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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28화 (29/208)

28화.

신문을 치운 그가 부스스 눈을 떴다.

허공을 배회하던 금빛 눈동자가 이쪽으로 미끄러져 왔다.

나는 움찔 뒤로 물러서다 침대 기둥에 머리를 부딪혔다.

“윽.”

그 모습이 웃겼는지 알렉스가 웃음을 흘렸다.

아니, 남의 숙소에 들어온 건 저놈인데 내가 왜 놀라. 화를 내야지!

뒤늦게 인상을 찌푸리며 위엄 있게 나가라고 말하려는 찰나, 알렉스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누워 나를 쳐다봤다.

그는 가증스럽게도 눈꼬리를 슬쩍 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렸잖아.”

“……숙면하고 계시지 않았어요?”

알렉스는 부정하지 않고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서.”

“저, 혹시 가을국은 봄국과 문화가 다른가요?”

“어떤 문화?”

“누굴 만나려면 먼저 만나자고 의사를 묻고,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만나야지 왜 맨날 멋대로 찾아오세요?”

“만나자고 하면 만나 줄 거야?”

“……생각은 해 보겠죠.”

너 같으면 만나겠니?

나는 애매하게 답을 피하며 시선도 피했다.

전혀 웃긴 얘기가 아님에도 계속 싱글거리던 알렉스가 또 바람 소리를 내며 웃음을 흘렸다.

다시 그쪽을 쳐다보니 자세를 고쳐 앉은 알렉스가 나른한 얼굴로 목을 한 번 돌렸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지지 않으려 직사광선처럼 내리꽂는 금빛 시선을 마주했지만, 불안함에 심장이 떨렸다.

‘담당자님, 혹시 여기 112 신고 같은 기능은 없나요?’

[치안을 담당하는 근위대나 자택 호위 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산속에 근위대가 있을 리가. 애초에 난 호위 기사도 없고.

봄국에 돌아가면 용병 소개소에 가서 검투사 남주부터 고용해야겠다.

안전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데 또다시 AI 담당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급 상황 시, 상황을 탈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와! 그게 뭔데요?’

[더 이상 서사를 진행하고 싶지 않을 경우 로그아웃이 가능합니다.]

‘……그냥 죽으라는 거네.’

[아닙니다. 죽음을 경험하기 전, 스스로 로그아웃이 가능합니다.]

‘담당자님, 사람들은 그걸 자살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자살과 로그아웃은 다릅니다. 사전 검색을 시작합니다. 로그아웃은 사용 중인 네트워크 업무를 종료…….]

‘아, 됐어요! 들어가요.’

AI 담당자님은 본인이 틀린 것 같을 때면 꼭 저렇게 팩트를 물어 오려고 애썼다.

말싸움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는데 정석으로 참 잘 배웠다.

AI 덕분에 긴장이 풀어진 탓에 나는 알렉스의 침묵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근데 내가 편해진 것과 반대로 알렉스는 뭔가 불편해진 것 같았다.

그는 대놓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단 말이야.”

여기서 제일 이상한 건 너야.

그러나 예의 때문에 폭군에게 죽을 뻔했던 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예의 바르게 상대의 질문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뭐가 또 이상하세요.”

“겁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나한테 겁먹지를 않잖아.”

“제가 황태자님을 무서워했으면 좋겠어요?”

변태야?

사람한테 공포심을 조성하고 싶어?

내 말에 알렉스가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톡 톡.

그가 손끝으로 나무 소파를 건드렸다.

“눈을 피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면서도 또…….”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온다.

“그대가 울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하기도 하거든.”

“……변태세요?”

예의 바르게 굴려 노력한 보람도 없이, 계속 하고 있던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돌아가면 호위 기사부터 찾아야겠어. 이 세계관에서 내 성격으로 살아가는 거 자신 없다. 절벽 엔딩이 코앞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알렉스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어느 쪽으로 묻는 거야?”

알렉스는 찐 변태처럼 어느 분야의 변태를 뜻하는 건지 물었다.

이걸 이해한 내가 싫지만, 앞에서 예쁜 얼굴로 색기를 흘려 대는 저놈은 더 싫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내가 질색하자 알렉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나른하게 기지개를 폈다. 그러다 툭 물어왔다.

“데이지, 솔직히 우리 좀 잘 맞지 않아?”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전하 같은 분과는 상성이 맞지 않아요. 제 성향 존중해 주세요.”

“살다 보면 성향 정도는 바뀌는 거지.”

알렉스는 나를 놀리는 데 재미가 붙었는지 눈을 휘며 말했다.

나는 혼신을 다해 정색했다.

알렉스는 금세 내게서 흥미를 거둬들이고 시선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나무판자가 갈라지는 묵직한 소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우드득 우드득.

내 짐 가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달칵, 가방이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나뭇가지가 구불구불 기어 나왔다.

“으악!”

나뭇가지는 마치 지능을 가진 것처럼 바닥을 기며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기괴 영화 같은 비주얼에 다리를 들어 침대에 웅크리는데, 허무하게도 나뭇가지는 알렉스를 향해 돌진했다.

