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나는 지난주에 아련하게 쌓아 댄 흑역사가 생각나 냅다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부채로 시야를 가리고 있으니 아리나가 슬쩍 고개를 뒤로 물려 나와 눈을 맞춰 왔다.
“근데 뉴비 영애, 카이엘드 공작이랑 썸 타던 거 아니었어요?”
“썸이라뇨.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니에요? 근데 왜 이쪽으로 오지. 영애랑 눈 마주치자마자 일어나던데?”
아리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강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으로 온다고?
나는 화들짝 놀라 부채를 치우고 강변을 쳐다봤다.
정말로 엘런이 꽃이 만개한 언덕을 가로지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니, 왜 와? 오지 마!
하얗게 질리는 내 얼굴을 보고 뭔가 오해했는지 아리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영애.”
“네?”
“혹시 저놈이 영애한테 집착해요?”
그건 아니라고 답하려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는데 5명의 영애들이 모두 날 보고 있었다.
영애들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막냇동생을 보는 언니들처럼 무서운 시선을 보내왔다.
“저 X이 영애 괴롭혀요?”
“스토킹 당하고 있어요?”
“카이엘드 공작 키워드가 #집착남인가요?”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제가 메이저 에피소드를 무리해서 쌓다가 흑역사를 만들어서 얼굴 보기 민망해서 그래요.”
“아아, 메이저 에피. 그럴 수 있죠.”
영애들 모두 캐시를 욕심내다 흑역사를 쌓아 본 경험이 있는지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그나저나 영애, 메이저 에피 조심해요. 그거 잘못하면 수습 못 할 오해가 쌓여서 나중에 골치 아파요.”
예…… 제가 지금 그렇습니다.
“데이지 영애, 이건 걱정돼서 알려 주는 건데. 나중에 남주 떼고 싶으면, 차단해 주는 기능 있거든요. AI 담당자님한테 ‘손절’ ON 해 달라고 하면 남주 동선 알려 줘서 피할 수 있어요.”
“맞아요. 그거 꼭 기억해요. 안전 이별 중요하니까.”
“저 ‘손절’ 기능도 전에 #SM #강압적관계 #감금물 패키지 가진 남주한테 걸려서 고생한 영애가 공유한 팁이에요. 그리고 여긴 웬만하면 #집착남이니까 조심해요.”
#SM?
기획사 말고 내가 아는 그 SM?
아니, 이럴 거면 대체 왜 전연령에 집착하는 거야?
분량에 포함도 안 시켜 주면서 왜 이렇게 맛있는 키워드를 잔뜩 넣어 둔 건데!
엘런이고 뭐고 오랜만에 마주한 취향 키워드에 급발진한 나는 부채를 움켜쥐었다.
물론, 난 어디까지나 보는 걸 좋아한다.
감금물을 소설로는 재밌게 읽지만, 현실에서 보면 바로 112에 신고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레이디 데이지.”
그때 어느새 테이블까지 다가온 엘런이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까까지 분명 언덕 중간에 있었는데,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그는 순식간에 카페에 도착했다.
나는 쭈뼛쭈뼛 고개를 들어 나를 파묻은 그림자 주인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으면 같이 걷지.”
주변 사람이 보이지 않는지 엘런은 오직 내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여기서 보니 반갑군요. 카이엘드 공작.”
시에나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존재를 알렸다. 그제야 엘런의 시선이 테이블로 움직였다.
“공작부인께서도 경기를 보러 오셨군요.”
그는 시에나에게 인사하며, 영애들에게도 가볍게 묵례를 했다.
“티타임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무례를 저지른 점, 넓은 아량으로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예의 바르게 부탁했다.
스포츠 경기를 보러 와서 그런지 엘런은 평소의 각 잡힌 정복 차림이 아니었다.
맨 윗단추를 하나 푼 하늘하늘한 셔츠 차림이었다. 머리도 올리지 않고 내려 둔 상태였고.
그래서인지 평소의 위압감 넘치는 모습이 아니라 소년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런 남자가 순두부처럼 보드라운 말투로 공손히 말하니 영애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뜯어말릴 기세였던 영애들이 누그러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눈을 보니 사람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네요. 사정을 들어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망설여졌다.
창피해서 엘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얘가 여기서 내 흑역사를 들출까 두려운 마음 반.
고민 끝에 영애들 앞에서 이미지를 지키기로 결정한 나는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인사했다.
“죄송해요. 다음에 또 뵐게요.”
“뭐가 죄송해요. 우리는 앞으로도 질리도록 볼 텐데.”
영애들은 흔쾌히 손을 흔들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색하게 테이블을 등지고 엘런과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그런데 그는 얘기를 하자고 청해 놓고 언덕을 내려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럴 거면 왜 불렀어?
침묵을 견디다 못한 내가 먼저 물으려 그를 쳐다보는데 총성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함성이 밀려왔다.
