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나는 그림에 시선을 둔 채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무슨 그림인지 알 것 같아요.”
“역시.”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렇게 된 거 흑막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알렉스에게 정보를 퍼줄 생각이었다.
나는 너희 편이야.
혹시라도 내가 과거에 죄를 지었다면 꼭 오늘을 기억하고 사면해 줘.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마왕 아내의 초상화예요. 마왕이 직접 그렸고요.”
“아내의 초상화?”
의외라는 듯 알렉스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어울리지 않게 애처가였나 보군.”
그야 여긴 로맨스 판타지 속 세상이니까.
#후회남 키워드 있는 거 아닌 이상 웬만하면 다 애처가일걸?
아니다, 후회남도 결국 애처가가 되니까 모두가 애처가인 세상이라 해야겠구나.
알렉스 너도 결국 누군가의 애처가가 될 운명이란다.
나는 그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왜 웃어?”
“그냥요.”
“그냥 왜?”
“그냥 웃지도 못하나요? 왜 이유를 물으세요.”
내가 봐도 내 말투가 참 아슬아슬하다.
나는 예의 있게 살고 싶은데 남주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때 귓가로 또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 안에 새겨진 마왕의 편지를 해석할까요?]
‘편지?’
[그림 안의 점과 선은 마왕이 죽은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입니다. 해석을 원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와, 글로 그림을 그렸다고?
마왕 천재야?
나는 호기심이 일어 얼른 해석해 달라고 AI 담당자님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림 위로 불투명한 창이 입혀지더니, 그 위로 해석된 내용이 떠올랐다.
[그대가 떠난 지도 십수 년이 지났는데 왜 나는 시간에 갇혀 있는 걸까.]
[깊은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뜨면 그대가 있을까 기대한다. 하나, 실망만 반복할 뿐 그대가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그대를 그릴 수도 없다.]
……뭐야, 슬프잖아.
순간 마왕에게 감정이입 하는 바람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그냥 물어본 거야. 울 건 없잖아.”
당황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유리 전시관 위로 알렉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그는 유리를 통해 나를 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편지 내용이 너무 슬퍼서 그래요.”
“편지?”
“네, 그림 안에 있는 저 점과 선이 마족의 언어거든요. 마왕은 천재였나 봐요. 그냥 막 찍은 것 같은데 내용이 절절하네요.”
그런데 편지의 내용이 다 해석된 게 아닌지 문장이 지워지더니 이내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그대를 빼앗은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대를 따라 살려 하였으나, 애초에 나는 그대와 다른 존재. 이것이 내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그대가 나를 많이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 이 마음이 욕심이라면 그 원망을 달게 받으리.]
[평생 그대의 곁에서 분노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그날을 꿈꾸겠다.]
절절한데…….
애절하긴 한데…….
좀 무섭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무슨 내용인데?”
알렉스가 불쑥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갑자기 가까워진 얼굴에 당황해 그를 밀어냈다.
“전하, 체통 좀!”
한 걸음 밀려난 알렉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데이지 양은 체이스와 닮은 거 같아.”
“체이스가 누구예요?”
“그때 봤던 내 보좌관.”
아, 그 금발 보좌관.
맞아, 우리가 비슷한 거 같긴 했어. 그쪽도 너 보면서 욕 삼키느라 힘들어하더라.
“목욕하러 갔으니까, 한 시간 뒤면 올 거야.”
오든 말든 내가 알 바야?
맥락 없는 TMI 유출에 떨떠름해지는데 알렉스가 혼잣말을 했다.
“체이스를 보면 레이디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지.”
내가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는 한, 평생 네 마음을 이해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대답 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알렉스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게 무슨 내용이라는 거야?
“아, 너무 그리운데 이제 당신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다. 당신을 죽인 인간들에게 복수할 거다. 그런 못된 나를 다시 만나도 떠나지 말아 달라. 그런 내용이에요.”
“인간에게 복수?”
