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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24화 (25/208)

24화.

수면의 윤슬을 보던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틀어 그를 쳐다봤다.

엘런이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강바람에 엘런의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오후의 금빛 햇살과 만개한 들꽃을 배경으로 그가 천천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검은 성벽과 피로 얼룩진 전장이 어울리는 남주라고 생각했는데.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배경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이상한 광경에 잠시 그를 바라봤다.

역시나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엘런이 웃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계속 기대해도 좋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너 진짜 그 키워드 좀 자제해 봐.

일그러진 내 표정이 웃겼는지 엘런이 조금 더 커진 웃음을 흘리며 노를 당겼다.

나는 잠시 일었던 말랑한 분위기를 털어 내며 강으로 고개를 획 틀었다.

“내가 손수건을 건넨 레이디는 그대가 처음이야.”

이번엔 못 들은 척 시선도 주지 않았는데 엘런이 조용히 혼잣말을 덧붙였다.

“북부에서 손수건이 어떤 의미인지 그대도 기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기회는 무슨. 커뮤에 검색만 하면 바로 나올걸?

그러나 딱히 궁금하지 않아 검색해 보고 싶지 않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우리는 금세 강변에 도착했다.

먼저 뭍으로 내린 엘런이 배를 묶고는 내게 손을 건넸다.

“잡아.”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엘런이 건넨 손을 피해 배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그런데 이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인지 엘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고 싶지 않아 시선을 피하지 않자, 엘런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에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의미를 설명해 주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벌써 해가 지는군. 데려다줄 테니 같이 가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비에른도 없이 어떻게 가려고?”

그러고 보니 비에른이 종일 안 보였다.

나는 다시 강변을 눈으로 훑었다.

붉은 단상이 눈에 들어왔다. 황족을 위한 특별 좌석.

맞아, 라리사 영애도 온다고 했었는데?

그러나 그곳도 텅 비어 있다.

싸한 기분에 미간이 좁아든다. 타임워프를 했다면 분명 라리사 영애도 여기 있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타임워프를 한 바람에 일주일의 공백이 생겨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라리사 영애에게 메시지를 보낼 생각으로 팔목에 찬 워치를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화면에 245건의 메시지가 수신되었다는 알람이 있었다.

봄국 영애 단톡방에 108건, 라리사 영애의 개인 톡에 137건이었다.

137건?

[라리사: 영애 큰일 났어요! 오늘 아빠가 영애 오라버니 소환한다고 조정 경기 참관 취소했어요!]

[라리사: 나도 방금 타임워프 해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알아내는 대로 메시지 보낼게요!]

비에른이 황궁에 불려갔다고?

[라리사: 헉! 비에른 표적 수사 당하는 듯 ㅇㅁㅇ!]

표적 수사?

탈세하다 걸린 건가?

익숙한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데, 라리사의 대화 흐름은 그보다 더 심각한 방향으로 흘렀다.

[라리사: 영애 탐색대 보내려고 저러나 봐요. 방금 영애를 탐색대에 참석시키면 다 없던 일로 해준다고 했어요.]

[라리사: 어흑, 역시 남주다.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법을 알아 ㅠㅠㅠㅠㅠ 물개박수 칠 뻔한 거 겨우 참았네ㅜㅜ]

[라리사: 비에른이 제안 거절했어요. 영애 그 위험한 곳에 못 보낸다고.]

[라리사: 헐, 우리 아빠 진짜 개빡쳤다 ㄷㄷㄷ 비에른 탑에 가둬 두라고 소리 지름 ㄷㄷㄷ]

[라리사: 금서를 보유한 죄라는데, 영애도 같이 엮으려고 하는 말 같죠?]

[라리사: 헉! 방금 제드 경한테 이에테르가에서 마족 금서 발견한 거로 처리하라고 속닥거리심!]

[라리사: 안 되겠다. 영애, 내가 움직여야겠어. 나만 믿어요!]

메시지를 읽던 나는 입을 벌렸다.

탐색대 그거 다 끝난 일 아니었어?

왜 이래요, 폐하?

폭군이라며! 나라의 미래에 관심 없다며!

그날 라리사 영애 덕분에 탐색대 입대에서 벗어난 줄 알았더니, 황제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건지 비에른을 협박했다.

“왜 그래? 손목이 아픈 건가?”

내가 계속 손목을 쓸며 쳐다보고 있으니 아픈 걸로 보였는지 엘런이 물어왔다.

“네, 조금 욱신거리네요.”

나는 계속 워치에 시선을 둔 채 대충 둘러댔다.

메시지 내용이 심각해져 엘런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리사: 영애.... 이거 보통 일 아니다. 나 지금 배고프다고 울었는데, 아빠가 나 시녀 언니한테 맡기고 탑으로 감....]

[라리사: (라리사 혼절)]

[라리사: 라리사 멘탈 지켜줘요.]

[라리사: (((라리사 멘탈)))]

[라리사: 마왕 토벌은 50년 내내 토벌단을 보내니 마니 난리 쳐 온 주제인데 갑자기 왜 저렇게 급하게 굴지?]

[라리사: 영애 뭐 아는 거 있어요? 혹시, 겨울국에 무슨 일 생긴 거예요?]

