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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23화 (24/208)

23화.

나는 입을 벌렸다.

지금 이 남주, 나한테 첫눈에 반해서 이렇게 달려왔다는 소리잖아.

미친놈1 엘런과 미친놈2 알렉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다 샘물처럼 순수한 남주를 보니 오염된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눈치 없는 엘런이 내 감동 속으로 끼어들었다.

“무례인 걸 알면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피에르 남작이 그대에 대한 걱정이 많겠군.”

갑자기 아버지를 끌고 와 모욕을 주는 엘런의 인성에 깜짝 놀랐다.

대놓고 패드립이라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엘런의 말에 반박했다.

“무례라뇨. 절대 아니에요! 제가 뱃놀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오히려 이렇게 물어봐 주시니 영광인걸요.”

잠시 시무룩해졌던 선수가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저, 정말요? 제게 레이디를 모실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쪽에 있는 초록색 배가 제 배입니다. 저쪽으로 같이 가시죠. 레이디.”

“네, 좋아요. 가요!”

“내가 하지.”

승낙하기 무섭게 엘런이 내 대답을 제 낮은 목소리로 덮어 버렸다.

“……뭘 하시게요?”

떨떠름하게 묻자 엘런이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뱃놀이가 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태워 주겠다고.”

“조정 선수가 태워 주는 게 전통이라면서요.”

찜찜한 눈으로 쳐다보니 엘런은 잠시 나를 보다 선수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저 배가 그대의 배인가?”

“예…… 그렇긴 한데…….”

“고맙네.”

엘런은 직급으로 누르며 성과를 빼앗는 못된 상사처럼 대뜸 고맙다고 말하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가지.”

“……어딜요?”

“배 타고 싶다며.”

그건 네가 저 선수를 무안 줬으니까 그냥 한 말이고!

나는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심란한 표정으로 엘런을 쳐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엘런이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 레이디 입장에서는 나와 계속 시선을 마주하는 게 부담스럽긴 하겠지. 원하면 등을 대고 타도 괜찮아.”

본인이 말해 놓고 갑자기 엘런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턱을 매만졌다.

“아니, 등이 맞닿으면 더 떨릴 수도 있겠군.”

“…….”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레이디 편한 쪽으로 해.”

“안 타는 게 제일 편할 것 같아요.”

투명하게 드러낸 진심에 엘런이 잠시 눈을 크게 뜨다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야, 부담스럽다고 포기할 건 없잖아.”

“그냥 타기 싫어서요.”

아이를 가르치듯 또박또박 말하자 옆에서 숨을 들이켜는 격한 소리가 들려왔다.

“호, 혹시…… 데이지 레이디, 물을 무서워하시는 겁니까?”

선수가 제 입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 차라리 물을 무서워한다고 할까?

그가 전해 준 핑계가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남자가 혼절할 것 같은 얼굴로 밭은 숨을 내뱉었다.

“그럼…… 저 때문에…… 배를 타 주시려고…… 하신 겁니까?”

“예?”

“데, 데이지, 레이디도…… 저를…….”

소심한 남자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도 흥분한 눈빛을 빛내 왔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대체 왜 이런 애들만 나한테 붙는 거야?

나한테 #착각계 키워드가 있어서 그런가?

내가 고개를 세차게 젓자, 엘런이 피식 웃었다.

“아쉽게도 그건 착각인 것 같군. 데이지 양은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이 있거든.”

“…….”

뱃놀이를 싫어한다고 하면 토끼 같은 남주가 착각에 빠지고, 뱃놀이를 좋아한다고 하면 흑표범 같은 남주가 망상을 이어 간다.

나는 미간을 긁으며 고뇌했다.

X 같은 키워드 진짜…….

모든 짜증을 뒤로 미루고 효율적으로 생각해 봤다.

효율을 앞세우니 착각계로 엮일 놈을 더 늘릴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이미 시작된 놈을 일단 안고 가다 버리자.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 엘런을 쳐다봤다.

“가요, 공작님. 뱃놀이해요.”

***

멀리서 볼 때는 시테 다리가 가까워 보였는데, 막상 배를 타고 가니 꽤 거리가 멀었다.

찰랑, 찰랑.

엘런이 노를 저을 때마다 튀어 오른 물방울이 햇살에 반짝였다.

‘예쁘긴 하네.’

강변에 만개한 알록달록한 꽃들과 푸른 하늘이 시야를 아름답게 물들였다.

언덕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마저 한 폭의 명화 같다.

정말 플랫폼이 혼을 갈아 만든 게임이라는 게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인간적으로 디자인팀분들 연봉 N억은 드려야 해.

입꼬리가 절로 느슨해지는데 엘런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전하가 이걸 전해 달라고 하셨어.”

엘런이 제 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얼결에 편지를 받은 나는 그 종이를 보다 시선을 들었다.

“공작님은 제가 여기 올 걸 알고 계셨어요?”

“봄국에서 조정 경기를 안 보는 사람이 있나? 봄국의 3대 자랑이잖아.”

3대 자랑이 진짜로 통용되는 말이구나.

