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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25화 (26/208)

25화.

다중 접속 게임은 유저들이 각자 맵을 공략하며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지만, 냉정히 따지면 결국 게임사가 정한 메인 시나리오 안에서 움직일 뿐이다.

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해도 게임사가 정한 큰 줄기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공주님을 구하는 전사가 갑자기 던전 공략을 때려치우고 시골로 내려가 농지 경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캐릭터는 메인 시나리오 내에서만 선택의 자유를 허락받을 수 있다.

캐릭터.

유저인 내가 남주들을 그렇게 보아 왔듯, 시스템에게는 유저 또한 메인 시나리오를 만들어 가는 캐릭터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뭉쳐 있던 혼란이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차분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마왕의 기상’에 접근 가능한 유저는 셋.

황제 영애와 성녀 영애 그리고 나.

뽑기 운이 나빴던 우리가 S급 여주로 선정된 게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대륙 제2의 검’과 ‘시대의 예언자’와 함께 놓인 ‘웅크린 집순이’ 수식어였다.

‘마왕의 기상’을 중심으로 상황을 그려 보니 메인 시나리오가 대충 예상이 간 탓이다.

겨울국의 멸망 > 마왕의 동면 > 마왕의 기상 > 마왕 토벌 전쟁.

마왕의 기상을 알리는 예언자 성녀, 마왕을 때려잡는 검사 황제, 그들을 안내하는 은둔의 지식인.

전형적인 판타지 모험물 파티 구성 아니냐고.

마왕을 만나는 것이 내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스템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는 미간을 긁으며 신음을 삼켰다.

X 같은 게임 진짜.

현생 나가면 인권 위원회에 신고할 거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던 나는 진정하기 위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이건 그냥 내 생각이잖아?

아닐 수도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황제가 생각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라 사계국의 평화를 위해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걸 수도 있잖아.

나 같은 범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개연성이 있을지도 몰라.

그래. 100개의 시나리오를 만든 제작진인데, 스토리텔링 장인이겠지.

분명 납득 가는 개연성이 있을 거야.

황제가 저럴 수밖에 없는 사건이 터졌나 봐.

가령 가을국에서 마왕을 토벌하지 못하면 라리사 영애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예언이 내려왔다든지.

그 순간 머릿속으로 섬광이 번뜩였다.

성녀 영애한테 물어볼까?

성녀 영애는 나보다 먼저 ‘마왕의 기상’ 정보를 시스템에게 받았잖아. 이 게임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공작님, 가을국 성녀님 이름 아세요?”

“알지.”

“그분 성함 좀 알려 주세요!”

엘런은 갑작스러운 질문이 미심쩍은지 한쪽 눈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그녀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아이시스 프로페타.”

“감사합니다!”

바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습니다. 알현실로 이동하십시오.”

***

알현실에 도착한 나는 초조한 눈으로 계속 손목의 워치를 힐긋거렸다.

그러나 화면은 까맣게 숨죽일 뿐, 메시지 알람은 뜨지 않았다.

성녀 영애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때, 시종이 내게 접근을 허락했다.

나는 단상 앞으로 가 치맛자락을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한 번 해 봤다고 이젠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는 게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허락을 기다리는데 몇 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나를 불렀다.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황제의 음성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이에테르 공작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가?”

그는 손가락에 제 턱을 올린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내게 고정된 녹안에 이는 이채는 선명했다.

폭군의 외관은 그대로인데, 묘하게 눈빛이 총명한 걸 보니 분명한 캐붕이었다.

“이에테르 공작은 지금 황성의 탑에 갇혀 있지.”

그는 비소 가득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반란을 꾀한 자가 아니면 가기 쉽지 않은 곳인데, 그 어려운 걸 그대의 오라버니가 해냈어. 오랜만에 들어온 손님이라 탑의 고문기술자들이 기뻐 어쩔 줄 모르더군.”

무섭다 무서워.

누가 #폭군 아니랄까 봐 저놈 말하는 것 좀 봐.

죄 없는 사람을 탑에 가둬 놓고 하는 말이 뻔뻔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나는 모든 불만을 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이에테르 공작은 현재 상황에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오나, 폐하. 황실에 충성하는 이에테르가의 충심을 헤아려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청하옵니다.”

폭군과 간신은 소금과 후추 같은 영혼의 짝.

나는 사극에서 봤던 대사를 떠올리며 비에른을 풀어 달라 간청했다.

폭군은 바닥에 착 달라붙어 기는 내 태도에 당황했는지 움찔했다. 그 바람에 그의 손가락에 걸쳐 있던 턱이 떨어졌다.

……통한 거 같은데?

하긴 폭군을 달래는 데 동서양이 어디 있어. 듣기 좋으면 그만이지.

해외 노트북 제공하면서 국산 노트북 광고 보여 주는 이 세계에서 이 정도 문화적 융합이야 뭐.

[…….]

지지직거리며 AI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지만, 무시했다.

황제는 헛기침을 하며 금세 제 위엄을 되찾았다.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탑에 갇힐 만큼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죄,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차라리 제가 대신 탑에 들어가겠습니다!”

