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26화 (27/208)

26화.

나는 멍하니 메시지를 보다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답장을 썼다.

[성녀님! 안녕하세요!]

[제가 두서없이 말해도 이해해주세요. 지금 탑에 갇혀서 제 정신이 아니라서요. ㅠㅠ]

[사실 제가 ‘웅크린 집순이’ 봄국 남작 영애거든요. 저 아시죠? ‘마왕의 기상’에 접근 가능한 영애 중 한 명인데]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다시 답장이 수신됐다.

[아이시스: 웅크린 집순이가 영애였어요?ㅋㅋㅋㅋㅋ 대박ㅋㅋㅋㅋㅋ 너무 반가워요. 나 디아나랑 맨날 집순이 영애 언제 만나냐고 기다렸는데ㅋㅋㅋㅋㅋㅋ]

디아나 영애?

[디아나 영애는 누구예요?]

[아이시스: 여름국 황제, 대륙 제2의 검 영애예요. 디아나랑 셋이 단톡방 파야겠다. 아, 아니다 영애 불편하려나? 얼굴 먼저 보고 나서 셋이 팔까요?]

성녀 영애는 나를 만난 게 반가운 건지 아니면 원체 성격이 밝은 건지 벌써 셋이 만날 생각을 했다.

[저도 빨리 뵙고 싶은데 제가 지금 탑에 있어서요ㅜ ㅜ]

[가을국 황태자가 마왕 동면지 탐색대에 절 데려가려고 황제한테 부탁했거든요. 근데 그게 좀 꼬여서 탑에 갇히게 됐어요.]

몇 초 뒤 답장이 왔다.

[아이시스: 영애, 저 이해가 잘 안 가서요. 가을국 황태자가 탐색대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죠? 근데 왜 영애가 탑에 갇혀요?]

나는 차분해지려 노력하며 그녀에게 내 상황을 전했다.

[아이시스: 황태자 그 새끼 미친 거 아니에요? 왜 영애한테 가서 난리래? 처음 봤을 때부터 쌔 하더니만 ㅡㅡ]

[아이시스: 영애 고생이 많아요.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예언 하나 때려서 바로 탑 나오게 해줄 테니까.]

나는 성녀 영애의 메시지를 보다 물었다.

[근데 저 탐색대에 가도 괜찮을까요?]

[아이시스: 당연하죠. 문제 될 게 뭐 있어요?]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레 자판을 두드려 회신했다.

[저는 황제 영애님처럼 전투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성녀 영애님처럼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 한 몸 건사하기 벅찬 캐릭터인데...... 제가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 절벽 엔딩 무서운데......]

……내 20억.

[아이시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시스: 내가 밖이라 ㅋ을 이것밖에 못 치는 게 한이네. 우리 PC로 만나야 했는데.]

[아이시스: 그런 건 걱정 말아요, 영애. 제가 알기로 탐색대 따라오는 남주들 다 먼치킨들이라 위험할 일 없어요.]

[아이시스: 게다가 디아나가 이번에 삼거미, 사거미 데려온다 했거든요. 정 불안하면 영애 호위로 붙여달라고 해요.]

삼거미 사거미?

거미 마물 이름인가?

[삼거미 사거미가 뭐예요?]

[아이시스: 황제 영애 호위인데 쌍둥이예요. ‘대륙 제3의 검’, ‘대륙 제4의 검’ 수식 달아서 우리끼리 삼거미, 사거미라고 불러요. 되게 귀엽게 생겼어요(소곤소곤)]

귀엽게 생긴 검술 고수 남주?

기분 탓인지 갑자기 탐색대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시스: 저 원래 장발 남주 안 좋아했는데 울 쌍거미들 보고 취향 갱생 당했잖아요 ㅋㅋㅋㅋㅋㅋ]

[아하, 두 분 장발이시구나!]

[아이시스: 네네! 무림 고수라 맨날 날아다니는데 그때마다 찰랑찰랑 머리 휘날리는 게 아주 장관이에요. 현생이었으면 샴푸 CF 휩쓸었을 상임!]

