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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27화 (28/208)

27화.

눈에 닿은 온기가 천천히 멀어졌다. 곧 그 감각의 빈자리를 강렬한 한기가 뒤덮었다.

천천히 눈을 뜨니 차창 너머로 새하얗게 물든 세상이 보였다.

“와…….”

새어 나온 탄성이 하얗게 흩어졌다.

그 입김을 바라보는데 무릎 위로 무언가가 푹신하게 내려앉았다.

“추우니까 이걸 걸쳐.”

엘런은 제 옆에 놓여 있던 검은 케이프를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어깨에 걸치며 머쓱한 눈으로 엘런을 쳐다봤다.

“정말 이동 스크롤이었네요.”

“이동 스크롤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큰 이동 스크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작은 스크롤 하나가 내 한 달 품위 유지비만큼 비쌌는데 그걸 수천 개는 붙인 크기라니.

그 정도면 날 팔아도 못 사지 않을까? 품위 유지비를 몇 달은 모아야 하는 거지?

빗나간 의식의 흐름 탓에 내 몸값을 열심히 계산하고 있는데 엘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이동 스크롤은 군용으로 개발된 거니까. 말과 물자를 옮길 수 있는 크기가 일반적이었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엘런은 내 눈빛에서 박탈감을 읽었는지 멋쩍게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특수 스크롤이니 신경 쓰지 마. 그대가 가진 스크롤이 일반적인 상품이야.”

배려는 고맙지만 쓸데없는 배려였다.

난 충분히 행복하다고.

나는 비에른이 준 스크롤 상자를 소중하게 안고 문가를 쳐다봤다.

“이제 내려도 되나요?”

엘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

메마른 한기가 훅 밀려왔다.

나는 후드를 써 머리카락을 꼼꼼히 집어넣고 마차에서 내렸다.

자박.

두툼히 쌓인 눈에 발끝이 푹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츠라도 신고 올 걸 그랬다.

내 부족한 준비성을 탓하며 뒤를 돌아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새하얀 설원 끝, 그 너머로 보이는 수십 개의 하얀 산맥.

내가 놀란 건 새하얀 풍경 때문도, 산수화처럼 겹쳐진 다양한 명도의 설산 때문도 아니었다.

하얀 산맥 너머 세 갈래로 나누어진 세상 때문이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그 세 갈래의 산맥은 꼭 화려한 닭발 같았다.

가장 오른쪽 발가락에는 꽃이 만개한 세상이 펼쳐져 있고, 가운데에는 녹음 짙은 세상이 뻗어 있으며, 가장 왼쪽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하얀 닭발의 세 발가락에 골무를 끼운 듯한 느낌.

스프링 플라워, 심플 그린, 비포 선셋. 나는 혼자 골무들을 네이밍 해 보며 설산 아래를 바라봤다.

[사계국의 지형을 확인하시겠습니까?]

감성 충만한 내 작명이 못마땅했는지 AI가 조심스레 세계관 설명을 제안했다.

‘사계국 지형이 어떤데요?’

마지못해 물어 주니 팟, 상태창이 스크린처럼 커졌다. 불투명한 화면 위로 사계국 지도가 그려졌다.

근데 내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다.

사계 대륙은 정말로 닭발 모양이었다.

[삼지창입니다.]

기분이 나빴는지 AI 담당자님이 내 생각 속으로 끼어들었다.

‘무슨 삼지창 기둥이 저렇게 짧고, 포크 부분은 또 저렇게 길어요?’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최북부 마족 지역은 끝없는 지대로…….]

‘아아, 그거 정말 TMI. 디자인 스토리 듣고 싶지 않아요. 심플하게 설명 끝내 주세요.’

나는 또 급발진하는 AI 담당자님을 달래며 TMI를 잘라 냈다.

[봄국은 항시 꽃이 피는 영원한 봄, 여름국은 사시사철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여름, 가을국은 낙엽과 열매, 풍요와 상실이 공존하는 가을의 나라입니다.]