알렉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인간계에 멋대로 먼저 침입한 게 어떻게 복수가 된다는 건지. 미친놈이군.”
미친놈이 미친놈을 비난하는 희귀한 광경을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도서관을 빙 둘러보다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여기 있는 건 전부 마족에 관련된 것들이니 틈나는 대로 읽어 봐. 물론, 반은 이미 레이디가 필사한 것들이니 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알렉스는 놀리듯 뒷말을 덧붙이며 다시 회의실로 나갔다.
나는 그를 따라 대회의실을 가로지르다 걸음을 멈췄다.
아까와 달리 회의실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엘런과 처음 보는 여자 한 명.
그녀는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 살포시 얹은 하얀 베일과 색깔을 맞췄다.
그 하얀 천자락 사이로 드러난 연보랏빛 머리칼.
겨울 햇살에 은은히 반짝이는 광택이 예사롭지 않았다.
부드럽고, 고아한 빛무리가 그녀의 주변으로 산란한다.
실리콘 인형처럼 보드라운 얼굴선과 처연한 보랏빛 눈동자.
그녀에게 존재하는 색은 하얀색과 보라색.
성스럽고 신비한 색채.
누가 봐도 성녀였다.
그 아름답고 성스러운 여인을 보며 나는 성녀 영애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잘 맞을 거라고 했던 그 말.
예언자라 그런가.
과연 미래를 몇 수 내다본 말이었다.
성녀 영애와 나는 아주 잘 맞을 것이다.
나는 예쁜 언니들에게 나를 잘 맞추는 천성이 있으므로.
‘담당자님! 저 메시지…….’
흥분한 마음으로 성녀 영애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멈칫했다.
동기화 메시지는 한 장소에서 10건으로 제한되니 신중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라리사 영애에게 주접을 떨다 메시지 회차를 날린 경험이 있어서 이번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성녀 아이시스도 같은 생각인지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언뜻 묵례처럼 보이나, 저것은 나를 알아본 그녀의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근거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
“레이디 자리는 여기야.”
자연스레 원탁으로 걸어가던 나는 알렉스의 말에 흠칫했다.
그는 원탁에서 떨어진 사관 책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요?”
……왜 나 소외시켜?
너희는 황족이고, 고위 귀족이고, 성직자인데 나는 한낱 남작 영애라 그래?
섭섭한 눈으로 쳐다보니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직접 서랍을 열어 깃펜들과 종이들을 꺼내 줬다.
“여기서 레이디가 가장 글씨를 잘 쓰고 지식이 많잖아. 그대가 사관을 맡아 줬으면 해.”
“제가 글씨를 잘 써요?”
처음 들어보는 말에 눈을 찌푸리는데 알렉스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유명한 명필이잖아. 물론 그 사람이 그대인 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만.”
내가 필사한 걸 보고 저러는 모양이다.
그제야 나는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이놈은 일부러 나를 회의장에서 배제하는 거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되도록 저 혼자 마족의 정보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 안에서 제대로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고 싶은 모양이다.
성녀 영애와 황제 영애와 함께 앉을 수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나는 순순히 알렉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회의에서 벗어나는 건 환영이지.
현생에서 블랙 기업에 다닌 탓에 월요일 아침마다 본부장님까지 들어오는 회의를 하고는 했다.
월요병으로 혼미한 정신을 다잡으며 의견 제안 기회를 노리던 그 고된 나날들.
거기서 제외해 준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얌전히 사관 책상에 앉았다.
나름 작업 환경에 신경을 썼는지 의자도 푹신하고 안락했다. 테이블 높이와 펜의 그립감도 뛰어나고.
자기 사람은 잘 챙긴다더니…….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저놈의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다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분들이 많으니, 모두 착석하면 시작하지요.”
“네, 전하.”
알렉스의 말이 끝난 후 묵직한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 의자에 앉은 것처럼 다들 제 책상을 보거나 허공을 보며 대기했다.
나는 그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인사를 준비했다.