“와아아아!”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강변에서 빠르게 노를 젓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조정 경기가 시작된 거다.
빠르게 질주하는 배에 시선을 뺏겨 나도 말없이 풀길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시끄러운 함성 사이로 엘런이 제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자연스레 고개가 엘런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강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강바람에 팔랑이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엘런이 말을 이었다.
“전하가 말한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국법과 관련된 일이라면 한 번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으려는데, 거센 함성이 덮쳐 왔다.
“카이엘드 팀의 승리입니다!”
나는 다시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붉은 배를 몰았던 팀이 승리했는지,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다 엘런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국법과 관련된 일이요?”
엘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내게 사면권이 있거든.”
사면권? 공작 작위에 내려지는 특수 권한인가?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엘런이 강변에 주었던 시선을 내게 맞춰 왔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황실을 대신해 토벌단에 참가하는 대가로 받은 게 몇 가지 있어. 그중에 사면권도 있고.”
“아니, 그 귀한 걸 왜…….”
나한테 써?
너랑 나랑 무슨 사이라고?
사면권은 나중에 본인이 곤란해졌을 때 필요할 수도 있잖아.
이해가 가지 않아 바보처럼 입을 달싹였다.
혹시 슬롯에 들어가면 남주들은 목숨을 건 사랑을 할 준비라도 하는 건가?
혼란으로 흐려진 눈이 도무지 깨끗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엘런은 그런 내 눈을 보지 못한 채 잔디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잇새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데이지 양이 마왕 토벌 계획을 알게 되고, 황태자 전하의 눈에 띄게 된 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해.”
“네? 공작님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요?”
“내가 가을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그대가 따라올 일도 없었을 테니 마왕 토벌에 엮일 일도 없었겠지.”
“…….”
이 친구는 아직도 내가 본인 때문에 가을국에 갔다고 믿고 있었다.
너 착각계 깨지면 이 수치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잔인한 시스템의 농간에 슬슬 엘런에게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다시 고개를 든 엘런의 붉은 눈동자에 동정심 가득한 내 얼굴이 비쳤다.
엘런은 또 뭔 생각을 한 건지 씁쓸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할 것 없어. 정말 내 잘못이 맞으니까. 레이디의 마음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가을국에 오지 못하게 내가 막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잖아.”
입만 안 열면 참 괜찮은 사람인데.
하지만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아서 도무지 설레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훌쩍 가까워진 강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됐어요. 제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더 빠르게 해결해 줄 수 있으니 하는 말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엘런에게 물었다.
“그러다 제가 진짜로 사면권 양도해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줄 생각도 없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가벼운 놈은 아니지, 내가.”
어이없다는 듯 비소를 흘리던 엘런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내 어깨너머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런데 뒤에서 덜덜 떨리는 남자 음성이 들려왔다.
“북부의 지배자, 봄의 수호신 카이엘드가의 주인을 뵙습니다!”
낯간지러운 인사에 고개를 돌리니 조정 선수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엘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 잘 봤네. 피에르 남작이 자랑스러워하겠어.”
“가, 감사합니다! 공작님께서 저를 기억해 주실 줄 몰랐는데 영광입니다!”
분홍색 머리의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아직 학생인 듯, 남자의 얼굴에는 가리지 못한 순수함이 가득했다.
어설프게 차리는 예의와 작은 칭찬에 쉽게 붉어지는 뺨에서 앳됨이 듬뿍 묻어난다. 그 어리숙한 모습이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나올 정도로.
엘런을 보던 선수가 흘깃 내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가 움찔했다.
그는 왜인지 아까보다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다시 꾹 눌렀다. 그러다 조심스레 다시 눈을 맞춰 왔다.
“호, 혹시…… 레이디께서도 배 타는 걸 좋아하십니까.”
응? 배?
나는 잠시 근육으로 부푼 그의 팔뚝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제가 하기에 조정은 힘든 스포츠 같아서요.”
“아뇨! 레이디께 노를 젓게 하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강에 놀러 오신 김에 괜찮으시면 제가 태워 드릴까 해서 여쭤본 거였습니다.”
선수는 손을 격렬하게 내젓다 강변을 눈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조정 경기가 끝난 강가에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확히는 조정 선수들이 조각배에 레이디를 앉혀 둔 채 노를 젓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레이디를 모시고 결승선인 시테 다리까지 다녀오는 게 저희 전통이거든요. 레이디만 괜찮으시다면…….”
“내가 알기로 그 전통은 일주일 전에 미리 파트너를 찾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부탁하는 건 무례해 보이는군.”
엘런이 차가운 목소리로 선수의 말을 잘랐다.
토끼처럼 귀여운 선수가 흠칫하며 동공을 떨었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지 선수는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추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사, 사실은…… 데뷔탕트 무도회 때 레이디를 보고…… 그때 여쭙고 싶었는데 갑자기 사라지셔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 용기가 생겼는지 그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오늘 다시 뵌 걸 보니 운명 같아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