[세 국가는 겨울국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품고 있으며, 그 세 갈래의 산맥은 겨울국 중부에서 하나로 만납니다.]

[겨울국의 남부는 세 갈래의 산맥을 보유하고 있기에 봄, 여름, 가을의 날씨가 공존하며 산맥으로 합쳐지는 구간부터는 마족 지대의 영향을 받아 겨울 날씨를 유지합니다.]

그러니까 닭발의 골무 낀 부분은 봄국, 여름국, 가을국의 영역이고 하얀 발가락 윗부분과 발목은 겨울국의 영역이란 소리였다.

[닭발이 아닙니다. 삼지창입니다.]

‘네네, 알았어요.’

삼지창이라 주장하는 AI의 말을 받아들이며, 지도 윗부분으로 시선을 들었다.

삼지창 기둥 부분은 하얗고 길었다.

[겨울국과 맞닿은 북부 지역은 마족의 영역. 영원한 겨울의 지대입니다.]

‘겨울국은 아래로는 3계절의 영향을 받고 위로는 마족 지대의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군요.’

[네, 겨울국은 사계절이 공존하는 대륙 최고의 강대국입니다.]

최고의 강대국이라기엔 지금의 몰골이 너무 초라한데.

나는 새하얗게 얼어붙은 겨울국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쨌든 지금은 마왕의 저주 때문에 원래는 봄, 여름, 가을 날씨를 지녀야 할 겨울국 남부 지역이 얼어붙었단 소리죠?

[네, 그렇습니다.]

나는 납득하고 상태창을 껐다.

하얀 설원 끝에 자리한 세 개의 계절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공존.

사계절이 맞닿은 세상은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게 묘한 기분을 줬다.

진짜 판타지 세계가 맞구나.

나는 그제야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이 설산의 끝, 세 갈래의 길이 합쳐지는 지역인 이유를 이해했다.

여기부터는 태초의 겨울.

마왕의 저주가 깃든 시작점이었다.

이곳부터 3국과 맞닿는 남부 지역이 빙결된 거니까.

#디스토피아를 좋아하는 먼치킨 영애들이라면 이 상황에 흥분했겠지만, 나는 내향적 집순이라 바짝 긴장했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나도 얼어붙는 거 아니야?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엘런과 그를 따라온 수하들이 마차를 언덕 위로 끌고 가고 있었다.

“같이 가요!”

나는 얼른 속도를 높여 그들의 뒤로 따라붙었다.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올라온 순간 나는 그대로 굳었다.

언덕 위 평지에는 통나무집이 여러 채 있고 심지어 한쪽에는 마구간이 있어 수하들이 그곳에 말을 정렬하고 있었다.

게다가…….

꽃?

한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통나무 지붕을 감싼 화사한 꽃과 잎사귀와 넝쿨들이 보였다.

마치 캠프장 같은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에 나는 시선을 좀 더 안으로 옮겼다. 통나무 집 뒤로 거대한 목조 건물이 세 채 더 있었다.

“배가 고프면 식사부터 할까?”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게 있는데 옆에서 엘런이 내 팔을 툭 건드렸다.

그는 대답 없는 나를 커다란 목조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식당이었다.

얼결에 식사를 마친 나는 엘런을 따라 통나무 주택 단지를 투어했다.

거대한 목조 건물 하나는 온천이 나오는 공중목욕탕이었고, 하나는 전략 회의를 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은 당장 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할 것 같은 완벽한 풀옵션 타운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흐린 눈으로 엘런을 올려다봤다.

“저희 탐험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무슨 스키장 놀러 온 줄?

뒷말은 삼켰는데 눈치챈 엘런이 피식 웃었다.

“전하의 유일한 장점이지. 자기 사람에겐 끔찍하신 거. 적어도 기지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가 불편할 일은 없을 거야.”