탄력받은 나는 연기에 힘을 실었다.

황제가 원하는 건 내가 탐색대에 들어가는 거잖아.

나는 황제를 달래다 탐색대에 입대하겠다 말하고, 비에른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내 약점을 더 이상 꼬투리 잡지 않는다는 약속도 받고.

그런데 황제가 갑자기 확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내가 기분이 상해서 죄 없는 이에테르 공작을 탑에 가뒀다는 말인가?”

응. 그거 사실이잖아요?

갑자기 화를 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답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인자하고 총명하신 폐하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면 분명 이에테르 공작에게 죄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황제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 그는 먹이를 집어삼키기 전 묵직하게 성대를 울리는 짐승처럼 위협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공작이 그대를 감싸는 걸 봤을 때부터 우애가 남다르다 싶긴 했지. 그러나 감히 내 앞에서 혀를 놀리며 날 비꼴 만큼 우애가 깊은 줄은 몰랐군.”

당황한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얼른 부정했다.

“비, 비꼬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인자, 총명. 감히 나를 희롱해?”

황제는 인자하고 총명하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처럼 내 수식에 크게 분노했다.

……아부가 너무 과했나 봐.

동양의 간신 화법을 비꼼으로 인지한 황제가 날 씹어 먹을 듯 노기 띤 얼굴로 노려봤다.

살벌한 표정에 겁이 났다.

나 이대로 절벽 엔딩 찍는 건가.

그러나 곧 모든 노색을 지워 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 대신 탑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나?”

팔걸이를 손끝으로 건드리던 그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소원대로 해 주지.”

***

[시에나: 황실 교육 담당했던 예법 선생이 있는데, 그 사람 소개해줄게요. 예법은 그 사람한테 배우면 될 거예요.]

[시에나: 봄국 황제가 도라이 기질이 있어서 비위 맞추기 쉽지 않은데, 그 황제한테 예법을 가르치고 살아남은 사람이니까 믿을 만해요.]

툭툭툭.

[고마워요 시에나 영애. 영애 없었으면 전 어떻게 살았을까요? ㅠㅠ]

의기소침하게 메시지를 보내자 바로 답장이 왔다.

[시에나: 원래 처음엔 다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이런 일 생길 줄 알았으면 예법 선생부터 소개해줄걸.... 라리사 영애는 폐하 성질 알면서, 못 오게 말려주지.]

[시에나: 그나저나 탑은 어때요? 탑 공략한 영애는 아마 데이지 영애가 처음일 거예요.]

이걸 공략이라 해야 하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둑한 탑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우물처럼 뻥 뚫린 동그란 천장으로 달빛이 들어오고, 검은 벽돌이 겹겹이 쌓인 벽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바퀴벌레와 지네가 돌아다녔다.

으, 소름 돋아!

나는 벽에 붙지도 못하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벌레들을 주시했다.

흑흑, 이동 스크롤 챙겨올걸.

결국 나는 탑으로 끌려왔다.

탑에 갇힌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봄국에 내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오라버니를 가뒀다는 사실에 분노해 간 크게도 폭군을 극딜하다 탑에 갇힌 레이디.

황제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이 많았는지, 대부분의 귀족들이 오늘 일에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대리 만족이고 뭐고 나가고 싶다.”

황제에게 탐색대에 들어가는 카드를 내밀며 협상을 해 볼 생각이었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내게는 얌전히 탐색대에 들어가는 것과 괴롭힘당하다 탐색대에 들어가는 두 가지 카드가 있었을 뿐이었다.

계급 사회는 너무 잔인하다.

나도 #황제여주였으면 좋았을걸.

나는 속상한 마음을 누르며 다시 워치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성녀 영애님, 저는 이번에 봄국에서 타임라인 시작한 영애예요.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을 드렸는데....]

성녀 영애에게 보낸 메시지 옆에 1 표시가 있다. 그녀가 아직 내 메시지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어볼 게 산더미였는데.

하긴 인제 와서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탐색대에 들어가야 하는데.

“하아.”

이제 나는 황제가 기분을 풀고 탐색대에 참석하는 걸 허락해 주길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 대신 비에른이 풀려났다는 거다.

탑은 독방이라 한 명만 갇힐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 이번엔 비에른이 반항 않고 황제의 명을 잘 따랐으면 좋겠다.

시에나 영애에게 비에른을 잘 설득해 달라 부탁하긴 했지만, 애초에 날 보내지 않겠다고 거부하다 갇힌지라 걱정이 됐다.

아까 알현할 때 그냥 냅다 탐색대에 가겠다고 말할걸. 괜히 간신배 컨셉 잡다가 망했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워치에서 팟 켜진 불빛이 버블처럼 나를 제 안으로 포근히 감쌌다.

[아이시스: 봄국에 뉴비 영애 들어왔구나. 환영해요 ㅎㅎ! 근데 무슨 일로 연락 주셨나요?]

시대의 예언자, 성녀 영애의 메시지가 수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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