나뭇가지는 그의 손끝에 돌돌 감기더니, 갑자기 수축하기 시작했다. 마치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낚싯줄처럼 그 길이가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그제야 저게 뭔지 이해했다.

나뭇가지 끝에는 황태자가 내게 건넸던 편지가 있었다.

실링에서 돋아난 가시가 순식간에 나뭇가지가 되어 알렉스에게 뻗어 온 것이었다.

와, 저게 무슨 마법이야?

나무가 성장하고 수축하고.

지난번에 보니까 꽃도 피우던데.

알렉스의 손에 편지를 쥐여 준 나뭇가지는 줄어들다 끝내 편지지로 다시 흡수되었다.

나는 그의 이능을 신기하게 바라보느라 그가 내게 주었던 편지를 다시 뺏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알렉스는 손가락에 끼운 편지를 까닥거리다 실링을 뜯었다.

“무슨 내용인지 안 궁금했어?”

그는 편지를 펴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던지라 그는 금세 내 앞에 도착했다.

나는 내밀어진 종이에 시선을 둔 채 바짝 굳었다.

알 수 없는 문자였다.

아니 이걸 문자라고 해도 되나?

모스 부호처럼 점과 길이가 다른 선이 배열된 편지였다.

띠링.

그런데 그 순간, 내 앞에 상태창이 펼쳐졌다.

[특성 ‘웅크린 집순이’ 여주 버프가 발현됩니다.]

웅크린 집순이 여주 버프?

전혀 버프 같아 보이지 않는 허접한 이름에 나는 시스템이 개그를 치나 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진지하게 버프를 작동했다.

[특성 버프 ‘마족어 해석’ ON]

순간 편지 위로 불투명한 상태창이 겹쳐지더니 그 위로 해석된 문장이 떠올랐다.

[세 개의 별이 일직선이 되는 날, 그날이 되면 알 수 있다. 어떤 별이 시작점이고 어떤 별이 끝점인지. 그날이 올 때까지는 삼각을 그리는 그 별을 바라보는 수밖에.]

뭐야, 이게?

별은 뭐고 삼각형은 뭐고.

마치 별자리를 묻는 척하며, 별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 내라는 수능 문제를 마주한 느낌에 매우 기분이 나빠졌다.

근데 버프면 이걸 나만 해석할 수 있는 건가?

나는 황태자에게 물으려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했다.

알렉스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레이디는 이걸 해석할 수 있나 보네.”

알렉스는 나를 뼛속 깊이 의심하고 있다. 내가 마족의 글을 필사한 사람이라고.

슬프게도 마족 언어 해석 버프가 있는 걸 보니 정말 내가 그동안 필사를 해 온 듯하다.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스템 씨, 흑막 잘못 고르셨어요.

저는 그런 야망 있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바로 심문할 줄 알았던 알렉스가 편지를 품에 넣으며 이상한 말을 했다.

“너무 귀찮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우리는 정말 그대의 힘이 필요해.”

내 힘이 필요하다고?

나는 무거운 눈동자를 들어 올려 알렉스를 쳐다봤다.

비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순수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깨끗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다면 부탁하고 싶은데. 혹시, 다른 것도 읽어 봐 줄 수 있어?”

본능적으로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핑계를 찾아 입을 달싹이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이불이 일렁거렸다.

후두둑.

팝콘이 터지듯 무언가 톡톡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불 한 귀퉁이가 찢어졌다.

놀란 나와 달리 알렉스는 평온한 얼굴로 이불 안에서 목화꽃 더미를 꺼냈다. 그는 목화꽃 더미를 내 머리에 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가자.”

갓 만든 솜 모자를 씌워 준 알렉스가 문을 고갯짓하며 빙긋 웃었다.

그랬다.

이 황족 놈은 내게 선택지를 주는 놈이 아니었다.

***

숙소와는 크기부터 다른 웅장한 목조 건물에 들어서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쭈뼛쭈뼛 걸으며 알렉스의 뒤를 따라붙었다.

이곳은 공동 건물 중 하나인 전략 기지였다.

달칵.

회의실에 들어선 그가 문을 닫았다.

거대한 원탁이 방 한가운데 자리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사관을 위한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회의실이 목적지가 아니었는지, 알렉스는 회의실을 가로질러 벽에 있는 중문을 열었다.

회의실 옆방은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가을국 특유의 정숙한 옷을 입은 남자들이 부지런히 책장에 책을 꽂고, 전시관 안에 커다란 전지를 끼우고 있었다.

알렉스는 유리 전시대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전시대 안에는 기하학적인 그림이 담겨 있었다.

수많은 점과 선이 그려 낸 점묘화.

여인의 그림자를 형상화했는데, 그림자마저 아름다운 미인도였다.

“이게 무슨 그림인 줄 알아?”

내가 무슨 구글이니? 뭐든 다 아는 줄 알아?

모른다고 답하려는 찰나 띠링, 하고 알람음이 들렸다.

[특성 버프 ‘마족 정보 검색’ ON]

[작명 ‘아내’. 마왕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직접 그린 작품. 점과 선을 이어 자신의 마음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마족의 그림이래. 레이디라면 알지 않을까 싶었어.”

그러니까.

나 왜 아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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