엘런은 봄국의 국기가 새겨진 통나무 단지로 날 데려가며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하루 머물 기지에 이렇게 공을 들여요?”

아깝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엘런이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하루라니? 계속 여기 머물면서 탐색하는 건데.”

나는 엘런 뒤로 보이는 가파른 산맥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매일 탐색을 하러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거 완전 지옥 훈련 아니야?

질색하는데 엘런이 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번엔 양쪽 눈을 찡그렸다.

“그게 합리적이지 않나? 스크롤이 많이 소비되긴 하겠지만 여기서 여독을 풀면서 전략 회의까지 할 수 있잖아.”

“스크롤이요?”

나는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움찔했다.

“설마 매일 스크롤로 이동해서 탐험하나요?”

엘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잖아.”

엘런은 내게 탐험 방식을 설명해 줬다.

매일 지역을 정해서 스크롤로 이동해 탐색한 뒤, 저녁에는 다시 스크롤을 찢어 기지로 돌아올 예정이란다.

그래 편하긴 하겠지.

그치만.

“저희 탐색대 인원은 총 몇 명이에요?”

“봄국은 그대와 나 두 명, 가을국은 전하와 아이시스 성녀, 그리고 체이스 경, 여름국은 디아나 황제와 호위 둘로 알고 있어. 그 외 인원들은 기지를 수호하며 자료를 정비할 거고.”

즉, 탐사 대원은 총 8명.

매일 스크롤을 왕복으로 찢으면 하루에 16장.

한 달은 탐험을 한다고 했으니까 최소 480장이다.

“저희 예산 괜찮은 거예요?”

“예산?”

“스크롤이 저렴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국고를 멋대로 낭비해도 되나요?”

“그 정도 쓴다고 휘청댈 국가들이 아니잖아.”

나는 입을 뻐끔댔다.

이게 그 기분인가?

나도 재벌인데, 최상위 재벌을 만났을 때 느끼는 박탈감.

그래도 뭐, 내 돈도 아니고. 돈 많은 애들이 편하게 코스 짜겠다는데 그냥 묻어가자.

나는 남의 돈이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엘런의 설명을 듣다 숙소로 돌아왔다.

나무문에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가 봐도 내 숙소네.

나는 손끝으로 음각된 내 이름을 쓸어 봤다.

플랫폼 설문 조사 당시 적어 둔 내 영어 이름.

그 뒤에는 시스템이 랜덤으로 붙여 준 미들 네임과 성이 적혀 있었다.

현생과 게임 세계가 뒤섞인 문자는 꼭 고유 코드 같았다. 그래도 이제 좀 시간이 지났다고 이 이름에도 정이 들고 있다.

나는 예쁜 알파벳을 톡톡 건드리다 문을 열었다.

끼익.

새로 지은 집인지 나무 경첩 소리가 뻑뻑하다.

그래도 실내에 나무 특유의 시원한 향이 가득해 기분이 좋았다.

타탁타탁.

심지어 벽난로 덕에 따스하기까지 하다.

근데, 나무 벽난로인데 왜 불이 안 붙지?

신기해서 벽난로를 응시하며 케이프를 벗었다.

아니다, 뭐가 이상해.

종이 하나로 수백 킬로미터를 움직이는 세상인데.

이것도 뭐 마력 같은 거로 만든 거겠지.

나는 대충 납득하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와…….”

라텍스인가?

왜 이렇게 푹신해?

나는 포근한 침대에서 등을 떼지 못하고 눈만 굴려 방 안을 둘러봤다.

엘런의 수하들이 옮겨 주었는지 방 한쪽에 짐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노트북 꺼내서 커뮤나 해야겠다.

성녀 영애도 도착했다고 했는데 아예 PC로 편하게 대화 좀 해야겠어.

짐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낸 나는 침대로 돌아오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니! 전하가 왜 여기 계세요?!”

벽 앞에 놓인 소파에 황태자 누워 있었다.

심지어 그는 태평하게도 얼굴에 신문을 올린 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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