[무림 고수요?]

[아이시스: ㅇㅇ. 여름국은 동양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이라 #무협물남주도 있거든요]

여름국이 동양풍 컨셉이라는 얘기는 커뮤에서 봐서 알고 있었지만, #무협물남주들이 황제 영애의 호위를 담당한다는 정보는 처음 들었다.

마지못해 가려던 탐색대 참석 의지가 갑자기 부스터를 달았는지 드릉드릉 대며 급발진을 준비했다.

이 주접스러운 마음은 본능과 직결된 것인지, 탑에 갇힌 암울한 상황에서도 심장이 떨렸다.

나는 최근 감명 깊게 읽었던 무협물 빙의 소설 묘사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메시지를 썼다.

[그럼 여름국에서는 동양 미남들이 상투관도 쓰고, 활도 쏘고, 그러겠네요?]

[아이시스: 네! 동로판이긴 한데, 의식주 문화는 한국풍이라 한복, 한식, 한옥을 차용해요.]

동로판의 그 아련한 배경에 한국풍 비주얼이라니.

우아하고 아름다운 세계관을 상상하자 벌써 국뽕이 차올랐다.

아이시스도 여름국을 떠올리는지 긴 메시지가 수신됐다.

[아이시스: 남주들 장포 자락 휘날리는 거 제작진이 영혼 갈아서 연출했는지, 예술 그 자체예요. 내가 볼 때 아시아 시장 진출 노리고 공들인 것 같은데 이거 소장판 출시되면 진심 대박 날듯.]

[아이시스: 아직은 베타 버전이라 서양 로판이랑 섞여서 이름이나 기사도 같은 건 서양식인데, 여름국 비주얼이 개연성 씹어먹는다니까요?]

[아이시스: 이건 말로 백날 해봤자 안 와닿을 거예요. 영애가 삼거미, 사거미 직접 보고 느껴봐요.]

그럼요, 저도 요즘 정보를 너무 날로 먹고 있다는 자각을 하긴 했어요.

제가 직접 체험해 정보를 습득하겠습니다.

[아이시스: 그럼 영애, 나 지금 예언 내릴 테니까, 탑 조심해서 나오고 곧 탐색대에서 봐요^0^]

[네! 초면에 이런 말 조심스럽지만... 사랑해요 영애♥]

[아이시스: 영애도 #금사빠 재질이구나 ㅋㅋㅋ 우리 잘 맞을 듯♥ 그럼 곧 봐요. 진짜 안녕!]

***

비에른은 이동 스크롤이 가득 담긴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돌아와.”

그는 첫 수학여행을 가는 자녀를 둔 학부모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예언이 떨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런데 성녀 영애가 예언을 좀 극단적으로 내렸다.

그녀가 내린 예언의 내용은 이러했다.

『봄의 데이지를 겨울 산에 심지 않으면, 꽃은 시들고 봄국에 영원한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해석하자면 봄의 데이지는 나고, 꽃이 시든다는 건 내가 죽는다는 뜻이고, 봄국에 영원한 겨울이 온다는 건 봄국도 겨울국처럼 멸망할 거란 얘기였다.

비에른과 황제는 바로 나를 겨울국 탐색대로 보내기로 합의했다.

내가 탐색대에 참석하지 않으면 나도 죽고 봄국도 멸망한다 하니 두 사람은 쉽게 의견을 일치시켰다.

저 예언이 거짓임을 아는 나는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지만, 그래도 주변인들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계속 슬픈 표정을 짓고 다녔다.

“감사합니다.”

나는 두툼한 현금 박스 아니, 스크롤 박스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조심해서 다녀오고.”

“네, 오라버니도 건강 잘 챙기시고 조심하세요.”

비에른은 마차까지 따라와 배웅해 줬다.

나는 대답 대신 손을 한 번 흔들고 바로 출발했다.

사실 출발이 늦어진 바람에 시간이 빠듯했다. 엘런과 함께 떠나기로 한지라 먼저 그의 저택에 들러야 했기 때문이다.

