍 눈동자를 들어 보니 그들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