라리사는 ‘마왕의 기상’ 정보에 접근권이 없어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아, 이 폭군 자식! 비에른은 왜 괴롭혀!

비에른은 또 왜 이래. 대충 동의한다고 말하지, 왜 폭군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 나 이제 이동 스크롤 있어서 도망칠 수 있는데.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잠깐만…….

영애들은 죽으면 로그아웃이라지만, 남주들은 죽으면 정말 죽는 거 아니야?

나 때문에 비에른이 폭군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마차가 대기하는 언덕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수많은 귀족이 존재하는 세계관 탓인지, 마차들이 가득해 이에테르가의 마차를 찾을 수가 없었다.

화려한 마차들 틈에서 이에테르가 인장을 찾는데 급한 마음에 자꾸만 발걸음이 꼬였다.

“데이지.”

어느새 따라붙은 건지 엘런이 내 손목을 잡아 돌렸다.

“무슨 일이지?”

내 얼굴이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엘런이 심각하게 인상을 구기며 내게 시선을 맞춰 왔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많이 아픈 건가?”

엘런은 내가 아파서 이런다고 믿는 듯했다.

나는 망설이다 시선을 틀어 다시 마차가 빼곡히 선 언덕을 둘러봤다. 한시가 급한 지금 수십 개의 마차를 다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엘런에게 물었다.

“공작님, 죄송한데 저 황궁까지 태워 주실 수 있으세요?”

***

[라리사: 영애 이게 말이 돼요?]

[라리사: 황제가 어떻게 내 말을 안 들을 수가 있지?]

[라리사: 조련으로는 내가 대한민국에서도 탑을 달려왔던 사람인데...(*현생 정보 언급으로 블라인드 처리됩니다).]

멘탈이 붕괴된 라리사는 끊임없이 내게 슬픔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라리사의 말에 동의했다.

‘뭔가 이상해.’

갑작스러운 황제의 행동은 캐릭터 붕괴 그 자체였다.

왜 갑자기 황제가 나를 탐색대에 넣겠다고 저러는 걸까.

생각을 곱씹는데 나를 따라 황제궁 응접실에 들어온 엘런이 소파에 앉았다.

“공작님은 가셔도 돼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는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내가 먼저 가나.”

“못 가실 건 뭐예요.”

“폐하의 성정을 뻔히 아는데 데이지 양을 혼자 둘 수는 없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봄국 황제의 인성을 지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엘런의 말이 맞긴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황제가 선을 넘으면, 라리사 영애에게 이동 스크롤을 받아 비에른과 도망치기로 이미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이다.

물론 최선은 황제와 오해를 풀고 비에른을 무사히 집으로 데려가는 거지만.

나는 답답한 마음에 허공을 응시하다 담당자님을 찾았다.

‘담당자님, 혹시 황제 설득 튜토리얼 같은 건 없나요?’

[없습니다.]

단호한 AI.

진짜 필요할 때는 도움이 안 돼.

나는 도움받는 걸 포기하고 클레임을 시도했다.

‘담당자님 이거 캐붕 아니에요? 봄국 황제 저번에는 나라고 뭐고 딸 식사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던 팔불출이었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비에른을 표적 수사하면서 탐색대 참석을 강요하냐고요.’

[사람이란 원래 흑화하기도 하고 백화하기도 하는 갈대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도 납득이 가야 흑화고 백화죠. 이건 담당자님이 봐도 이상하잖아요!’

나는 보이지도 않는 AI에게 눈을 부라리며 강하게 따졌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듯 지직거리던 AI가 천천히 제 음성을 내 머릿속으로 밀어 넣었다.

[캐릭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땐.]

AI 담당자가 조언을 건네기에 나는 집중하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심도 깊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해 보세요.]

담당자님, 잠깐 나와 봐요.

아니, 그냥 우리끼리 심도 깊은 대화 한번 나누고 싶어서 그래요. 나와 보라니까?

“하아.”

깊은 빡침이 밀려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볼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엘런이 미간을 좁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까 말했듯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으니까.”

그가 든든한 제안을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기분 나쁜 의심 때문에.

마왕의 기상은 ‘S급 사건’이었다.

시스템이 평가한 가장 높은 등급의 사건이라는 뜻.

S급 남주.

그것은 유저의 랭킹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시스템은 내게 ‘S급 사건’과 상점에 있지도 않은 ‘S급 남주 관람권’을 주었다.

나는 타임라인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두 번이나 S급 무언가와 엮인 거다.

S급 쳐돌이인 게임의 취향을 보니, 여주에게도 등급을 매겨 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S급 여주.

만약 시스템이 제 기준으로 ‘S급 여주’를 선정했다면, ‘S급 여주’는 상위 랭킹 보장 요소가 아닐 거다. 랭킹은 전개력과 남주의 시나리오로 결정된다고 했으니까.

그저 시스템의 내적 기준으로 평가된 것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은 세계관을 관리하는 존재.

그렇다면 기준은 세계관 내 영향력이 아닐까?

이를테면 주연과 조연.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과 등장 분량의 차이.

게임 시놉시스에 등장하는 메인 캐릭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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