봄국에서 겨울국까지는 최소 7일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아침에 성녀 영애에게 벌써 겨울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은지라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 황도에 있는 카이엘드 저택은 이에테르 공작저와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바닥에 주황색 종이가 도로처럼 길게 깔려 있었다.

그 종이 카펫 옆에서 엘런의 수하들이 마차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엘런이 수하들을 뒤로하고 내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이게 뭔가요?”

그는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고는 아, 소리를 내며 답했다.

“이동 스크롤.”

“이동 스크롤은 이렇게 생긴 거 아니에요?”

나는 상자를 열어 내 이동 스크롤을 꺼내 보여 줬다.

그러자 엘런은 뭐가 웃긴지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았다.

“뭐, 그런 것도 있긴 하지.”

나는 손으로 카펫처럼 깔린 거대한 종이를 가리켰다.

“이런 것도 있고요?”

거대한 종이는 내 작은 이동 스크롤을 수천 장은 붙인 크기였다.

엘런은 대답하는 대신 짧게 미소를 한 번 짓고는 시선을 틀어 제 수하들을 불렀다.

뭐야, 대답 피하는 거 보니까 허세인가 보네. 하긴 엘런도 귀족이니까 과시욕이 있겠지.

‘에이, 그래도 이건 좀 과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 우스꽝스러운 종이 카펫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엘런의 수하들이 내 마차에서 짐을 꺼내 그들의 마차로 옮기고 있었다.

“엇, 왜 제 짐에 손을 대세요?”

그 안에는 돈 주고도 못 살 고가의 현대 기기가 담겨 있다고!

“저 마차는 다시 이에테르가로 보내고 그대는 내 마차를 타.”

“제 마차가 있는데 왜 굳이 그래야 하나요?”

“내 마차가 데이지 양의 마차보다 더 빠르거든.”

“공작님 마차랑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요.”

엘런은 진짜로 계산을 하는지 팔짱을 끼고 잠시 미간을 좁혔다.

“일주일 정도?”

“예?”

“짐은 다 옮긴 것 같은데 그럼 이제 출발하지.”

당황하는 찰나 카이엘드가의 마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잠시 한눈을 판 새 그의 수하들이 내 짐을 모두 엘런의 마차 안에 넣어 두었다.

그런데 엘런의 마차는 바퀴가 조금 특이했다.

휠에 뾰족한 징이 박힌 게 꼭 중2병 친구가 정성스레 붙인 장식 같기도 하고, 겨울 산을 등반할 때 타이어에 감는 체인 같기도 했다.

아, 겨울국으로 가니까 마차에도 체인이 필요하겠구나.

납득한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엘런이 내민 손을 잡았다.

의자에 앉기 무섭게 바깥에서 우렁찬 구호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엘드 사람들은 왜 이렇게 파이팅이 넘치는 걸까. 그때 조정 경기 때도 그렇고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른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나 같으면 눈을 감고 있을 거야.”

“왜요?”

창틀에 팔을 올린 엘런이 놀리듯 어깨를 으쓱했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틀던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공작님! 마차가 저택으로 돌진하는데요?!”

저택 밖으로 나가는 줄 알았던 마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성으로 돌진하기 시작한 거다.

경악한 나와 달리 엘런은 평온한 표정으로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대로 가는 게 맞아.”

“아닌 거 같은데요?!”

뭐지? 또 시스템이 캐릭터 붕괴를 일으킨 건가?!

나는 도망칠 생각으로 다급하게 이동 스크롤을 한 장 꺼냈다.

그런데 엘런이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잡아 그 행동을 저지했다. 고개를 드니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엘런이 보였다.

“괜찮아. 스크롤을 타려는 거니까.”

그가 말하기 무섭게 5대의 마차가 1열로 종이 카펫 위를 질주했다.

날카로운 바퀴에 스크롤이 찢기며 마차가 한 대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탄 마차의 바퀴가 깨끗한 스크롤 위에 닿는 순간 엘런이 내 눈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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