납득한 나는 다시 시선을 내려 편지를 살폈다.

아마도 가을국 황실의 문장으로 보이는 장미꽃 모양의 실링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실링을 떼어 내려 했다.

사아아아.

그러나 손을 대자 실링 주변으로 가시가 돋아났다.

“조심해. 마력으로 봉인되어 있으니까.”

“봉인이요? 이 편지 저한테 전해 주라고 하셨다면서요?”

“전하가 직접 그대 앞에서 열어 줄 생각이신 듯해.”

내 앞에서 열어 준다고?

“……절 또 만나실 생각이래요?”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는데, 그게 만족스러운지 엘런이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마왕 토벌에 사활을 거셨으니 그대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으시겠지.”

그는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묘하게 어두워진 얼굴이 걸려 나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근데 여름국도 황제 폐하가 직접 나서고, 가을국도 황태자 전하가 직접 움직이는데, 봄국은 왜 공작님이 황실을 대신하세요?”

“봄국 황제는 마왕 토벌에 관심이 없으니까.”

역시 라리사 영애 아버님한테는 폭군 키워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왜 폐하께서는 마왕 토벌에 관심이 없으실까요?”

“그분은 가정에 더 큰 가치를 두시니 황성을 떠날 생각도, 제 후계자를 보낼 생각도 없으신 거지.”

“그렇다 해도 왜 하필 공작님이 황실 대신 토벌에 나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다른 공작분들이 대신할 수도 있잖아요.”

여기 공작들 많잖아?

그냥 길가다 착장 화려한 남주 하나 잡으면 걔도 공작일걸?

“예언을 들은 사람이 봄국에는 폐하와 나, 둘뿐이니까.”

그는 나른하게 아,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대도 있고.”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수많은 공작 중에 왜 하필 엘런에게 정보 접근권을 준 걸까?

봄국에는 이제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남주가 더 없는 건가?

호기심이 인 나는 슬쩍 엘런을 떠봤다.

“예언은 전해 주면 되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어차피 누군가 맡게 된다면 내가 맡는 게 나아.”

그는 느릿하게 노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중부의 이에테르가나 트리비아나가에서 맡으면, 중부까지 마족들이 내려오지 않는 한 그들은 크게 나서지 않을 테고 남부 쪽 귀족들은 더 심하겠지.”

비스듬히 기운 입술 사이로 체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북부에서 막아야 할 텐데, 그럴 거면 내가 직접 참전해서 먼저 정보를 알아 두는 게 낫잖아.”

그는 굉장히 효율적인 것처럼 말했지만 조금 불편하게 들렸다.

그는 북부가 고기 방패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표정이 좋은 건 아니었다.

오늘따라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수심이 스치니 엘런이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뭐라고 말을 얹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노질을 따라 밀려오는 물소리가 침묵을 가볍게 적셨다.

찰랑, 찰랑.

어느새 배는 시테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가 만들어 낸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자 선선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팔랑이는 머리칼을 대충 정리하며 한쪽으로 늘어뜨렸다.

“이걸로 묶어.”

고개를 드니 눈앞에 검은 손수건이 있었다.

금사로 카이엘드가 인장을 수놓은 손수건이었다.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물건을 쉽게 건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 물끄러미 엘런의 손을 바라봤다.

여기 중세 맞아?

결혼 적령기 귀족 여성이 타 가문 남자의 물건을 가지고 다녀도 가십 안 퍼지는 거냐고.

내 안의 유교걸이 꿈틀대며 그의 호의에 거부감을 느꼈다.

“괜찮아요.”

“제발 받아. 내가 가서 묶어 주면 배가 뒤집힐지도 모르니.”

엘런은 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내 말을 저런 극단적인 요구로 해석하는 걸까.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요.”

“오해?”

“공작님과 둘이 배를 타고 있는 것도 소문이 이상하게 날까 봐 걱정되는데, 손수건까지 받으면 다들 오해할 거예요.”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꼭 연인처럼 보이잖아요.”

직설적으로 문제를 짚어 주자 엘런이 다시 물어왔다.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거지?”

나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헛숨을 흘렸다.

“어쨌든 저도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해야 하는데, 공작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나면 좀 그렇잖아요.”

내가 다른 남주 선택할 때, 네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잖아.

그 말을 중세 화법으로 살살 돌려 말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런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그게 왜 문제냐고.”

아, 여기 연애관이 현대식인가?

과거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야?

“……그럼 괜찮은 건가요?”

나는 이 세계의 가치관을 떠보려 모호하게 되물었다.

“과거에 누굴 만난 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그걸 문제 삼는 옹졸한 남자라면 그대가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인 거지.”

상식적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내가 너무 귀족 영애 역할에 몰입했나 봐.

나는 내 안의 유교 마인드를 덜어 내며 입매를 길게 늘였다.

“맞는 말씀이세요. 하긴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웃긴 거죠.”

엘런은 아직도 제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 손수건을 받아 머리끝에 묶었다.

엘런은 그제야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처음 배를 탄 나루터로 돌아가려는 듯 그가 뱃머리를 돌렸다.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리고 그대가 꼭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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