사실 성녀 영애를 보는 순간부터 심장이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담당자님, 저 아이시스 영애에게 메시지 보내 주세요.’
[AI 담당자 ON 상태로, AI 담당자 시스템과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네, 동기화 메시지 보내 주세요.’
나는 주접이 가득한 마음을 꾹 누르고 최대한 담백한 인사를 건넸다.
[아이시스 영애, 반가워요! 우리 오프라인에서는 처음 보네요.]
내가 메시지를 보내자 영애가 갑자기 움찔했다.
그녀는 허공을 응시한 채 눈동자만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도 연동 메시지를 쓰는 듯했다.
[아이시스: 회의 끝나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먼저 연락해줘서 고마워요 :)]
[아이시스: 맞다. 데이지 영애, 밥은 먹었어요? 회의 끝나고 같이 식사할래요?]
아이시스는 한국인답게 밥으로 인사를 하고 밥으로 만남을 제안했다.
[먹긴 했는데 또 먹을 수 있어요! 좀 이따 같이 가요.]
[아이시스: 좋아요. 아까 황제 영애도 출발한다고 했거든요. 아마 몇 분 안에 도착할 거 같은데 회의 빨리 끝내고 셋이 밥 먹어요.]
드디어 황제 영애도 보는구나!
그런데 바로 연달아 아이시스의 메시지가 수신됐다.
[아이시스: 아, 영애 그거 알아요?]
[아이시스: 내가 디아나 영애한테 영애 얘기하면서 삼거미 사거미 호위 붙여줄 수 있는지 슬쩍 물어봤거든요. 근데 말이죠....]
[아이시스: 글쎄, 디아나 영애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아이시스: 세상에나 글쎄~~~~~!]
아이시스는 장난치듯 메시지를 끊어 보내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분주한 소음이 따라 붙었다.
수를 알 수 없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뭉근하게 공기를 휘젓는 몇 겹의 목소리도.
끼이익.
정문이 열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 소음들이 더 선명해졌다.
그때, 구름이 걷힌 건지 창으로 강렬한 햇살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들이찬 빛에도 불구하고 따스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회의실 문으로 훅 밀려온 겨울 한기에 실내가 얼어붙었다.
팔랑팔랑.
책상 위의 종이가 그 거센 바람에 정신없이 흩날리고 성녀 영애의 차분한 머릿결이 펄럭였다.
혼란스러운 배경을 짓누르듯,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고막에 깊이 새겨졌다.
붉은 장포 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원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금빛 상투관으로 높이 묶은 반절의 머리 아래로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
신중한 걸음걸이를 따라 그것들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윤곽에 달라붙은 겨울 햇살 탓에 그녀에게 후광이 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폐하.
조각처럼 날카로운 얼굴선 안에 자리한 차분한 검은 눈동자.
긴 속눈썹만큼이나 큰 키.
그 길쭉한 선에서 뻗어 나오는 호방한 기운.
무협지 지식이 전혀 없어 무공에 대해 1도 모르는 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이 세계의 무공 고수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상석을 알아본 듯 바로 알렉스와 엘런의 사이에 앉았다.
착석하는 그녀의 몸짓을 따라 비단 장포가 천천히 떨어졌다.
저게 아이시스 영애가 말한 무협지 비주얼이구나.
진짜 디자인팀에서 손목을 간 것 같은 펄럭임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멋진 폐하의 시선이 갑자기 내게로 흘러왔다.
그저 시선을 마주했을 뿐인데 밀려온 기에 눌려 흠칫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내 귓가로 아이시스의 메시지가 들렸다.
[아이시스: 글쎄, 우리 폐하가 직접 영애 호위를 맡아주신다고 한 거 있죠!]
믿을 수 없는 말에 나는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앉아 있는 황제 영애가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 입매를 부드럽게 기울인 그녀가.
그녀의 웅장한 미모만큼이나 위압감 넘치는 메시지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디아나: 안녕, 뉴비 영애.]
CH3. 마왕 동면지 탐색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